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많은 계략으로 말미암아 피곤하게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초하룻날에 예고하는 자들에게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하게 하여 보라
이사야 47:13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악은 선의 배면에 숨었다가 어떤 위기 때에 우리를 압도한다. <군함도>를 보면서 생각하였다. 사람의 악함이 끔찍했다. 전쟁은 적나라하게 모든 악을 드러냈다. 선과 악의 구분이 어려웠다. 어제도 여느 날과 같이 글방으로 갔다가, 우연히 자살한 여배우의 딸애가 쓴 장문의 사연을 읽었다. 중2 아이의 것만으로 짐작하기에는 울분이 과장된 듯도 하였다. 한데 사실여부를 떠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환멸이 느껴졌다. 군의 공관병을 상대로 한 파렴치한 ‘갑질 사건’도 그러했다.
무엇이 더 선하고 누가 덜 악한지의 문제는 아닐 거였다. 기구한 우리나라의 역사와 한 가정의 끔찍한 비극의 사연이 중첩되면서 마음이 어려운 하루였다.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할 때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악함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오늘 이사야는 바벨론을 들어 우리의 그릇된 자기합리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사 47:10).”
성경책을 무릎에 놓고 나란히 앉은 두 부부의 ‘특별석’이 민망하였다. 저들이 교회를 다니는 모습과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파렴치함이 맞물려 보도 자료로 그와 같은 사진이 게재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이르는 것이다. 내 지혜와 내 지식이 옳다. 내 은혜와 내 평안이 복이다.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는 것이다. 사람 이하로 공관병을 다룬 여러 정황들이 보도되면서도 군 장성 내외의 구구한 변명은 오히려 더욱 역겹다.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11).” 이 땅에서의 삶으로 판명 날 문제는 아닐 거였다. 주일 날 아침 교회를 가기에 앞서 무슨 화장품이 눈에 띄지 않아서 늙은 조모는 그처럼 어린 외손녀를 구박했던 것일까? “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주문과 많은 주술을 가지고 맞서 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놀라게 할 수 있을는지(12).”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게 악이다.
열심도 선행도 나름의 가치와 모든 기준은 주문이고 주술이 될 뿐이다. 영적인 안이함이었다. 누가 그 속을 알까.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할 때 자신에게는 정당성이 부여된다. 그래도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에 누가 뭐라 한들,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일곱 사람보다 자신이 옳다고 한다. 굽힐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종교적인 신념이 그래서 더 무섭다.
한데 자신이 욕을 먹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교회가 욕을 먹는다. 자신이 옳았다고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그른 게 된다.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동안 교회와 하나님이 대신 욕을 당하신다. 저가 억울한 이유는 스스로 부여한 자신의 정당성 때문이다. 이를 종교적 신념과 결부시켜 자신은 주 앞에서 부끄러운 게 없다고 떳떳함을 주장하게 되는데, 그럼 그럴수록 세상은 저를 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욕한다. 교회가 난처하게 되는 일이다.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종교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게 없다고 하는 자들의 몰염치에 치가 떨린다. 그처럼 하나님을 위한다면 자신이 좀 뒤집어쓰면 될 일이다. 물러나면 될 것을 그리 못하겠으니까 교회를, 하나님을 들먹거리면서 덩달아 욕을 먹이는 것이다. 나의 눈에만 자꾸 그렇게 보이는가. 사회적으로 저명한 이가 부정한 일에 휘말렸을 때 보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있어 머리맡에 성경책을 두고 단식을 한다거나, 누군 예배에 참석하여 거룩한 모습을 자처한다거나, 심지어는 그 입으로 하나님을 들먹이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곤 하였다.
일명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뻔뻔스러움에 대하여 나는 민망하였다. 송구하고 염치가 없었다. 아이의 글을 읽으며 마지막 부분에서 할머니가 주일 예배에 가려고 준비하다 자신을 도둑년으로 몰고 분을 내었다는 장면에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느 목사가 교회 공금을 횡령하고 사회 법정에 세워져 진위여부를 가릴 때,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게 없다는 항변에 화들짝 마음이 민망하였다. 의도적인 연출도 있겠으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그와 같은 과장된 모습에서도 가슴이 답답하여진다.
“네가 많은 계략으로 말미암아 피곤하게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초하룻날에 예고하는 자들에게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하게 하여 보라(사 47:13).” 스스로 구하려는 모든 건 하나님을 빙자해서 사악하다. 이를 역설적으로 함구하게 만드는 성경이 오늘 시편의 말씀이다. 다윗은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며 온갖 수모와 조롱을 당한 뒤였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하나님만 바라고 그의 위로만을 구하는 자의 넉넉함이 느껴진다. 저는 말하기를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19).” 스스로 이를 증명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고난을 이겨내란 소리도 아니다. 고난을 없이 할 수는 없다. 이에서 건지실 이는 하나님이다. 곧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8-9).”
딸, 아들, 사위 모두를 앞세운 노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수고와 모진 애씀에 대하여는 짐작도 할 수 없다. 중2 외손녀 아이의 말만으로 누구를 판단하고 싶지 않다. 다들 저마다 그럴 수 있다. 이해가 되고 안 됐다. 아내가 주로 쓰는 태도다. 같이 군함도를 보고 나오면서도 ‘그럴 수 있었겠다’는 데 이해의 초점을 맞추었다. 악의 무게는 자기이해 바로 그 한 장 차이의 무게다. 이해 못할 악은 없다. 오죽했으니 자살했을까, 싶은. 얼마나 어떠했으면 그러했을까, 하는. 성경은 그럴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그래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일은 “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사 47:2-3).” 스스로 하려는 모든 의로움도 악할 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의 구원자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4).” 그렇지 않은 모든 선함도 의로움도 정직함도 속살을 드러내며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일일 뿐이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는 말, 그래서 다윗은 결코 그래도 된다는 게 아니라는 데 주목한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34:1).” 여기서 도드라지는 표현은 ‘항상’이다. 연거푸 반복하는 그 심정을 알겠다. 어떠하든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2).”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는 말은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말과 다를 게 없다. ‘그럴 수 있어?’와 ‘그럴 수 있지!’는 모두 선하지 못하다. 함부로 고개를 끄덕거리지 말자.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13).”
처참하게 악을 행하는 것이나 도도하게 선을 구하는 일이나 매일반이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15).” 의란 주를 바람에다. 모든 억울함과 분함도 주께만 내어놓을 특권이 우리에겐 있다. 안 됐고, 가슴이 아팠다. 오전에 읽은 중2 아이의 구구한 장문의 사연과 그 안에 묘사된 늙은 노모의 그럴 수 없음에 대하여도 말이다. 오후께 본 <군함도>의 여러 군상들 가운데서도 모든 선과 악의 구분이 ‘그럴 수밖에 없었을’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처절한 사람의 사람 됨에 치를 떨었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17).” 오직 주께만 부르짖을 수 있는, 그러할 때 우리 앞에 놓이는 온갖 ‘어떻게 그럴 수 있어?’와 ‘그럴 수 있지’의 간격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기에 마음을 다스려야 하고,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잠 23:7).”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신념의 완고함으로 왜곡된다. 성령을 오해하고 자기만의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나름 본다고 여기면서 서로를 인도하려 들 때 화로다. 자칫 나의 이해와 판단이 그러하지 않은지. 내 안에 얽히고설킨 악함을 두고 주께 엎드린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3).” 내 안에 주의 영을 모심이여.
일련의 자잘한 나의 생각과 생각을 주 앞에 내어놓으며, 행여 나의 이해와 상식이 주를 안다고 앞서지 않게 하시기를. 알리시리라. 오직 주만이 내 안에 거하시기를. 그러했을 때 다윗의 감사가 이해가 된다. 어떻게 그런 수모 가운데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시 34:2).” 저의 안에는 주의 영으로만 가득하였던 것이다. 자존심도 체신도 그 어떤 명분도 다 필요없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6).”
주일 날 아침. 나와야 할 아이들을 생각하고, 함께 예배드리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가만히 주를 바란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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