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전봉석 2017. 7. 26. 07:30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이사야 36:6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시편 24:3-4

 

 

하나님만 바란다는 게 말이 쉽지 이게 참 여의치가 않다. 히스기야왕은 앗수르의 공격을 모면하고자 친애굽정책을 폈고, 앗수르는 이를 비웃는다. 그런 거 보면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 때는 단박에 저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그런데 자발적인 신뢰와 순종이 가능할까. 기근을 피하느라 슬그머니 남방으로 옮겨 앉는 셈이고 그러다 어느새 애굽의 손을 빌어 살아가고자 하는 게 아니던가. 이를 오늘 말씀은 경계하신다.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설마, 하는 것이다. 대놓고 저들처럼 살려고 작정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슬그머니, 기근만 좀 피할 요량으로 ‘괜찮겠지’ 하는 일이다. 한데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말 그대로 섬뜩하다. 상한 것으로 의지할 깜냥도 안 되는 걸 붙들고 지팡이로 의지하려 드니.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열에 열이 모두 그러했다. 사람은 그러하여 가장 가깝다고 여겼던 사람으로 깊이 박힌다.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사 36:6).” 이는 경고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선생에게서 카톡 사진이 한 장 들어와 있었다. 언제였지? 내가 다대포에 여행 가서 엽서로 적어 보낸 시답잖은 내용의 글이었다. 아련하여서 그게 언제였는가, 차마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고등학교 때였을지 혹은 대학교 때였을지. 그곳 노인과 나눈 짤막한 내용과 4000원에 여인숙에서 잤다는 말에 어림짐작이 되긴 하였다. 선생은 내게 우상 같은 존재였다. 그야말로 내가 의지하는 애굽이었던 것이다.

 

열한 시를 훌쩍 넘긴 시간에 보낸 것이니, 어디 책갈피에서 문득 나온 것인지 아니면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던 것인지. 왜 그 시각에 잠들지 않고 예전의 엽서를 꺼내 본 것일까? 어떤 그리움이 또는 아련하여서 가슴이 시린 생각들로 마음이 짠하였다. 전화라도 해볼까. 답을 뭐라 할까. 여러 번 궁리를 하다 건조하게 안부를 묻고, 가끔씩 선생을 위해 기도한다고 답하였다. 선생은 선생을 위해 기도한다는 늙은 제자의 마지막 말에 대답할 게 없었을 것이다. 싫은 것이다. 그게 보인다. 언제 접고 돌아오나 기다리는 사람 같다.

 

선생을 위해 가끔씩 기도한다. 청년의 때에 저가 하나님을 바라며 구하였던 날을 회복시켜주시기를 위해서 말이다. 그의 잔혹했던 유년의 가난의 날들과 악착같이 이를 마주하고 사느라 하나님을 외면하고 돌아섰던 앙심을. 나는 저가 선생을 그만두고 기자가 되고 한참 잘나가던 때에 그만두고 문화콘텐츠사업의 CEO가 됐을 때 저를 찬양하였다. 고등학교 때는 물론이고 저는 내게 우상이었다.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고 평생 같이 가고 싶은 친구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나의 굽이 때마다 신학을 다시 하는 것과 하나님께 귀의하는 것을 한사코 막아섰다. 어리석다는 이유였다. 부질없다는 거였다. 오늘도 언제 그만두나 기다리는 사람 같다.

 

저를 위해서도 나는 굳건해야 한다. 지난번에 뵀을 때 저의 눈엔 그저 처에 얹혀 교회라는 허울을 유지하는 것으로만 여겼다. 그러니 니 처가 얼마나 고생이 많냐. 딸내미는 뭔 죄고. 그런 말 앞에 우울해지지 않는다면 그게 사람인가. 휘청하는 것이다. 그러게, 하고 시무룩해지는 것이다. 뭔 대단한 영광을 보겠다고 돈도 안 받고, 것도 몇 명 되도 않는, 글방도 아닌 것을 교회로 운영하고 있는지. 선생은 그저, 에구 이놈아… 하고 안쓰러워서인지 자꾸 다 늙은 제자의 머리만 쓰다듬었더랬다. 저를 위해서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별 볼 일 없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 해도 믿음으로 믿음의 당당함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니 나는 주 앞에 더더욱 솔직해질 수밖에. 난 못하겠습니다, 하고 엎드리는 수밖에. 때론 그리움이 또는 아련한 보고픔이 나를 쥐고 흔들 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주의 사랑의 샘이 내 안에 있듯이 나는 선생의 마음에도 그러할 것을 믿는다. 저의 완고함이 세상에 대한 것이든 하나님에 대한 것이든.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주의 안에도 계셨듯이 내 안에도 주의 사랑이 계신 것을 알게 해야 한다. 내 안에서가 아닌 내 안에 계신 성령 안에서 넘쳐나는 생수의 강이 그에게까지 흘러가기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내 안에 주의 사랑의 샘이 있듯이 저의 안에도 주의 사랑의 샘이 있다는 것을. 지금은 바짝 말라 마른 먼지만 푸석거리고 있지만 그것은 가난에 대한 처절한 저의 복수일 뿐이다.

 

내가 가끔씩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내 안의 어떤 그리움이 저를 놓지 못한다. 누구보다 지질하던 나에게 사랑과 관심으로 대해주었던 게, 그때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던 주의 사랑이 아니었던가. 교회에 열심이었고 말씀에 주의하면서 손수 영어성경공부반을 만들어서 운영하기도 했던 이가 아니던가. 그게 어찌 단순한 공명심에서였을까. 나는 선생이 보낸 나의 어린 날의 엽서 한 통으로 센티해졌다. 우울한 것 같기도 하고 결연한 다짐을 동반하는 마음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이제 주만 바라기를 소원한다. 주 앞에서 신실하려고 하는 신실함이 아니라 주의 신실하심만 붙들고 의지하려는 신실함이다. 이 차이는 크다. 전자는 내가 어떻게 해보려는 것이고 후자는 내가 어떻게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주 앞에서 신실하려고 신실하길 원하는 게 아니고, 나는 아무리 해도 신실할 수 없으므로 주의 신실하심만 의지하려는 신실함이다. 내가 선생에게 어떤 모습을 보인들 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까? 그럴 게 없음을 애통해하는 마음이 신실함일 거였다.

 

그 비결은 우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나의 고달픈 삶의 여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주님 때문에 아이를 사랑한다. 칭얼거리듯 성가시게 구는 아이를 주의 마음으로 대하는 일. 그렇게 이웃을 대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 어떤 의를 행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솔직히 싫다. 못하겠다. 그럼에도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의 고난이다.

 

아내가 일찍 수업을 끝내고 나왔다. 이상하게 다시 공황이 온 것 같다. 어떤 불안이 또는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서일까?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다. 단지 그 정도가 아니라 숨을 쉴 수 없어 깊이깊이 숨을 몰아쉬어야 한다. 뒤늦게 신경안정제를 먹고 아내가 나왔는데도 잠깐 같이 앉아서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왜 그러지? 나는 그 이유를 찾다 그만두었다. 아내는 딸애가 직장을 그만두게 돼서, 곧 언제고 시집을 보내야 해서, 얼마 전 엄마가 아프셔서, 애들이 교횔 안 와서… 여러 이유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왜? 하고 물을 때 모든 게 엉망이 된다. 바람은 임의로 불고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임의로 다스리신다. 거기다 대고 왜 그러시지? 뭐지? 하고 이유를 묻고 따지느라 마음을 소진하고 싶지 않다. 그러느니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다. 어떻든, 내게 어떠하시든 하나님은 가장 선하게 나를 인도하신다. 이쯤해서 교회도 좀 부흥을 하고 뭔가 보란 듯이 떵떵거릴 수 있어야, 선생에게도 버젓이 의기양양할 텐데… 하는 생각은 선하지 못하다. 신실하고자 하는 나의 신실함이 신실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그럼 어쩌나.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선순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 ‘먼저’다. 뭐든 그게 뭐든 그것보다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는 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 염려야말로 내 안의 샘을 마르게 하는 일이다. 샘 안에서 넘치는 강물은 여전한데 푸석푸석 먼지만 날려서야 어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내가 아나.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저리 안달복달 억척스러운 게 아니던가. 그럴 거 없다. 분명한 건, 지금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내 안에 소망을 두시는 이가 또한 그 일을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것이다.

 

곧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두셨으니 이루실 마음이다. 시작하셨으니 이루어내실 끝이다. 확신하노라. 선생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승화되어 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더는 우리 생에서 예전처럼 지낼 수 없다 해도 어느 훗날 나의 기도가 저의 잃어버린 영혼을 회복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기를. 그러라고 주가 두시는 마음이려니.

 

그리하여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 24:3-4).” 먼저는 손을 깨끗하게 함이고 마음을 청결하게 하여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음으로 거짓 맹세를 더는 하지 않는 삶이었다. 곧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