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공은 철로 연장을 만들고 숯불로 일하며 망치를 가지고 그것을 만들며 그의 힘센 팔로 그 일을 하나 배가 고프면 기운이 없고 물을 마시지 아니하면 피로하니라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집에 두게 하며 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이사야 44:12-15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시편 31:6
우리의 어리석음이란 게 믿음을 빙자하여 얼마나 얄팍한지, 오늘 본문은 이를 잘 반영해주고 있는 것 같다. 철공은 숯불에 철을 녹여 ‘그것을’ 만들고, 목공은 줄을 늘여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그것을’ 만든다. 가장 좋은 재료를 가져다 땔감으로도 삼고 그 위에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다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고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엎드린다. 이에 다윗의 기도가 직접적으로 들린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시 31:6).”
참 그러기가 쉽다. 나쁜 믿음은 다른 대안이 없어서다. 괜히 두렵기도 하고, 살면서 종교 하나쯤 있으면 좋은데 개중에 하나님을 믿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안 그럼 다른 뾰족한 게 없으니까. 다른 게 마뜩찮아서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 혹은 실용적으로 경험에 비춰볼 때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또는 주관적으로 다만 내 의지에 따라 나의 선택을 신뢰하니까. 오늘 이사야의 증언은 이와 같은 우리의 단면을 고스란히 비춰주고 있다.
믿음이 아닌 걸 믿음이라고 믿고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혹시 내 안에 그와 같은 경향은 없는지. 지옥은 무서우니까 천국엘 가야겠고, 다른 신들은 어이가 없으니까 그럴 바엔 하나님이 나은 것 같고, 보면 또 그럴듯하게 인류 역사 가운데서 ‘기독교 국가’가 누린 번영이나 그 사람들의 일면이 훨씬 설득력이 있으니까. 안 믿는 것보단 믿는 게 혹시 몰라서 나는 믿는 사람이로다, 하고 삼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안에 끼어드는 생각이 많다. 판단이 때론 두렵다.
그런 내게 오늘 시편은 이른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24).” 강하고 담대함이란 주를 바라는 데 있어 어른거리고 기웃거리게 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저 막연하게 나의 믿음을 믿는 것으로 여겨 내가 그것을 고기를 구워 먹으며 배를 채우다가 또 그것을 잘 벼려 그 앞에 절하고 빌고 엎드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왜 강하고 담대해야 하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바울의 확고함이 그에 대한 게 아닐까?
믿음의 변질은 믿음이 없는 이만 못하다. 자신이 규정하고 단정 짓는 데 있어 상대주의, 실용주의, 주관주의적인 믿음이 얼마나 우리를 주도하려 하는지. 다른 종교와 비교하고 하나님을 여느 신들처럼 두어 겨루고, 그런 것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더 나은가? 하며 자위하는 따위로의 믿음 말이다. 안 믿는 것보다 믿음 하나쯤 갖는 게 좋고, 그럴 바엔 개중에 나은 것 같은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식의 신앙을 마치 대단한 것인 양 붙들고 사는 위인들. 교회를 안 다니자니 찜찜하고 다니자니 성가시고, 그래서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따위의.
이 모두는 우상이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사 44:9).” 마침 오스기니스의 <진리의 시간>을 읽었다. 오늘 말씀에 앞서 하나님은 내게 읽기를 통해 생각하기를, 생각하기를 통해 자칫 나의 엉뚱한 이해와 설명을 바로 잡으시었다. 종종 나는 아이들에게 설명하기를 그러하지 않았던가? 안 믿는 것보다 믿는 게 낫잖아. 믿으려면 미개한 것보다 선진화된 게 낫고,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는 하나님이잖아.
이처럼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냐(10).” 내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설명을 위한 것이었다 해도 나는 마치 믿음을 설명을 통해 설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왔던 건 아닐까? 그리하여 너무 안이하게 그럴 수 있지, 좋은 게 좋은 것으로 삼아 아이의 마음을 얻으려고 말이다. 아!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18).”
주가 뜨게 하지 않으시면 그 눈을 뜰 수 없을 것을. 귀를 열어주지 않으시면 들리지도 않는 것을. 마치 내가 어떻게 잘 하면 믿음을 더할 수 있을 것처럼 굴지는 않았던가. 예면 예, 아니면 아니라 했어야 하는 걸 좀 더 강조하기 위해 혹은 돋보이게 하려고 내가 과장하고 비유하여 우스갯소리로 만들고는 하지 않았던가! 진리가 어떻다는 것에 대해 백날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다들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 다문화를 선호하고 모두를 포용하는 것을 마치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인 것처럼 군다.
오스기니스의 설명처럼 진리가 없다면 속임수와 조작만 있다. 진리가 없다면 자유도 없다. 내가 이것만 없으면 자유로울 것 같은데 하는 정도가 자유는 아니지 않나. ‘자유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뿐아니라 무엇에 대한 자유도 포함한다.’ 즉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다. 그래서 챔버스는 ‘낮아질 수 있는 특권’을 강조하고 성도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로, 자기 십자가란 사는 데 따른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짊어지는 어려움이라고 했던 것이구나.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박해와 고난을 일컫는 것이었다. 교회만 아니었으면,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게 아니라면 굳이 참고 견뎌야 할 일이 아닌 것에 대하여,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것이 내게 맡기신 ‘자기 십자가’였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그래서 성도의 영광이 다르고 제자의 영광이 다른 것이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이는 부당한 논리가 아니다. 모두에게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다. 다만 이를 누리는 데 있어 누군 이만큼 누군 저만큼 그 차등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다. 성화를 이루어간다는 게 그런 게 아닐까? 나쁜 믿음 혹은 어린 믿음이라 할 수 있는 게 가짜 믿음과 다를 바 없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의 그것이면 어쩌겠나. 고작 저의 믿음은 그 정도인 것을.
항구에 도착하는 내내 누군 배 멀미를 하고 누군 선상에서 기쁨을 누리듯이.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줄에 묶인 호랑이를 풀어줄 수는 있지만 호랑이의 줄무늬를 지워줄 수는 없다는 말, 그런 것이다. 지성이 판치는 세상에서 성령은 위축되거나 소멸되어 사람들의 관심 밖이 되었다. 하긴 ‘AI끼리의 대화’가 이루어졌다며 호들갑을 떨고 우려를 금치 못한 하루였으니까. 만들어놓고도 자기들이 무슨 괴물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사 44:8).”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 것이지 내가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22).” 뭔가 주객이 전도된 세상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시쳇말로 훅, 간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시 31:1).” 주를 바란다는 것은 강하고 담대해야 하는 일이다. 유야무야하듯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사람들처럼 행동해서는 어림없다. 얼마나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세상인가. 자칫 가톨릭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십상이다. 포용과 관용을 강조하며 모든 걸 수용하는 자세로 다문화적이며 성적소수자는 물론 짐승들에게까지 사람과 똑같은 대우를 운운하며 주의 사랑을 논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4).”
너무 촘촘하여서 어찌 빠져나갈 수가 없다. 성령이 아니시면 내가 어찌 하오리까.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5).” 그리하여 주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를.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마 12:18).” 무덥고 힘든 하루였다. 아이들이 모두 휴가를 가서 두 아이만 왔다. 쭈쭈바를 주며 어르고 달래 시를 쓰게 하고 책을 읽혔다. 때론 견뎌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러므로 나의 아는 것은 하나님이라. ‘진리란 하나님을 아는 것.’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 이는 곧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길이 없다. 이를 내게 알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 56:13).” 그러므로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31:15).” 곧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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