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전봉석 2017. 7. 25. 07:24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이사야 35: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1

 

 

 

막연하여서 이를 못 견뎌하며 나름의 기치와 목표를 정하고 분명한 어조의 삶을 지향하는 세상에서, 어쩌면 주를 따른다는 건 이와 같은 불확실함의 은혜를 누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길이며,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그 믿음의 결정은 바랄 수 없는 것 중에 있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그렇겠다. 나는 뭔가 확실한 무엇을 자꾸 선호하는데 하나님은 점점 불확실한 가운데 두신다. 얘가 올까? 이래봐야 무슨 변화가 있기는 할까? 이 길이 맞는 걸까? 계속 가야 하나? 싶을 때 결국은 붙들 수 있는 게 말씀뿐이지 않나.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뭔가 분명한 뚜렷한 증표를 요구하는 마음이 나를 시달리게 하는 거였구나. 지독한 나의 싸움은 나의 완고한 의지였다.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하실지 알 수 없으니, 어떤 일에 대한 막연함이 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면서 하나님께만 뚜렷한 신뢰를 바랄 수 있게 하시는 거였다. 딸애는 졸업과 동시에 시작했던 선교단체 일을 그만둔다. 다른 일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여서 막연함은 종종 불안함이 되어 우릴 시험한다. 그런 와중에도 주께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를 붙들 때 어떻게 설명할 길 없는 평안이 있다.

 

손에 쥔 것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지만 여태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분명한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가정예배를 드리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의연하게도 우리는 태평하였다. 이럴 때 운전면허부터 따놓지 뭐. 딸애의 배짱도 멋져보였다. 뭘 하든, 어디 있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구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구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주님은 분명히 하셨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

 

주의 이름으로 구한다고 하면서 실은 내 이름으로였음을 고백한다. 교회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서도 혹은 성도로 사는 일에서도 그것으로 나의 이름을 구하지 않았던가. 수입은 좀 되는지. 먹고 사는 문제에는 지장이 없겠는지. 사람들이 좀 알아주겠는지. 그 가운데 어떤 보람을 찾을 수 있겠는지. 아닌 척하지만 사실은 내 이름이었다. 취직하기가 어렵다는데, 이 시기를 놓치면 시집가는 일이 묘연하다던데, 교회가 부흥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데… 하는 따위의 말에 시달리며 그것을 바라고 구하는 데 전념하지 않았던가.

 

그게 어디 딸애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만, 늘 얘는 눈에 보였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어림도 없었을 인생경로를 목격하였던 것이다. 뭘 앞에 두고 어쩌지? 하고 힘들어할 때 힘들어할 겨를도 없이 하나님은 바른 길을 내셨다. 그때마다 신기한 건 아이의 평안이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부모의 신앙을 회의하던 게 신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누구처럼 좋은 직장을 운운하다 선교단체 일을 맡게 되던 때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때마다 우린 놀랐다.

 

어쩌지? 하고 염려가 올라오다가도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셨는데 뭐! 하는 배짱이 드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의 문제겠다. 두려워할 거 없다. 보면 이미 다 해두셨다.

 

아직 교회 월세도 못 냈고, 석 달 째 아파트 관리비도 밀려있는 상태여서 아내와 나는 주춤하였다. 이제껏 변변하게 한 것도 없지만 막내 동생이 선교를 나갔다 온다는데 얼마라도 좀 교회이름으로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뜻하지 않게 좋은 침대가 생겨 좋았지만 운반비 얼마가 현찰로 뭉텅 나갔어서 더더구나 부담이 되었다. 마음만으로 족한가, 하고 있는데 아내가 냉큼 생각해두었던 선교비부터 보낸 것이다.

 

이런 걸 어떻게 조화롭게 설명할까 모르겠지만 그런 불편한 마음이 있을 때 낮동안에 읽고 묵상하였던 말씀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다보면 마음에는 새가 날고 눈앞에서는 백합화가 피어난다. 나에게 주시는 능력이 이처럼 불확실한 데서 주의 돌보심을 확신하는 데였구나.

 

나는 병적으로 시달렸다. 결제 날을 어기면 안 되고 공과금은 제 날짜에 내야 한다. 누구를 만나도 몇 십 분 전에는 가 있어야 하고 뭘 해도 조금은 여윳돈이 있어야 한다. 돈 없으면 만나지를 않는 사람이다. 시간에 쫓기느니 아예 다음으로 미루고 만다. 제때 못할 거면 안한다. 이는 조급증이었다. 안달이었고 그런 만큼 내 안의 서운함도 적지 않았다. 가령 누구를 만나는 데 있어 나는 이만큼 공들이고 애지중지하였는데 저가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거기까지다. 그래서 어쩌면 내 생의 가장 큰 상처는 회생절차를 밟은 것이다.

 

그 뒤로 난 내 이름의 거래를 하지 않는다. 카드도 없고 신용도 없다. 더는 내 이름을 걸고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거의 병적으로 나는 괴롭다. 그런데 그러던 사람이 무난해지는 것이다. 아니 조급증에서 놓여나는 일이다. 이는 ‘어떻게 되겠지’가 아니라 ‘주가 하신다’는 확신의 능력이다. 설령 그리 아니하신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하고 놓아둘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 이럴 사람이었나? 예전에 좋던 게 어쩜 이렇게도 부끄럽기만 한 것인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전혀 요동하지 않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소망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고 내가 일구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그러니까 말이다. 장래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안다고 이처럼 무모하게 굴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서는 내 안에 두시는 소망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3).”

 

혼자 들어앉아 뭐하는 짓인가, 싶다가도 이곳에 교회를 두시고 나로 하여금 여기에 있게 하시는 이가 계시니 저는 그리스도가 아니신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내 안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두신 이가 나로 하여금 오늘을 주께 맡기게 하시는 데 별 수 있나? 이것까지도 내 의지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거 보면 알게 모르게 서로는 닮아가는 모양이다. 전에 같으면 안달을 하고 얼굴빛이 어두워져 서로 시무룩하였을 텐데, 염려와 근심이 없을 수는 없으나 우리는 이제 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여기에까지 오게 하셨는지. 우리 안에 두시는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지. 돈이 없어서 아파트 단지 내 헬스를 당분간 쉬겠다는 소리에 둘이 합쳐 꼴랑 3만원, 서로는 풉풉 웃으며 가진 동전까지 탁탁 털었다. 사는 게 가벼워졌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으나 결코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 무모한 삶을 말씀이 조성하고 계신 게 아닌가.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일이란 둘 중 하나다. 바보이거나 믿음이 투철하거나.

 

아브라함이 갔던 길도 모세나 다윗의 여정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우리에게 무모함을 빼면 남는 게 뭐 있나? 그래서 답답하고 운신이 어려울 거 같은데 오히려 자유롭다. 나는 언제부턴가 돈이 필요 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서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데 이르렀다. 아내가 지난 주에 넣어준 돈 삼천오백원이 그대로 지갑에 있었다. 전에 같으면 처량했을 것을 이젠 서로가 깔깔거리며 끌어 모아, 딸애와 아내는 헬스를 새로 끊는다. 영적인 삶이란 그리 복잡한 게 아니었다. 오늘 말씀을 나는 시적으로 읽는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사 35:1-2.

 

어찌 광야의 메마른 땅이 기뻐할까. 어찌 사막의 백합화가 즐거워할까. 그럴 수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었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이었다. 고로 오늘 시인은 단언하건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나는 항상 보면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참 좋다. 기록은 막연하지 않아서 어떤 수로든 남는다. 증거다. 확신이다. 이 불확실한 지경에서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말씀으로 인함이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 불가능의 미학이다.

 

고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