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곧 그니라

전봉석 2017. 7. 31. 06:00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이사야 41: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29:11

 

 

 

마음을 졸였다. 시간이 다 됐는데 아이들이 오지 않았다. 의연할 수야 없겠으나 초조하여서 강퍅해지는 마음은 아닐 거였다. 괘씸하고 서럽고, 알 수 없는 서운함으로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 않나. 간격이 먼 주말 시간대의 지하철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걸 알면서도 매번 늦는다든지 또 다음 주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그때 가봐야 안다는 식의 태도에 대해 뭐라 나무랐다.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이다. 꾸짖고 야단친다고 될 일이 아니어서 주께 구하였다.

 

주께서 이루시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초등부 꼬마 아이들은 어째서 아예 못 온 것일까? 토요일 오후 그렇잖아도 길에서 만났을 때 확인을 하고 다짐하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내가 어찌 아이들을 나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번번이 기대했던 마음이 무너지는 덴 견딜 재간이 없었다. 연락도 없는 아이에 대해서는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하는데, 그렇지 뭐! 하고 내버려두자니 그럼 또 안 될 거 같고, 뭐라도 좀 하자니 것도 번번이 자존심 상하는 일인 거고.

 

그렇게 뚱해 있었다. 주일 오후는 허황하여 괜히 서러웠다. 늘 같은 마음이 되풀이 되어 지친다. 기껏 나온 아이들도 늘 아무런 변화도 재미도 어떤 소망도 없는 듯 미지근하여 대체 이럴 거면 뭐 하러 오나 싶을 정도이다. 공연히 외롭고 힘에 겨웠다. 그러고 있는 내게 오늘 이 아침의 말씀은 되묻는 듯하다.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4).”

 

문득 할 말이 없게 만드신다.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마치 저 아이들이 나를 보고 나 때문에 나오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래 여기까지, ‘누가 이루었느냐?’ 처음부터 ‘누가 불러내었느냐?’ 주님이 내게 다그쳐 물으시는 듯하다. 아무리 그래도 어차피 나올 거, 여기까지 온 거, 조금은 뭔가 좀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나는 내내 뚱하다. 그러자 말씀하신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14).”

 

나는 버러지 같았다. 나야말로 입이 열 개라도 저 아이들에게 할 말이 없는 사람 아니던가? 헐벗은 산 같았고 황망한 광야 같았으며 그저 죽은 듯 메마른 땅이었지 않았나? 그런 나에게 주가 이루고 계신 게 무언가?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 나무와 화석류와 들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무리가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으신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이것을 창조하신 바인 줄 알며 함께 헤아리며 깨달으리라(18-20).”

 

아!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다짐에 확신을 더하시는구나. 말씀으로 찾아와 위로하시고 붙드시는 데 놀란다. 늘 같은 마음이 되풀이 되고 고작 한두 명 아이를 두고 씨름하는 처지지만, 이에 시달리며 전전긍긍하는 꼴이 참 가관이다. 그러니 나만 그런가 싶어 서러움이 또 고달픔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런 유한한 내 몸에서 무한한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시는 것.’ 메모해둘 때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확실하다. 그래, 나는 고작 한 명으로 쩔쩔맨다. 말이 씨가 됐다. 어떤 목회자가 되겠느냐? 목사고시 때 면담을 하던 이가 물었다. 그때 하필 나의 대답이 그것이지 않았던가?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을 주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알기나 하고 한 소리였을까?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 말의 무게를 실감하겠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나는 이 말이 참으로 시적으로 들려 멋져 보였다. 한데 이 말이 무게가 십자가의 무게가 아니었나. 주님이 지신 게 천하보다 무거운 십자가가 아니시었나? 대체 난 뭘 안다고 그리 함부로 여겨왔던 것일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아닌 게 아니라 아무도 몰래 숨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꼴랑, 고작, 변변찮게 저 한 아이 때문에 내가 이처럼 짓눌리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나. 어찌 감히 한 영혼을 주의 마음으로 사랑하겠다고 허세를 부린 것일까.

 

예배 전에 나는 늘 나올 아이들 이름과 나와할 아이들 이름과 나왔으면 하는 아이들 이름을 적는다. 그래놓고는 한꺼번에 다 못나온 아이들로 분류돼 가위표를 칠 수도 없어 그저 가만히 나온 아이 이름 위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미안하고 죄송하고 송구하고 염치가 없어서 차라리 가까운 데 어디 더 좋은 교회라도 다니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여러 번 잠을 설치다 깼다. 흐드러지게 매미들이 울어 젖혔다. 귀가 따가울 정도다. 고작 칠일 동안 울다 짝짓기를 위해 칠년을 애벌레로 있었다니. 그러니 그 구애가 구성지고 애달플밖에.

 

주께 맡길 수 있는 게 특권이라는 말. 너무 염치가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말을 사랑한다. 아니면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말이다. 설교 중에 뭐라 꾸짖듯 나무라고는 행여 또 마음이 상했을까 안절부절 못하는 내가 애처롭다. 문득 주님의 구애가 어떠하셨던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러니까. 그렇지 않으시면 내가 어찌 이 길을 더 갈 수 있을까. 하는 일도 없으면서 참으로 민망한 마음뿐이지만, 그런데도 힘에 겨워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눈물이 핑, 돈다. 고작 내가 아이의 눈치를 보는 듯 그 마음을 위하던 게 주님의 마음이었겠구나. 나를 향하신 주의 사랑이었겠구나. 밤잠을 설쳐 일찍 깨우시더니 이처럼 나를 위로하신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마치 내가 뭐라도 위하는 듯 대단하여서 그 마음이 갸륵하게 여겨질까, 이런 마음을 드러내는 덴 사뭇 조심스럽다. 이게 그러니까 정말 내가 저 아이들의 영혼을 위한 건지 아니면 나의 처지가 또 운신이 한심하고 답답하여서인지, 나는 솔직히 후자이어서 면목이 없다. 시큰둥하니 있는 아이를 보면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다. 아무도 오지 않으면 서러움보다 홀가분함이 크다. 내 몸에 부대끼고 내 마음이 쓸려서 그저 나는 나만 위하는 위인이라서 말이다. 그래놓고는 마치 한 영혼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구니 역겹다.

 

정직하지 못한 내 영혼을 주 앞에 놓는다.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하는데 하물며 누가 누굴 위한다고 이리 호들갑인지. 아, 그러니 하나부터 열까지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나다. 은혜가 아니면 나보다 역겨운 존재가 또 있을까?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내 안에 두시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가 이루실 세계를 꿈꾼다.

 

“보라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사 21:24).” 나는 고백한다.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허무하며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29).” 그러므로 더더욱 주를 바람이다.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시 29:7).” 곧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8).” 나의 광야 같던 것을,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9).”

 

영광이라. 주께 영광이라. 이를 내 입으로 찬양하게 하시는 권능이라.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시 29:1).” 곧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2).” 나의 하루하루가 그러할 수 있도록, 그러하기까지 지금도 쉬지 않으시는 주님께 영광을.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