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이사야 37:31-32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 25:4
돌이켜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복이다. 회개의 영을 부어주셔야 한다. 성령을 더하셔야 할 일이다. ‘피하여 남은 자’를 남겨두심은 뿌리를 더해 그 씨를 보존하시기 위함이겠다. ‘피하는 자’가 나올 것이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다. 아무리 뭐라 해도 소용없을 일에 대해 나는 묵묵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그러는 데 따른 주의 신실하심 앞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일. 붙들고 씨름해야 할 게 따로 있었다.
지독한 꿈이었다. 무슨 일인지 예배에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아이와 아이엄마들로 북적였고, 자리가 없어 돗자리를 펴고 아이들을 그곳에 누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말씀을 증거 해야 하는데 본문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아무리 뒤져도, 한참 뒤지다 보면 다른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울고 사람들은 웅성거리는데 나는 계속 본문을 찾지 못해서는 허우적거리다 깼다. 창밖으로는 매미소리가 극성스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선선한 기운에 가을인가 하였다.
생생하니 꿈을 더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꿈이어서 다행이다 싶은,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은 다섯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어찌 본문을 찾지 못해 헤매다 깼을까. 덕분에 일찍 일어나서 말씀 앞에 앉았다. 히스기야 왕이 무릎을 꿇고 주 앞에 나왔다. 하나님은 가끔 보면 속도 좋으시지, 그래도 또 용서를 해주신다. 여호와의 열심이시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속 편한 마음이 아니라, 열심을 다해 참으시고 인자하시는 것이다. 내가 주 앞에 어떠했는지는 더 말해 무엇하나.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시 25:7).” 딱 내 기도다. 하나님은 속도 좋으시다. 그래도 또 용서를 해주신다.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나를 보고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 아주 속이 터진다. 아이 둘이 수업 중에 다투었다. 갑자기 여자아이가 소리 지르며 울었다. 안 봐도 앞에 있던 녀석이 깐죽거린 것이다. 녀석은 그런 게 아니라고 억울해했다. 계속 뭐라 말을 하다 지쳐서 저도 울었다. 두 아이가 우니까 정신이 없었다.
농협이 주체하는 ‘쌀 사랑’ 주제의 동시를 하나 쓰는데 다섯 아이를 건사하려니까 맥이 풀렸다. 아이는 억울하다. 우는 애는 화가 난다. 곁에 있던 아이들은 나 몰라라 한다. 뭘 어떻게 하려다가 난 그냥 울게 두었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게 했다. 진정하고, 그저 누가 먼저 미안하다고 하면 될 일이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낭자한 빈자리를 치우는데 어머니가 오셨다. 감자를 한 박스 주고 싶은데, 먼저 연락을 하면 오지 말라고 할까봐 그냥 오셨단다. 모두가 저마다의 사연에 치여 산다.
주의 신실하심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딱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정도였다. 내가 주 앞에서 신실해야겠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닌 것이다. 나는 하면 할수록 못하겠다. 그래서 더욱 주를 바란다. 그리고 주의 신실함만 붙든다. 여호와의 열심이시다. 다른 거 없다. 힘에 부쳐 쩔쩔매다가도 그 일로 주를 바라고 있는 자리에 서면 그 일의 의도를 알겠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내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까지 열심이시다. 주가 하시게 하는 일이 내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떻게 하려는 것을 멈추고 주가 하시게끔, 그런 자의 특징은 어떠할까? 어제 아침에 묵상하였던 말씀이 내내 길을 내어주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 24:4).” 손을 깨끗하게 하는 것, 곧 하는 일을 주 앞에서 바르게 하기. 그러자면 마음이 우선하여야 하고 이에 청결함은 허탄한 데 마음을 두지 않는 일이다.
곧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내 자신을 연단한다는 일, 내 의지 내 목적은 오로지 주를 의지하는 데 전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짓 맹세로 자신을 다잡지 않는 일이다. 나의 신실함이 아니라 주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일. 그런 자가 여호와의 산에 오른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시 24:3).” 나는 나의 의지로는 할 수 없음이다.
이를 알 때 체험을 선호하지 않는다. 마치 간증을 표준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하는 디딤판이 되어줄 뿐이다. 어떤 특별하고 기이한 체험을 주장하며 이를 마치 자신만을 위한 신비로 빠져들 때 외려 발목이 잡힌다. 그것으로 ‘택한 자를 미혹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누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한 간증은 거기서 아멘, 하면 될 일이다. 그걸 강조하고 모두가 그래야 할 것처럼 떠벌이는 일은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8).” 보면 그런 자들은 인기스타다. 명강사다. 어딜 가나 환영 받는다. 책을 내도 베스트셀러가 된다. 여러 교회에서 초대해서 그의 간증을 듣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그의 특별함에 놀란다. 주를 찬양하는 것 같지만,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한다. 자기 배를 섬긴다. 교활하다. 아첨하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순진한 자의 마음을 미혹하는 것이다.
사탄도 그렇지 않던가.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이런 데 혹하는 경우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일을, 그의 능력을, 도우심을 우선하여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도 그런 걸 구한 적이 있다. 뭔가 좀 남다른 어떤 신통력 같은 은사를 주셔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사람들이 좀 모이지 않겠나. 그런 마음으로 그래야 주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런 내게 하나님은 얼토당토않은 신경쇠약을 주셨다. 목사가 대인기피증이 있어서야. 이게 뭔가 싶었다.
이제와 분명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장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오나 안 오나, 교회가 잘 되나 안 되나, 뭔가 이뤄지나 안 이뤄지나 하는 저울로 가늠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체험은 중요하고 이를 나누며 주를 찬송하고 더욱 주를 바라는 일은 귀하다. 한데 나도 저처럼, 누구처럼, 어떤, 근사한, 무엇을 요구하는 마음에는 이미 불순함이 깔려 있던 것이다. 하나님을 빙자한 그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며 그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제외하는 칭송을 받으려는….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그 어떤 일보다 귀한 거였다. 다 몰라도, 아무도 알지 못해도, 어느 대문간에서 걸식하며 헌데를 앓다 죽는다 해도 주를 의지하는 일이 숭고하였다. 아이들을 다독여서 돌려보내고, 그런데도 마다하지 않고 재미나게 오는 아이들이 신기하였다. 아무 것도 변변찮은 게 없는데 나를 좋아라 여겨주는 아이들의 마음이 희한하였다. 여기가 교회인 걸 알고 은연중에 주의하는 아이들이라니. 참 놀라운 건 별 거 아닌 데 있었다.
오로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죽이 되도, 밥이 되도 달려가노라. 우선하여 그 부활과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는 일로써 말이다. 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일에서 단순한 측은지심이나 공연한 사명감으로가 아니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주를 본받는 일에서다.
무더운 하루를 보내는 일에서도, 성가시지만 늙으신 노구를 이끌고 사위를 찾아온 장모를 마주하는 일에서도, 부실한 내 몸뚱이를 건사하는 일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는 본이 있어야 한다. 이럴 수 있는 건,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때문이었다. 이게 어디 내 의지나 노력으로 될 일이었나. 그런데 된다. 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 4:13).”
꿈에서도 내가 말씀을 붙들려고 하였구나. 사람들 앞에서 본문을 찾으려고 허둥대던 모습을, 빙충맞지만 나는 그리 짐작하기로 하였다. 그래도 말씀이었다. 신기하지? 단테의 <신곡>이 재미지다. 그런데 잘 읽히지가 않는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는 수려하다. 문장이 찰지고 어휘가 놀랍다. 그런데 한 대목 읽고는 다시 던져둔다. 여느 소설은 손을 안댄지 꽤 됐다. 그 좋아하던 시집도 가끔씩 집어 들까? 그리고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을 두 번째 세 번째 다시 읽는다. 존 파이퍼의 집요한 말씀 연구가 귀에 들어온다.
말씀으로 씨름하는 이의 글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이를 내 글로 가져와 내 삶에 풀어놓고 싶어 안달이다. 나도 저들처럼 살고 싶다. 모세가 되고 싶다. 이사야였으면 좋겠다. 다윗이면 오죽 좋을까. 저들 특유의 체험을 부러워하다 그 이상의, 나를 향하신 주의 사랑을 확신한다. 모든 믿는 이의 체험은 독특하다. 개별적이어서 특이하다. 하나님이 별도로 조성하신 저만의 에덴이었다. 근사하고 기이하다. 그만하면 됐다. 그것으로 무얼 할까? 오직 주를 의지하는 것으로 족하였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시 25:4).”라고 기도하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1).” 하는 기도로 마무리한다. 그리하여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5).” 이것으로 이미 충분하였다. 감사는 늘 그만큼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고로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6).”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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