[묵상글]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전봉석 2017. 7. 23. 07:21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이사야 33:6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편 21:13

 

 

 

아이들의 이름을 적었다. 생각나는 대로 주께 아뢰었다. 한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스물아홉, 스물여덟, 스물넷, 셋. 아이들의 나이를 적어보다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어른들이 되었구나. 기억이 내어주는 자리에서 이제 어른이 된 아이를 생각하였다. 아내가 병원에 들러 주사를 맞고 왔다. 같이 점심을 먹었다. 아래층 아이엄마 이야기를 했다. 잘 지내겠지?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쑥 두시는 마음은 아직 기도할 때이다. 아빠에게 보내진 아이 소식을 궁금해 했다. 우리는 각자의 기억을 더듬었다.

 

참으로 거룩이 필요한 시대다. 교회 건물 아래에만 나와도 섬뜩하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담배를 꼬나 문 젊은 세대의 입에서는 연신 욕설이 난무하였다. 요란하게 가요가 흘러넘쳤고 인형뽑기방은 토요일 오후답게 와글거렸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0:7).” 유진 피터슨 목사가 동성애 결혼 주례를 맡을 수 있다고 하여 논란이 된 기사를 읽다 접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훅, 간다.

 

사는 동안 실족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요 16:1).” 아닌 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아닌 거다. 차라리 한쪽 눈을 빼라. 한쪽 팔을 잘라라.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30).” 에이, 설마… 하면 이미 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6).” 그럴 수 있지, 하고 여길 때 슬그머니 그 자리에 가 있다.

 

그런 것이다. 저의 글이 조금은 저쪽으로 기우는가 싶었는데, 사람을 두둔할 때 영락없다. 잘라내고 구분하여 따로 두어야 하는 삶이 에클레시아, 교회다. 우리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일. 선물로 받은 믿음의 구원을,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건사하는 일이 성화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이에 이루신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6).” 그런데 가만 보니까 이런 게 다 고난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냥은 안이할 뿐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팔을 잘라내고 눈을 빼내는 일이 일어나야 소중한 줄 안다. 주를 경외할 줄 아는 게 보배이다. 오늘 말씀은 이를 분명히 하신다.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6).” 평안은 환경의 조건에 의한 게 아니었다. 아내는 여름몸살이 났고, 이래저래 밀린 고지서투성이며, 날씨 탓에도 몸은 힘들었고, 누구를 생각하다 마음은 어려웠지만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은 그런 것과는 별개였다. 오히려 우리의 힘듦이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구심점이 되어주었다. 그리하여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오직 주만 바랄 수 있기를. 거울 효과라고 하나? 나도 그처럼 된 듯 살아가게 되는 현상을 그리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유진 피터슨의 자유로운 묵상으로 말씀에 더욱 친밀할 수 있었고, 로이드 존스 목사의 말씀에 대한 갈구함을 내 것으로 삼으려 하였고, 오스왈드 챔버스의 견고한 의뢰를 흉내라도 내며 살고 싶어 한다. 바울의 주를 바라는 마음과 실수투성이 베드로의 끈덕진 믿음을 나의 것으로 여기게 된다. 저들처럼 살고 싶은, 아니 저들과 같이 살고 있다고 보는 현상이 ‘거울 현상’이었다.

 

가령 누가 나의 글을 읽는다면 이런 지지리 궁상인데도 주를 바라는 마음이 한결 같을 수 있도록 같이 바랄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였다. 우린 그냥 사는 거야. 묵묵히 주만 생각하면서 말이지. 뭘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저를 위해 기도하라고. 필요하면 다시 연결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실 테고, 더는 굳이 맺어지는 인연은 없다 해도 우리의 기도가 성령의 사역을 가늠하게 해주는 것이야. 아래층 아이엄마를 염려하는 아내에게 일러주었다. 뭘 새삼 어쩌겠다고 나설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에 대하여, 생각을 주시는 건 기도하라는 것.

 

그래봐야 뭐하겠나 싶지만, 내가 인지하는 성령의 역사는 먼지 한 줌도 안 된다. 뜬금없이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가며 그 아이를 생각하고,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하고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일. 얜 이런 게 약한데 아직도 그 일로 힘들어하는지. 또는 더 나은 믿음의 사람을 만나 바르게 신앙 궤도에 올라 안착을 하였는지. 주께 묻는 일. 전에 한 아이가 그렇게 속을 썩였다. 정말이지 기분 같아서는 꼴도 보기 싫은 아인데 이상하게 자꾸 기억이 나고, 생각은 저 혼자 그 아이의 안부를 궁금해 하며 주께 묻는 거였다.

 

가까운 인근 교회에 다니고 있고, 교회 안에서 여러 믿음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지도하는 청년부 교역자를 볼 때면 종종 내 생각이 난다는… 여전히 호들갑스런 안부를 듣고 그때 알았다. 나의 보잘것없는 ‘생각하기’가 ‘기도하기’로 변하여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어쩌면 더 이상 왕래도 없고 어떤 인연도 없다 해도 서로가 주의 자녀로 바르게 잘 자라고 있더라는. 어느 훗날에 주의 나라에서 ‘그땐 그랬었지?’ 하며 주의 이름으로 교제할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 성령이 하시는 일이었다. 이를 엿보게 하시는 게 생각나는 일이었고 그래서 기도하게 하시는 거였다. 아내는 아래층 아이와 아이엄마가 그렇게 마음에 밟히는 거였다.

 

신기하지? 쥐뿔. 생색을 내려는 게 아니라 당장 내 코가 석 자인데 이 무슨 한가한 생각인가, 싶은데.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었다. 최전방에서 직접 전선을 뒹굴며 전투에 투입된 병사가 있는가 하면 후방에서 보급을 지원하고 또는 기도로 후원하는 주의 병사들도 있는 것이다. 뭐랄까. 왜 뜬금없이, 그것도 별로 마음이 내켜하지 않는 아이를 떠올리고 얘를 궁금해 하는지. 그러니까 그게 그런 거였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씀을 나는 그렇게 이해하였다. 나의 보잘것없는 생각하기가 저의 이름을 부를 때, 주께서 저를 찾아가 또한 역사하시고 계시는 중이었다는 것. 내 눈으로 볼 수 없고 나와 더는 직접적인 연관도 없지만, 성령은 무던히 일하고 계시다는 신호였다. 이를 믿는 것이 ‘믿음으로’였다.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곧 이것이 나의 또 한 날의 구원을 이루는 일이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노트에 무작위로 아이들 이름을 적는다. 그러한 수고가 생활에 이어지고, 그런 사연이 글로 들려져서 누군가 혹여 이 글을 읽을 때 ‘나도 저처럼’ 하는 마음의 일이 거울 효과인 것이겠다. 닮아가게 되는 것, 이는 꼭 본이 되어서가 아니라 우연처럼 스쳤는데도 그 여운이 또 짙은 향취가 오래 머물다 어느덧 익숙해지는 일이다. 나도 그러고 있었다. 오스왈드 챔버스처럼 생각하고 존 파이퍼처럼 말씀만 붙들고 씨름하고 있었다. 내 아버지와 매형이 그러했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그리하여 주를 바라보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묵상글 쓰는 동안 빗방울이 거세졌다. 아이들이 교회에 나오는 데 어려울 텐데, 걱정하는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내 안에 저절로 일어나는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하여, 예수를 닮고자함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13).”

 

나의 ‘생각하기’가 기도가 되어 주의 이름으로 구하는 일에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었다. 아 이젠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가끔은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게 하시는 일이 신비롭다. 내 생활로 가져오게 하시고 나를 돌아보게 하시고는 나로 하여금 말씀을 따르게 하신다. 이처럼 주를 경외함이 내 마음의 보배로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시 21: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