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46:10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시편 33:18-19
연일 무더위가 맹위를 떨고 있다. 사장이 공업용 선풍기를 주어 실하지 못한 에어컨을 대신하는데 소음이 너무 크다. 바람도 세지만 뜨겁게 달궈진 공기는 오히려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누가 언제 올까봐 함부로 편하게도 있지 못한다. 작년에처럼 도서관으로 피신을 갈까, 생각만으로 간절하였다. 새벽부터 서둘러 설교원고를 작성하였다. 늘 하는 소리지만,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둔다. 하기 싫은데 하다보면 그 세계가 깊고 무궁하여서 놀랍다. 앞 도로를 새로 포장하느라 타르 냄새가 하루 종일 진동을 하였다.
오후께 아이들이 와서 이달 보름께 보낼 ‘이웃, 배려’라는 주제로 글을 쓰게 하였다. 대한기독문인협회가 주최하는 것이라, 짐작이 가는 각 단락의 소재를 일러주고 다독이며 부추겨 간신히 1500자를 쓰게 하였다. 다 쓴 내용을 첨삭할 기력이 없어 다음 주로 미루고 얼른 수업을 마쳤다. 옆 사무실에 새로 같이 하는 탈북여성센터 대표가 퇴근하다, 뜬금없이 교회였냐고 물었다. 아이 셋과 어디 교회를 다니는데 너무 정신이 없다며(?) 오겠다는 소린지, 그냥 인사말인지 알 수 없는 여운을 남기고 퇴근을 했다.
글을 쓴다는 일은 이처럼 사는 데 따른 감상 정도를 적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특히 매일 얼마쯤의 하루 일과를 돌아보며 이처럼 묵상글을 써오다 보니, 종종 현미경 위에 올려놓는 것 같다. 때론 초강력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일이다. 내가 아이에게 했던 말, 혼자 있으면서 생각했던 일, 무심히 마주했던 사람들, 그리고 읽었던 책에 대하여. 글을 쓴다는 일은 산다는 일이다. 교회로 또 교회의 목사로 혹은 아이에게 선생으로, 산다는 일은 글을 쓰는 것처럼 세심하고 진중할 필요가 있다.
멋대로 굴자면 굳이 글로 남길 게 있나. ‘나는 누구다’ 하는 정의가 성립되지 않으면, 마주하는 사람과 일과 일상이 뭐 그리 대수이겠나. 더워 죽겠는데, 하기 싫은데, 꾸역꾸역 앉아 설교 원고를 작성하다가 생각하였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결국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로 이어지면서, 오늘 아침 본문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상기시킨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나는 누구인가? 이와 같은 말씀이 귀에 들어오는, 주목하여 묵상하게 되는 이이다. 주가 주의 모든 기뻐하는 일을 이루신다는 말에, 옆 사무실 그이가 아이들과 예배에 올 것처럼 굴던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하고. 글쓰기를 싫어하는 아이에게 단지 글을 쓰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웃으로 서로가 살며 왜 너와 나 사이에는 배려가 필요한지를 알려주는 일이 나의 기쁨이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신다는 말, 그 뜻을 헤아려 ‘그럼 이런 내용을 쓰면 돼요?’ 하고 묻는 4학년 아이의 응용과 적용이 나를 흡족하게 하였던 것을 생각하였다.
곧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시 33:18-19).” 오늘 아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주를 경외하는 자가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일로 그리하여 주로 하여금 나를 보살피시게 하는 것. ‘이런 일도 괜찮아요?’ 하고 덩달아 묻는 아이의 경험을 응원하고, 그래서 왜 우리가 사는 일에서 ‘배려’가 필요한지를 덧붙여 설명해줄 때의 만족함을 떠올렸다.
내가 복음을 증거 한다는 건 막연하게 좋은 말을 알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챔버스의 해석대로라면 내 삶이 성찬이 되는 일이겠다. 저들에게 찢어주는 빵이 돼야 하고,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어야 한다. 이는 주님의 살과 피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 12:32).”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33).” 우리의 삶도 날마다 죽어지는 것이었다. 단지 경험을 간증으로 버무려 먹기 좋은 한 입 음식으로 누구 입에 넣어주는 정도로는 안 된다.
이를 먹고 마실 때마다 기념하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 그런 삶으로 살아서 증거가 되는 게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오스왈드 챔버스는 <제자도>에서 말했다. 가슴팍에 땀이 줄줄 흐르는데 뜨거운 보조기를 찬 채, 요란한 선풍기 소리에 귀가 다 멍멍한데도 집중하며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일, 누구 생각을 하며 주께 아뢰고, ‘그럼 주일예배는 몇 시예요?’ 하고 묻던 저이의 말에 설렘과 두려움이 섞이는 일. 오직 내 일은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나타나게 하는, ‘하현’을 그리 두는 일.
가끔은 이게 어디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인가? 생각할 때면 신비롭다. 내가 그러고 있다는 게 말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뭘 어떻게 쓸지 구상하고 계획한 것과 별개로 임의로 인도하시는 데 있어, 저 아이가 이러저러하겠구나? 짐작했던 것과 상관없이 주가 인도하실 때, 묵상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느낌과 깨달음으로 이끄실 때…. 내가 어디 그럴 줄 알았나!
나는 다만 주 앞에 서자. 주 안에서 약한 자로 살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를 아는 까닭에 기꺼이 나는 주 앞에서 미련하고 바보여도 되는 것이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19-20).” 누가 감히 주 앞에서 우쭐할까?
곧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21).” 그래서 나를 여기에, 저이 앞에, 이 아이에게 두셨구나. 왜냐하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3-24).” 저들이 뭐라 하던지 내겐 이제 그보다 더 큰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곧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 두 말할 것 없다. 말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크게 공감할 수 있게 하시는 게 은혜라. 이를 삶 가운데 나타내어 게으르지 않기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그렇지. 그게 나의 하루 일과였고 내게 두시는 사명이었다. 이는 결코 육신을 따라서는 알 수 없는, 신비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문득 드는 생각이 그게 내 일이었구나, 하는 거였다. 손에 들고 읽는 책이, 누구를 생각하며 씨름하는 고민이, 어떤 일에 매진하는 일이, 아이들 대하는 일에서 글짓기를 가르치는 일에서도, 이처럼 말씀으로 가져와 삶에 버무려서 떡을 만드는 일. 포도 알갱이를 으깨고 터트려 즙을 내어 마시게 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이란 그 삶이 성찬이 되는 일이라는 데 크게 공감한다. 단지 날 위해 살지 않는 것. 내 기분, 내 생각이 우선이 아닌 사람들로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마음에 두라(사 46:8).” 이사야는 강한 어조로 나를 불러 세우는 듯하다.
곧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4).” 주의 말씀이시다. 이런 말씀 앞에 갑자기 으쓱, 힘이 생기는 건 나만 그럴까?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9).” 내 삶에서 주님이 곤죽이 되어 으깨져 빵이 되셨고, 갈아져 즙이 되어 포도주로 마시게 하신 걸 나는 이제 확신한다. 주의 살과 피가 아니었다면 오늘에 내가 있기나 했을까?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 나 또한 나의 남은 여정이 그러할 수 있기를. 누군가에게 떡으로 떼어지고 포도주로 부어져서 저의 생에 성찬이 되고, 이로써 주의 사랑을 알게 하는 일. 그런 나를 주님은 의인이라 부르신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시 33:10).”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하시는지. 그런 생각이 그런 와중에 어떻게 나를 흡족하게 할 수 있는지. 임으로 부는 바람처럼 나의 마음은 저 혼자 주를 바라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게 설교였구나. 하나님이 계실 자리에 서는 게 삶이었고, 그 웃음, 그 목소리, 그 걸음걸이까지 주의 것이어야 했구나. 아!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그 막중한 사명을 내게 두신 거였어…. 그 냄새부터가 다른 거였지. 그건 내가 인위적으로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삶에서 곧 주가 읽혀지는,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3:3).” 어쩐지. 그리 냄새가 나고 그리 읽혀져야 하는 일. 몹시 무더웠던 날, 불편에 겨워 툴툴거리면서도 설교 원고를 마저 작성하고, 단내를 풍기면서도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다독여 주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일. 부디 하나님이 나타나는 사람으로, 교회로 그 몫을 다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시 33: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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