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이사야 42: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29:11
빗방울은 잦아졌다 굵어지기를 반복하였다. 집에서 나설 땐 그저 흐린 날씨였다. 이른 아침이라 도로는 한산하였다. 오전에 약간 흩뿌리다 마는 정도로 비가 올 것이란 예보는 있었다. 내친김에 멀리 대부도까지 나아갔다. 거짓말처럼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기 무섭게 비는 퍼붓기 시작했다. 막연하여서 난감하게 됐다. 돌아가기엔 출근 시간에 걸려 어려웠고 온 김에 낚싯대를 펴기에는 빗줄기가 굵었다. 백반을 시켜 아침으로 먹었다.
물안개가 피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모습에 숨이 찼다. 마침 4번 좌대에 예약손님이 비어 오후가 아닌 데도 내어줄 수 있다고 주인여자는 뜬금없이 말했다. 가늘어진 빗줄기가 귀띔을 주었다. 자리를 펴고 앉자 다시 비는 퍼부었다. 수면으로 으깨지는 물방울이 황홀했다. 주님이 나를 위로하시는구나. 마음이 좋았다. 고기를 잡기 위한 게 아니라 시름을 내려놓기 위한 시간이었다. 맨발로 앉아 비에 적셨다. 그러다 추우면 방에 들어가 전기온돌에 몸을 지졌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오후께 가방에서 챔버스의 <제자도>를 꺼내 읽었다. 특히 ‘기도’에 대한 부분에서 크게 위로를 얻었다. 이해하기는 우리가 중보기도를 할 때 응답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데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구속을 바탕으로 하는 기도에는 반드시 응답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그의 뜻대로다. 기도는 우리에게 더하신 특권이었다.
나는 누구를 생각하였고 무작위로 떠오르는 이를 위해 기도하였다. 무엇을 바라지 않고 어떤 응답을 전제로 하지 않고 다만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였다. 그러면서 챔버스가 말하는 몇 개의 전제를 염두에 두었다. 진실한가? 하나님을 확신하는가?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가? 그런 거 보면 나는 기도 응답을 내게 이루어주는 보상으로 삼아왔던 것 같다. 곧 내 뜻과 내 생각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 나의 어려움과 요구가 들어지면 응답이라 여겼던 것이다. 기도란 그게 아니었구나, 생각하였다. 나의 의무가 성령의 권리시구나.
그래서 꾸준히 또 끈질기게 포지하지 않고 하는 기도의 본이 예수님의 기도였다. 요한복음 17장이 그러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 그러므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6).” 내가 주의 것이라는 증거는 나도 기도한다는 데 있었다. 어떤 요구나 바람의 정도가 아니라 주의 뜻을 구하는 마음에서였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아! 퍼붓는 장대비가 지붕에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였다. 하염없이 비에 젖는 저수지를 내다보는 일은 얼떨결에 내게 허락하신 휴가였다. 하루 자고 다음 날 나가도 되는 것인데 나는 퇴근길 정체가 풀릴 때쯤 낚싯대를 거두었다. 고기를 잡으려는 게 아니었다. 미처 준비하고 온 게 아니어서 거기까지가 제격이었다.
그렇구나. 응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명령이시기 때문이구나.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기도가 호흡이라는 말이 어떤 건지 알겠다. 살았으니 호흡을 하는 게 아니라 호흡을 하니까 사는 것이다. 때론 궁싯거리듯 또는 늘 같은 말이 반복되는 것처럼 생각이 맴돌 듯이 하는, 이게 무슨 기도이겠나 했던 나의 아룀이 곧 내 영혼이 살아서 숨을 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8).” 이 모든 게 주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아!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사 42:5)” 향한 것이었다. 저가 이르시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6-7).”
기도를 내가 하는 줄 알았는데 기도는 주가 내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내가 살아서 호흡을 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도 호흡을 남겨두심으로 내가 사는 일이었다. 주의 의로 나를 부르셨다. 먼저 내 손을 잡아 보호하신다. 나로 하여금 빛이 되게 하시려고, 눈먼 자들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앉아 있는 자를 나오게 하시려고. 이를 나 같은 게 어떻게 합니까? 하고 되물을 일이 아니다. 오늘 본문은 이를 상기시키신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1).”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심이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2).” 주는 나를 주장하시되 강제가 아니다. 억압이 아니다. 저의 인자하심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3-4).”
주가 내 안에서 그리하심으로 내가 주 안에서 그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은밀하고 차분하게 나를 주도하신다. 그리하여 상한 나의 마음을 다잡으시듯 가장 적합한 상황과 처소를 공급하신다. 곧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이는 주의 능력이다. 내가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 아니었다. 내 안의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결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4).”
그리하여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정현종 시인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도는 섬으로 빗대어 표현한 게 생각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주 없이 떠도는 외로움에 대하여는 더 이상 뭐라 감상할 게 없다. 오늘 말씀은 그 ‘섬들이 주의 교훈을 앙망하리라.’ 그럴 것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1).” 내 안에 주의 말씀을 앙망함이 있었으니 주의 뜻이 이루어지심이겠다. 말씀이 참 귀하다. 늘 보면 묵상글의 유익은 말씀으로 나를 이끄신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2).” 나의 영혼이 일용할 양식이 된다. 권하여 글로 썼으면 하는 게, 어디서나 다시 열어볼 수 있어서다. 아침에 이처럼 생생하였던 말씀을 하루도 가기 전에 흩어지지 않게 하는 비결이었다. 좌대에 누워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앉아 착잡한 마음으로 쓴 묵상글을 다시 더듬을 때의 그 위로가 또 포근한 사랑이 여전하여서 감사한 것이다. 일용하다. 이를 먹고 새 힘을 얻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12).” 내 안의 막힌 담이 없기를.
행여 누구를 판단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게 하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3).”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날마다 생활이 될 수 있는 것은 호흡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없으면 나는 산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구원은 모두에게 같아도 그리스도의 인격은 그 누림에서 차등이 있을 수 있겠구나. 똑같이 구원을 받았음에도 누군 지지리 궁상으로 살다 그만큼 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고 누군 옥에 갇히고 매를 맞으면서도 누림에 겨워 찬송의 날이었구나. 새삼 알겠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한데 이 구원으로 만족하는 신앙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인격적이란 자라나는 것이었고, 자라남이란 누리는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누린 그 누림의 평안이 이에서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이르셨구나. 우리로 그렇게 되게 하시려고, 주께서 친히 보여주신 그 삶을 비가 퍼붓는 저수지 위에서 새삼 깨달을 줄이야!
그래서 성결이란 성별이 우선이었고 성별한다는 게 성결한 삶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주의 이름을 부르고, 그런 자리에서도 그와 같은 말씀을 묵상하며 ‘좋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그 느낌의 출처가 나는 마냥 신기하였다. 일을 해서 수고한 값으로 얻는 삯이 아니었다. 삶을 주께 맡긴다는 건 내게 선물로 두시는 이와 같은 성결의 거룩을 살아서 살면서 삶에서 사용할 줄 아는 능력에 있었다. 말씀이 말씀으로 좋을 수 있는 비결이고, 주의 이름이 그 어떤 위로보다 값진 것이었으며, 현실을 떠나 주를 찬송하고 평강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아!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그 힘이었구나. 나는 죽겠다 죽겠다하는데 자꾸 이처럼 또 말씀 앞에 앉게 하시는 힘,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어떻게 이 감격을 묘사할 수 있을까? “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10).”
아침마다 나는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리라. 그리하여서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시 29: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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