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전봉석 2017. 7. 28. 07:29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이사야 38:17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편 26:2

 

 

 

새들의 지저귐같이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새롭다.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사 38:14).” 괴로움 앞에서 그 고통을 또 슬픔을 이처럼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뿐이다. 슬픔과 고통이 없어진다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운다. 그러므로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니 우리에게 주가 계심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으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다 모른다. 누구도 날 알아주지 않는다. 할 때 밀려오는 게 자살충동이다. 단 한 사람 내 속을 알아주고 이해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람에 대한 실망은 끝 간 데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모두를 알아주시는 이가 계시다는 것. 그 위로와 안도는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제비처럼 학처럼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면서도,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하는 고백을 올려드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17).” 하는 확신의 고백. 아, 믿음보다 신비로운 게 있을까? 믿지 못하는 게 신기한 게 아니라 어떻게 이런 게 믿어지는 일이 신비롭다. 막연한 느낌이나 그럴 것이라는 기대 정도의 것이 아니라, 더할 게 없는 확신. 주가 나를 살피시고 단련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이런 일이 어찌 사람으로서 가능할까. 내 의지나 상식과 이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이시다. 성령을 받는 일은 너무 간단하여서 누구나 단순해지면 얻을 수 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구하지 않는 까닭은 그 속이 단순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혹시나 하는 의심이 곁들여져서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겸손이고, 겸손이란 성령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필요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그래서 그런 걸까? 요즘은 부쩍 주가 아니시면 이 애를 내가 어쩝니까? 저 애가 어찌 오겠습니까? 저 사람도 자기가 자신을 어쩌지 못하는 것을요! 하고 기도한다. 지난 주일에 오려고 했는데 비가 많이 와서 엄마가 가지 말랬어요. 중2 사내 녀석의 그와 같은 말에 내 안에서 알 수 없는 기쁨이 일었던 게 어찌 내 것이었겠나? 얘가 그러니까 주일에 오려는 마음은 늘 있던 것이지?

 

오전에 와 글을 쓰고 돌아가면서 나는 불쑥, 그럼 일요일에 보자, 하고 인사를 했고 아이는 문득 네? 아, 네. 하고 대답을 했다. 성령이 아니시면 안 됩니다. 애가 오겠나? 또는 얘가 오고 안 오고 내 안에 이는 기대나 어떤 바람이 내 의지의 것이 아닌데 그럼 그 출처가 성령이시지 않겠나? 내가 뭘 쟤 때문에 기뻐할 거까지야. 또는 실망할 일도. 성령이 아니시면 안 된다는 간절한 심령이, 심령이 가난한 것이지 않겠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이미 내 안이 천국이었다.

 

남다른 조건이 형성 되어 그리 여기는 게 아니라 다를 바 없는데, 힘에 겨워 때론 죽겠는데, 분명히 슬픔과 고통이 나를 두르고 있는데,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더는 슬픔과 고통의 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질질 끌려가던 시절은 지났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

 

순종한다는 건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에 주목하는 것이다. 성령이 하시는 데 따른 주도를 내어드리는 게 된다. 내가 어떻게 해보려는 나의 안달과 복달을 접어두는 게 순종이다. 내 생각엔 이게 나은 것 같은데, 이래야 할까 저래야 할까 싶은 여러 갈등에서 시달림을 당하더라도 끝내 주의 뜻을 구하는 일이 순종이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19).”

 

사람의 세상에서 사람의 예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겠으나 전에처럼 나의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어주는 게 아니라 이제는 의에게 종으로 내어주는 일, 아이를 대하는 일에 주의 마음을 바라고 주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일, 이것이 거룩이었다. 한꺼번에 다섯 아이가 다 올 거란 소리에 수업을 그리 준비했다. 구형 노트북도 하나 더 펼쳐놓고 각각 글을 쓸 수 있게 하였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다 안 오고 한 아이만 온 것이다. 화딱지가 나고 고작 이 아이 하나 때문에 수선을 떨었나, 허무하기까지 하였는데. 두런두런 이야기 끝에 주일에 대한 아이의 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성령이 하셔야 한다는 걸 말이다.

 

신기하지? 전엔 그게 뭐 그리 중요하지도 않았고 안중에도 없던 것이었다. 곧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20).” 아이가 주를 바라고 주 앞에 나오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내 친구가, 저 선생이 하나님을 어찌 생각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나부터도 아무렇지 않던 일에서 이제는 사망을 본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21).”

 

그래 맞다. 성령의 역사는 어떤 대단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짠, 하고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지고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성령의 제일 목적은 우리로 예수께만 집중하게 하는 것. 하나님만 바라게 하는 일. 그 갈급증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 제비처럼 비둘기처럼 학처럼 지저귀며 주를 묵상하게 하시려고,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내가 뭘 알아서가 아니라 알 수 없으니까 주를 더욱 바라는 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4).” 성령이 예수를 더 알리시겠다는 것.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15).” 성령의 역사는 분명하였다. 예수를 알게 하시는 일. 주를 바라며 그 말씀 앞에 순종하게 하시는 것. 오롯이 주께만 집중하게 하시는 일. 그런 걸 두고 신유니 은사니 예언이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으니.

 

성령을 받는 일이라는 게 사뭇 왜곡되었음을 알겠다. 사람이 뭔가 요령껏 신비를 강조하는 데 성령을 이용해왔음을 알겠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여서 나에게 두신 일상에서 나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 더욱 주를 바라며 구하게 하시는 일이 성령의 사역이었음을 알겠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비로소 더욱 간절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던 게 바로 그것이구나. 자신을 돌아보며 주가 그 생에 어찌 관여하셨는지, 민족을 위해 무엇을 구하여야 하는지를, 이를 알게 하시는 게 성령이셨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38:2-3).” 훗날 저의 기도가 득이 되었는지 해가 되었는지, 가장 악한 왕 므낫세를 낳았으니 것도 묵상해볼 일이기는 하겠지만. 나는 생각하기를 어찌 됐든 한 번 사는 인생이 아닌가. 그래서 세상은 ‘욜로’를 운운하며 자신을 위해 살 것을 강요하지만, 그런들? 그러니? 그래서?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성경의 당연한 이치다.

 

횡단보도 앞에서 잠깐 호화로운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길 건너 이쪽은 임대아파트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저쪽은 몇 십억을 호가하는 호화로운 아파트에 산다. 다닥다닥 붙어 있기는 마찬가지고 뻘쭘하니 기다랗다 올려져 포개진 건 다를 바 없는데, 그러니! 그래서? 결국은 다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이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 앞에 우리는 그럼 무엇을 붙들고 살 것인가. 저 한 칸, 한 채 얻겠다고 아등바등 사는 꼴인 거고. 저런 걸 몇 채 소유하고 고가의 자가용을 몰며 떵떵거리며 사는 게 다들 남다른 꿈이겠으나, 그런들?

 

들춰보면 저들도 다 압제를 받는 것이고 그런 게 인생이었다. 많으니 많아서 쩔쩔매는 꼴이고, 없으니 없어서 쩔쩔매는 꼴이고, 우리는 저마다 그에 따른 꼴값을 치르느니 애쓰고 수고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사 38:14).” 나는 든든한 것이 나의 중보가 되시는 이가 계시다. 저에게 나는 담대히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성령을 받는다는 일은 주께 집중하는 삶으로 주님만으로 감사할 수 있는 거였다. 뭐 대단히 거룩하여서 또는 능력이 처벌처벌 넘쳐서 오? 하고 누구의 부러움을 사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있는 듯 없이 없는 듯 있는 평범한 일상에서 오직 주만 바라는 일. 그러기 위한 슬픔과 고통인 것을, 주여 주가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시 26:1).”

 

이는 내가 그리 한 게 아니라 내 안의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을 확신하는 것. 고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