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전봉석 2017. 7. 29. 06:55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이사야 39:8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편 27:14

 

 

 

저에 대한 말씀을 묵상할 때면, 사람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해 한숨짓게 된다. 기껏 죽을 때에 살고자 하여 덤으로 살게 된 15년의 세월동안 그가 한 일을 돌아보면 말이다. 뒤를 이을 므낫세를 낳았고, 궁전과 곳간을 열어 적에게 자랑하였으니. 우쭐했던 모양이다.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사 39:2).”

 

이에 그 후손이 포로가 되고 자신이 내어 보인 걸 다 빼앗긴다는 데도 자기 살아생전에는 평안하고 견고하다는 데 좋아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위선을 또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시는 예시 같다. 모처럼 친구와 통화를 했다. 그의 모친이 돌아가신 뒤로 처음이니까 족히 반 년은 더 된 것 같다. 서로의 우정이 어떠니 하면서 좋아 죽을 땐 언제고, 너무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어서 낯설었다. 근황을 전해 듣다 자식들 이야기에서도 저는 마치 잘 모르겠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면서 지겨워했다. 말이니까 그렇겠지 여겨도, 다 그런 것이다. 돌아누우면 남보다 못한 것이다.

 

동기 전도사가 전화를 하였다. 아이가 잔병치레가 많았다. 그러니 늘 아이에게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다. 며칠간 감기 때문에 또 입원을 시켰던 모양이다. 주께 맡기지 않는 이상 감당이 안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런 와중에도 누가 격려하여 학비까지 보태준다며 남은 복지사 1급 자격을 따야할지 물었다. 보면 하나님의 일은 물 흐르는 듯하다. 억지스럽지 않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이게 맞나? 싶을 정도이다. 이끄심은 때로 내 의지와 상관없을 때도 있다. 지나고 난 뒤에야 ‘그래서 그러셨구나!’ 깨달을 때도 있다. 그리 말해주었다.

 

아이들이 휴가를 떠나 오후 수업이 없었다. 일찍 설교문을 작성하였고 주보까지 만들어서 한갓지고 여유로운 오후였다. 모처럼 김수영의 산문집과 오스기니스의 <세상이 묻고 진리가 답하다>를 주문했다. 한 아이가 계속 마음에 밟혀 전화를 하고 문자를 넣고 카톡을 남겼는데도 답이 없었다. 내가 너무 소원했나, 미안해졌다. 스물아홉. 흉부암이 다시 재발돼 항암치료를 받는다는 소식까지 들었는데. 가만히 앉아 아이를 생각하다 주께서 어찌 이루시는가, 궁금해 하였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었다.

 

요즘은 자리에 눕기 무섭게 잠이 든다. 새벽에 일찍 깨우시느라 그런가, 친구는 나의 달라진 일상을 기이히 여기는 듯하였다. 열시 열한시면 자는 사람이라 어디 밤낚시라도 가려면 그게 가능할까, 싶다. 한데 친구는 여전히 야근에 외근에 회의에 바쁘다. 넌 어찌 평생을 바쁘게만 사는구나. 나의 말이 친구를 멈칫하게 하였다. 그러네, 하는 그의 말이 쓸쓸하게 들렸다. 돌아보면 그립고 다시 보면 안됐고 내다보면 아쉬울 게 없는 사이가 되었다. 사람 관계라는 게 참 허탈하였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고. 권세는 길어봐야 십년이고 꽃은 아름다움이 열흘을 넘기기 어려운 법.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라는 게 다 때가 있고 그 주파수가 맞을 때도 있는 것이다. 히스기야의 반응이 의아하다가도 그게 본시 사람이구나, 생각이 든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 그게 어찌 사람 관계에는 해당이 되지 않겠는가. 건강은 물론이거니와 하는 모든 일이란 게 그렇겠구나. 주님이 맡기셨을 때 성심껏 다해야 한다. 보면 꼭 지나놓고 후회를 하니.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시 27:13).” 하는 다윗의 기도가 크게 들린다. 그 비결은 기다림이다. 담대함으로 기다림이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14).” 주의 선하심은 늘 한결 같으신데 이를 확인하는 순간이 늘 지나고 나서니까 말이다. 그저 사물을 인지하는 능력과도 같겠다. 사람의 한계다. 귀하였다, 하면 이미 지난 후라.

 

학습효과가 필요하다. 한두 번은 지나쳤다 해도 그와 같은 줄 알아 ‘담대하며 주를 기다릴지어다.’ 그럴 수 있는 게 믿음이었다. 그러니 내가 나를 인정하는 일, 그 한계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이 또한 빈번하여서 또 그런다. 그래놓고는 다시 그런다. 참 개 같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작은 누나의 딸애니까, 친구는 조카애를 걱정하였다. 대학도 작파할 정도로 공황장애가 더욱 심각해졌다는 거였다. 나의 생각은 간단하여서 자꾸 그걸 나으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간구하는 것이다. 다시 공황이 찾아오고 때론 주체할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지만 나는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친구는 삐딱하니 그런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저 평생을 열심을 다하는 것이면 족하다고 여기는데, 자신의 열심이 오히려 자식들을 외면하고 아내를 배려하는 마음에는 인색하다는 걸 모른다.

 

정신 상태가 썩어빠졌다는 소릴 입에 달고 사는데, 모든 걸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서 오는 오만함이었다. 그래서 성실한 건 인정하지만 그런들 그 삶이 늘 피곤한 건 여전하였다. 늘 그렇지 뭐, 하는 그의 대답에 힘이 없었다. 다들 한심하다고, 늘 뭐에 화가 나 있는 사람 같다. 글쎄. 전에는 그런 모습이 좋게도 여겨졌는데, 뭐라 길게 말을 끌어가기가 여의치 않았다. 성경은 분명히 이르신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내가 뭐라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묵묵히 주만 바라볼밖에. 여기서 담대함이 요구되는 것이겠구나. 기다릴 수 없어서 내가 나서 아이에게 쟁쟁거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매사에 안달을 부리는 게 아니겠나.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하는 고백이 언제쯤 의연하게 나의 삶에 표정이 될까? 애끓는 속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나 그것으로 더욱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이었으면.

 

이는 결코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그러게. 이 말씀은 두려운 것 같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을 때 우쭐하는 거야 인지상정인데. 오히려 그것으로 하나님께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니. 그런 거 보면 내가 참 복이 많다. 때론 외롭고 그리하여 몸서리치게 쓸쓸하기도 하지만 누가 뭐라던 그것으로 주를 바라게 하신다.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나는 의연한 사람이 못 된다. 조금만 아파도 징징거리고 짜증을 낸다. 마음이 어려우면 조바심치며 안달이다. 그래서 난 나를 견디기 어려워서 묵상글을 쓰고 설교문을 쓰고 책을 읽다 병적으로 메모를 한다. 이는 나를 다잡으려는 것이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빈둥거리고 싶은 마음과 어디 낚시를 갔으면 하는 마음과 공연히 찌뿌둥한 몸뚱이를 달래지 못해 허둥대다 말씀 앞에 앉았다. 때론 닥치고 하는 거다. 말이 너무 많다. 뭐 그리 사연이 구구하다. 다 필요 없다. 내가 나를 아는데 나는 그리 온전한 사람이 못 된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길은 주만 붙드는 수밖에. 억지로라도. 어거지를 써서라도.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롬 13:5).” 이젠 내 안에 두신 양심이 그리 작동을 하는 것이다. 자주 오작동을 일으키는 건 너무 남의 일에 나서려고 할 때나 혹은 뒤로 물러서서 나만 돌려보려고 할 때다. 그럴 때면 하나님이 양심을 건드신다. 누구에게, 어떤 일에서 미안하도록 만드시거나 공연히 불편하게도 하셔서, 궁극은 주만 바라보게 하신다. 말씀을 붙드는 것이다.

 

하여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8).” 나는 못하고 내 안에 이루시는 주의 사랑으로나 할 수 있다. 가정예배를 드리다 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이가 싫다고 하지 않는데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고, 아이엄마는 이제 대놓고 무시다. 교육비는 아예 안 내는 걸로 하고 교재를 사는 일에도 나 몰라라 한다. 얄밉다. 경우가 없다. 쌍욕이 튀어나온다. 뭐 그런 여편네가 다 있나? 하심하다. 그러니 어쩐다. 주의 마음으로 대하게 해주세요. 주님의 사랑으로 감싸게 해주세요. 우리 마음으로나 우리 사랑으로는 할 수 없으니까, 늘 우리 기도다.

 

그런 거 같다. 친구를 대하면서 느꼈던 어떤 답답증이나 혹은 어떤 일에서 드는 마음의 어려움조차도 실은 그것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하신다. 애를 사랑해야 하지만 애를 보는 게 아니고, 교회를 이뤄가지만 교회를 내가 세워가야 하는 일도 아니고, 난 다만 ‘하나님과 나 사이다.’ 그 관계가 제일인 것이다. 간신히 월세를 내고 부모님 보험료를 부치고, 긴 한숨을 내쉬는 아내에게 그와 같은 고단함이 오히려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기를. 그렇다. 옳고 그름은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행하냐 행하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린 다만 행함으로 주를 바라자.

 

기도할 때면 그럴 수 있기를 주께 빈다. 왜냐하면 누구보다 그러지 못하는 위인이 나라는 걸 내 양심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놀라운 일은 하나님은 작정하시고 그 일을 추진하시는 데 있어 때론 나도 모르게 진행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일찍 알면 그것으로 호들갑을 떨며 마치 ‘놀라운 일’에만 정신이 팔려 말씀에는 등한시 할 게 빤하니까.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

 

후에 보면, 정말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그냥 버려지는 게 없구나! 하는 감탄이 또 감사가 배가 되는 것이다. 주님이 주도하심으로 나는 온전히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내 생활에 어려움도 두시고 고통도 두시고 다시 또 공황도 허락하시는 거였다. 그걸 어떻게든 나으려 하고 이기려고만 할 게 아니라, 주의 뜻을 가만히 구하는 일이 복되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시 27:5).” 이게 확실하니까.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9).” 나는 기도한다. 고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