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시편 30:4
내가 누구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왜 나는 달라야 하는지. 오늘 말씀은 이를 분명히 하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나는 창조되었다. 나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신다. 두려워마라. 구속되었고, 지명되어 불렸고, 그리하여 나는 주의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찬송이다. 경탄하는 일이다. 와! 하고 놀라는, 삶 가운데 주가 어떻게 나를 주도하시는지를 자랑스러워하는 게 나에게 두신 사명이었다. 자주 힘에 겨워 뒤뚱거리기 일쑤지만,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아침부터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했다. 안정제를 먹고도 진정이 되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 전에 종합검진에선 모든 게 정상이었다. 엑스레이와 심전도 검사를 다시 하였는데 멀쩡하게 나왔다. 아무래도 심리적인 요인인 것 같습니다.
왜요? 나의 물음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습관처럼 왜? 라는 질문을 여러 번 던지다 그만두었다. 그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것처럼,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11).” 하나도 그럴 상황이 아닌데 왜 그러실까?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12).”
우선 정체성의 문제를 새로 하신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2:7).” 그리하여 선포하게 하심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나는 모두에게 복덩어리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곧 감추인 보배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내 안에 두신 이 진귀한 보화가 말이다.
리처드 론 노이하우스의 <진리를 따르는 삶이 존재하는가>를 읽었다. 뭐 이런 탐구적인 서술이 그렇지만 누가 이제 뭘 어떻게 생각한다더라, 하는 데는 관심이 없어서 그런가? 읽는 동안에 큰 긴장감이 없었다. 어떨 땐 최인훈이나 김수영, 김훈의 산문에서 더 깊은 통찰을 느끼고는 한다. 책상 위에 저들을 꽂아두고 틈틈이 읽는 까닭도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안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보는 눈과 내주하시는 성령의 눈으로 보는 때는 엄연히 다르다. 심리적인 요인인 것 같습니다, 하는 의사의 말에 나는 내 안에서 이 두 시선이 양립하는 걸 느꼈다.
왜? 하고 묻는 건 사람이다. 그런데? 하고 묻는 건 성령이시다. 왜, 할 때 그에 따른 요인과 현상으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를 안고 씨름해야 한다. 마음을 든든히 하고 잘 될 것이다 하는 공갈젖꼭지를 물고 인위적으로 여유를 찾는 것. 그런데 이를 ‘그런데?’로 바꿔 물으면 전도서의 말씀으로 통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고, 그렇다면 ‘그래서’만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그래서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그래서 나의 경거망동을 주의시키시려고.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43:12).”
분명한 건, 세상이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런 나를 세상이 어쩔 것인가. 이내 주가 이루신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사 43:16).” 이는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11).” 이를 더욱 확실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25).”
이쯤 되면 오히려 신나는 일이 아닌가? 힘들고 불안하고 어디가 고통스럽고 아프고 답답하지만, 그래서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할 수 있다면 그런데도 자꾸 왜? 하고 낫기만을 바라겠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이 땅에서의 괜찮은 정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8).”
예수님은 목적이 분명하셨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요 18:37).” 그런데도 세상은 왜? 하고 묻는 것이다. 답은 오직 성령이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진리는 하나다. 이 길은 우리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말씀을 묵상하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왜? 숨이 가쁘고 호흡이 어려운지, 안정제를 한 알 삼키고도 힘에 부쳐 어떤 불안이 또 공포스럽게도 나를 엄습한다. 그럼에도 가야 할 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물론 나는 두렵다. 괴롭고 고달프다. 어제는 몇 십 년 만에 이모들과 통화를 하게 됐다. 너스레를 떨며 무척 반가운 듯 또한 요즘 나의 상태를 염려하는 듯 한바탕 걱정이 이어졌다. 그래서 어쩌니? 하고 묻는 말에 그래서 주만 바라게 하시려는가보다, 하고 말해주었다. 꼼짝 마라, 하는 게 결코 불행이 아니라는 걸 담아서 말이다. 난 여태 교회 안 다니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다닌다, 히히. 저의 말에 부끄러움이 배어있었다.
나름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특징은 ‘다른 사람에 비해’ 살아온 날을 자랑삼아한다. 좀 더 선하다는 것으로, 그만하면 괜찮았지 뭐, 하는 식의 자화자찬으로는 굳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그러니 이런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 있나. 다는 싫고 조금만 내가 필요로 하는 정도의 선은 없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나에게 두신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 호흡곤란까지도 나는 이처럼 찬송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사 43:8).” 이것이 나의 일이겠다. 내가 보는 것을 저들에게 들려주고 내가 듣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하시려고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10).”
곧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21).” 오늘을 사는 이유였고 목적이었다. 그 길을 가야 한다. 주님이 길이시다. 생명이시다. 그래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25).” 용서는 자유로 나아가게 하신다. 그리하여 “너는 나에게 기억이 나게 하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는 말하여 네가 의로움을 나타내라(26).”
오늘 하루, 나의 찬송이 되게 하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시 30:1).” 내 몸의 고통도, 나를 두고 그래서 어쩌니? 하고 염려하는 저들에게도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6).” 주가 나의 기도가 되심이다. 놀라운 자유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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