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추어진 곳과 캄캄한 땅에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혼돈 중에서 찾으라고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한 것을 알리느니라
이사야 45:19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시편 32:8
무덥고 건조한 날씨였다. 아이들이 대부분 휴가를 떠나 아내는 수업을 일찍 마쳤다. 모처럼 극장에 가서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건드릴 때마다 아픈 상처가 있다. 보는 동안 몇 번이나 가슴이 먹먹하였는지 모른다. ‘박하사탕’을 비롯해, 진압 군인의 시각으로 그린 소설을 몇 편 읽은 기억이 난다. 모두는 피해자인 셈이다. 기록은 이를 기억하기 위함이고, 부끄러움은 우리를 돌이켜 우리가 사람인 것을 확인시킨다. 주의 형상으로 빚으신 본래의 최소한 그, 사람 말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인데 “나는 감추어진 곳과 캄캄한 땅에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곧 숨김이 없으시다. 드러내어 우리도 ‘산 위의 동네’로 살기를, 등경 위에 놓인 등불로 살기를 바라시는 이시다. 곧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혼돈 중에서 찾으라고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혼돈은 창조질서에서 바로잡힌 일이다. 한데 그, 땅의 속성이 우리들로 하여금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이 가운데로 이끈다. 덮고 숨고 감추기를, 죄는 이끈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한 것을 알리느니라(사 45:19).”
그런 거보면 얼마나 평안한 시절을 살고 있는지. 감사가 겨워 그 모양이다. 여전하여서 자신들 역시도 피해자였다고 진술하는 저들의 회고록은 염치가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를 때 자신의 염치없는 혼돈도 두려울 게 없는 모양이다. 이에 우리에게 더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극명하시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 그런 가르침과 훈계가 삶 가운데 없다면 이는 사생자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이와 같은 영화 한 편이 또는 글 한 줄이 하나님을 바라고 구할 수 있게 한다면 이는 복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 곧 나의 관점을 바꾸게 하는 게 기도였다. 나의 요구나 또는 바람을 주께 구하다가 비로소 주가 내게 구하시는 것을 마주하는 일.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곧 구하는 그 방향이 온전하여지게 하신다. 단순한 요구에서 명료한 주의 뜻을 향하여. 그래서 구원에는 차등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인격에는 차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겠구나. 바로 우리의 구함이 우리를 들들 볶는 일일 것인데, 토라진 아이처럼 얼마나 자주 유치하고 어리석곤 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나의 속절없는 서러움도 자랑도 주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특권. 아이에게는 엄마의 품에서 당당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복받쳐 서러운 마음으로 꺼이꺼이 울어 젖힐 수도 있는, 나의 하나님이시지 않은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잔혹하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 맞다. 진리가 없다면 폭력만이 난무하다. <파리대왕>에서 아이들이 보여주는 우리 본성의 악질적인 괴물도 그것이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예수 안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감사인가. 전에 같으면 어떤 분노가 또는 부끄러움이 주를 이뤘을 감정이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더하게 하는 데 놀랐다. 기도가 되는 것에 대하여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 주의 자랑인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이런 게 아닐까?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열매로써 오늘 내 안에 열리는 생각이 마음이 또 행함이 어떠한가를 보면 말이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아직 덜 익어 떫을 수도 있고 신맛이 강할 수는 있어도 차츰 과즙이 고이고 주의 단맛이 도는 덴 나 역시 신비로울 따름이다. 곧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안타까움으로 저 시절을 겪었을 고통의 당사자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 죄를 알지 못하는, 아무도 없는 가해자를 위해 빌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세월호도 그렇고, 나 같으면 못 살 거 같아. 아내는 치를 떨며 안타까워했다. 그러게. 내가 여전히 내 것일 때 나는 나의 주인이 되려 한다. 그러나 주님이 주인이 되실 때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람을, 사건을, 아이들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날마다 가정예배들 드리며 우리가 우리에게 맡기신 아이들을 대하는 데 있어 주께 아뢰고 구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중학교 아이들을 오전 10시에 수업을 오게 하였더니 한 아이는 아예 포기다. 늘 사연이 많고 핑계가 많은 아이는 여전하여서 뭐라 한들 소용이 없고, 다섯 아이 가운데 그래도 반듯하니 잘 따르는 아이는 하나였다.
정말이지 우리는 기도하기를 주의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의 사랑이 아니고는 어림도 없다. 내 안에 이는 생각은 비난하고 참견하고 공연히 꾸짖는 데 주력한다. 그러면 문득 떠오르게 하시는 생각이 나 또한 다를 게 없었다. 늘 변명을 달고 살았고 저들보다 열 배 백 배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예의가 없었다. 악랄하고 지독하게 구는 건 그리 내버려두는 심사 때문이다. 그럴 수 있지 뭐, 하고 자신에게 관대하면 모두는 괴물이 된다. 설마, 하고 아이들을 돌아보다 그게 나였다는 데 놀란다.
주의 이름으로 또한 주님의 마음으로 대하지 않으면 어느새 나는 괴물이 되어 저들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누가 누굴 나무란단 말인가. 뭘 보고 어디서 치를 떤단 말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내 안의 괴물을 마주하곤 하는 것이다. 공연한 짜증이 또 누구에 대한 비판과 평가질이! 그래서 나는 죽어야 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내가 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뚜렷해진다.
같이 분노하다 그게 또한 나였다는 데서 놀랐다. 더하면 더했지 다르지 않다는 데서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말씀 앞에 나를 세운다. 전혀 그러하지 못한 나를 주께 아뢴다. 주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어림없음을.
오늘 이사야는 내게 경고한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사 45:9).” 에이 설마, 하지만 늘 자주 그러하였음을 고백한다. 또한 “아버지에게는 무엇을 낳았소 하고 묻고 어머니에게는 무엇을 낳으려고 해산의 수고를 하였소 하고 묻는 자는 화 있을진저(10).” 그게 나였지 않나.
고로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21).” 이를 내게 알게 하신 이가 영화 한 편을 통해서도 내가 주 앞에 바르고 온전하기를 위하여 구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내가 복이 많다.
그것으로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 이처럼 주 앞에 내 입을 열어 고백하고 아뢸 수 있게 하시는 데 따른 은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3).” 그렇지 않으면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4).” 가만히 주를 바라고 주의 뜻에 주목하여 살고자 하는 자리에 두심이 영광이었다. 그리하여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7).”
곧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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