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전봉석 2017. 7. 30. 07:11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사야 40:3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편 28:6-7

 

 

 

나를 통해 복음이 흘러갈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우리 성도들을 두셨다는 것.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세례요한의 모습이 곧 오늘 우리의 본이 되는 것이겠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감출 수 없는 산 위의 동네 같고, 소금 같고, 빛과 같은 존재들.

 

민수기를 읽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입장을 알았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민 15:41).”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는 정도였다. 토요일 오전. 아무도 나오지 않은 텅 빈 사무실 저 안쪽 글방에 있으면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려고’ 나를 그 친구들 사이에서 또 그리 어울려 돌아치던 세계에서 겁 없이 함부로 굴던 마음과 병든 영혼으로 쿨럭쿨럭 힘겨워하던 상황에서 노예의 때에 ‘너를 인도하여내었다.’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려고! 하시는 음성이 들렸다. 그런 나를 오늘 하나님은 문지르고 문지르신다. 은장색은 문지를수록 광택이 나는 것처럼 성도의 삶도 날마다 가꾸고 돌볼 때 윤이 나고 빛이 더한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에 쓸까. 빛이 어둠을 밝히지 못할 정도이면 뭐에 쓸까. 산 위의 동네가 감춰져 있으면 어쩔까. 그리하여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성령이 내주 임재 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래서 견디기 힘든 어려운 순간이 왔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구나. 부패가 시작될 때 소금은 제 역할을 하는 것이고 어두워질 때 빛이 소용 있으며 많은 여행자의 피로가 겹겹이 쌓여갈 때 산 위의 동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겠다. 그러는 데 있어 순종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될 것 같은데 될 것 같으면서도 되지 않는 게 순종이다. 고개를 끄떡거리며 금방 알아듣고도 삶에서 순종이 나타나기까지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많은 걸 잃고, 한참동안 고통 중에 있어봐야 안다.

 

말을 소금으로 맛을 내는 일은 오랜 생각과 생각이 더해져서 도달하는 자리였다. 무난할 때야 누군들 유순하지 않겠나. 실질적인 어려움이 닥쳐봐야 비로소 성령의 열매는 구분이 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그러기까지 지난한 싸움은 끊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

 

어쩌면 내 안에 생각이 많고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는 건 건강한 일이다. 영적으로 가장 큰 타락은 안주함일 테니까 말이다. 이 정도면 됐어, 잘 했어, 더 어쩌겠어? 싶은 자기만족이 영혼으로 위로를 삼는다면 여기서 태만은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 다른 더 좋은 수는 없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마음을 주시고, 순간 그 마음으로 생각이 많아지고. 알 수 없는 갈등이 또 싸움이 빈번해질 때 오히려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요하게 그 싸움을 이어가다보면 나의 묵은 떼는 벗겨지고 새 살이 드러난다. 아,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잠 15:30).” 그런 자는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16:20).” 그렇구나. 불쑥 떠오르는 생각처럼 비로소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4).” 이와 같은 역설이 가능한 것이었다.

 

하여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3).” 주가 내게 두신 오늘의, 주의 이름을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아픔이 어려움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십자가였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래서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역동적인 불구의 삶으로 묘사하셨던 것이구나!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 손이며 발이며 눈이며, 이를 잃은 것처럼 스스로 불구가 되어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었다. 세상 사람들처럼 그럴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예전처럼 즐거움을 좇을 수 있는 데 더 이상은 그러지 않고, 그럴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돈이 있다고 넉넉함으로 누리지 않고, 건강이 있다고 이를 뽐내며 과시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지식을 남다른 재능을 헌신을 봉사를 결코 ‘사람에게 보이려고’ 살지 않는,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사람들로서의 생활이었다. 그렇겠구나! 때론 답답하고 혹은 모자라서 기껏 함께 지내던 이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조롱을 겪는다 해도 이젠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아는 일이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 좋은 것을 멀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들이로구나.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는 특권을 가졌고 가난하고 무능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혼자 책을 읽으며 또 말씀을 찾아보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순간이 여러 번이었다. 아내가 느지막이 나왔다. 길 건너로 가 점심을 먹었다. 딸애가 이번 기수들 수료식을 잘 치렀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누가 상품권 세 장을 주어 평소엔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피자를 시켜먹었다. 없어서 늘 쪼들리는 것 같은데 항상 누리게 하시는 데 놀라웠다. 주께 집중하는 게 사역이다. 다른 거 없다. 사람들이 내세우는 여러 구호에 귀 기울일 거 없다.

 

주께만 건실하면 예상 밖의 결실을 내신다. 유용성의 문제도 아니고 나의 의무로도 아니다. 달리 어떤 표현이 적합할까? 무던함이라 해두자. 묵묵히 하던 걸 하는 일이다. 시계추처럼 정직하게 그리고 무던하여서 주 앞에 서는 일. 아침에 일어나 습관처럼 글을 쓰며 묵상을 한다. 생각은 저 혼자 들락거리는데 글은 정돈이 되어 나를 이끈다. 혼자 앉아 아침을 먹고 늘 한결 같은 시간에 글방으로 나간다. 이제는 할 일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시계추는 할 일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혼자 있는 게 때론 과하다 싶게 외로울 때도 있지만 적당히 아이들이 오고, 적당히 몸은 어려워하고, 적당히 마음은 시달리는 동안 나는 그저 내가 하던 일을 하는 것이다. 주께로 집중하는 것. 책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누구와 이야기를 해도, 혼자 복도 저 안쪽 주방에까지 걸레질을 할 때도, 똥을 싸고 밥을 먹고 사랑을 할 때도, 주께 건실하다는 건 흔들림 없이 미더운 사람이 되는 일이다. 주님 앞에서 말이다.

 

군에 간 녀석이 휴가를 나온다고 해서 고기를 준비하고 쌈을 샀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올 테니까 어떤 예를 들어 ‘허무한 것에 대하여’ 설교하면 좋을까? 생각을 하고. 누가 올까? 얘가 와야 할 텐데, 하며 주께 아뢰고. 나의 하루는 누구 눈에 띄는 게 아니어서 때론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마치 내가 관리인인 것처럼 화초를 돌보고 복도에 떨어진 휴지를 줍고 문단속을 하는 일에도 ‘주의 이름으로’ 할 수 있다. 교회가 들어 있는 자리에 주의 성소가 이루어지는 일이다. 내가 서는 자리에 주님이 임재하실 수 있도록.

 

이것이 내 몸 값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거저 사는 게 아니다. 충분한 값을 지불하시고 사셨다. 내가 내 것이 아니다. 아!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더는 흐트러짐 없이 이 길을 가게 하시려고, 신경쇠약을 더하시고 몸의 연약함을 견뎌내게 하시며 외로움을 감수하고 쓸쓸한 가운데 놓아두시는 일이었다. 스스로 손을 잘라내고 다리를 팔을 눈을 잘라내어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 값어치를 알기 때문이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것이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심지어 나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나는 내 것이 아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러므로 나의 역할은 분명하였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시 28:6-7).”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함이라.

 

보잘것없으나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4-5).” 그러니 내가 이러고 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나 같은 이가,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6-8).”

 

주일 아침, 아이들을 생각하고 나와야 할 아이들을 생각하고 기억에 희미한 아이들을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