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8:11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35:28
일주일 동안 찬밥에 닭볶음탕만 먹게 생겼다. 옆 사무실 가족들도 올 줄 알고 어림잡아 십인 분을 준비하였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무도 오지 못했고 그래서 마음은 어려워야 할 거였는데, ‘한 무드장이의 신앙’을 떠올리며 위로를 삼았다. 저는 가난한 구두수선공으로 자녀를 열두 명이나 둔 어려운 가장이었다. 하루는 십년간 수도원에서 경건에 이른 수도사가 샌들을 수선하러 왔다. 샌들 수선을 기다리는 동안 저의 사정을 듣고 염려를 하자 무드장이는 말했다. 그걸 어찌 댁이 걱정하십니까? 주신 이가 따로 계신데?
언제 어디서 읽었는지 들었는지 기억도 가물거리지만, 아무도 예배에 나오지 않은 날 나는 설교에 앞서 그와 같이 마음이 평안하였다. 교회를 세우신 이가 따로 계신데! 우리는 준비해갔던 점심을 싸들고 집으로 와서 먹었다. 너무 더운 날씨였다. 어쩌다 딸애가 사귀는 아이 이야기를 하게 됐고, 오후 내내 설왕설래 말이 이어졌다. 그러는 중에 약사애가 문자를 해서 뜬금없이 ‘어제’ 날 위해 모처럼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다고 했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를 한다! 주가 나를 여기에 두셨다. 나는 위로가 필요했던가보다.
이래도 되나? 싶게 별로 마음이 꽤 어렵지는 않았다. 주께 맡긴다는 건 이처럼 좀 뻔뻔스러운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하나님이 거두시겠지. 결코 나의 안이함과 게으름을 없애주시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내 할 도리를 다하는 게 명철함일 거였다. 가령 설교 원고가 아까워서(이런 표현이 맞는가 모르겠지만) 다음에 그냥 또 써야지 하는데 아무래도 그런 게 마음에 걸리는 일이다. 아이 생각이 날 때 어떤 서운함과 불편함이 먼저 앞서려 해도 묵묵히 주의 마음을 바라는 일처럼. 여기 이러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때 무던히.
시달림도 구력이 는다. 오늘 말씀은 그런 내게 큰 이정표 같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1).” 주가 나를 돌이켜 여기에 두셨다면, 글방이 교회가 주의 것인데 그럼 뭘 더 내가 안달을 부린들. 마음이 볶였다 졸였다 우울하다 서러워도 했지만 다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단순하고 지혜로운 길은,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35:28).” 더 좋은 수를 모르겠다.
약사애는 뜬금없이 글을 쓰라고 보챘다. 아내가 어디에 내보라고 하는 성화와 같은 것이겠다. 다른 말로 하면 밥벌이가 되는 글을 좀 쓰라는 소린데, 나는 이제 감이 잡히지 않는다. 종교적인 거 말고, 하는 아이의 단서에 풋,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러고 있지 말고 뭐라도 다른 걸 하라는 소리다. 뭔가 좀 발전적인 일. 글방에서 탈출할 수 있는. 아이의 이어지는 너스레에 일일이 대꾸할 건 없었다. 시름도 이골이 나면 익숙해지는 법이다. 이 길이 맞나? 하고 드는 회의를 붙들고 다른 일을 모색하는 일이 어떤지 잘 안다.
어쩌면 내가 목사가 되고, 아니 돌이켜 다시 주를 바라며 구하면서 여태껏 덩달아 졸리는 마음 아닌가. 이대로 있어도 되나? 이 길이 맞나? 싶은. 여지없이 아무도 오지 않았고, 마음은 시무룩한데 평소엔 거의 먼저 연락도 않던 애가 뜬금없이 날 위해 기도하면서 울었다는 소리를 꺼내고 한참 보채듯 보내온 카톡 내용이 그러했다. 왜 그러고 있냐는 소리겠다. 내 안에 이는 목소리도 그것인데, 되레 차분할 수 있었다.
노인은 어깨에 고르페 나무를 이고 산을 오른다. 세 아들이 시무룩하니 늙으신 제 아비의 걸음을 따른다. 기웃거리듯 쳐다보며 이웃하고 있는 사람들이 궁싯거린다. 하늘은 유난히 맑고 쾌청하다. 당장 물로 심판이 나서 홍수가 날 것처럼 굴더니 몇 년 째 아니 수십 년째 별 일 없이 잘도 지낸다. 저들이 뭐라 묻는 건 두 아들이 가졌던 의문과 같고, 노인도 수차례 묻고 또 묻던 것이기도 하겠다. 여전하여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지만 그건 그거대로 놓아두고, 노인은 칸을 막고 안팎에 역청을 바른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창 6:14).”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그리 두시는 이가 따로 계신데! 느닷없이 한 무드장이의 믿음이 값지게 여겨졌다. 노아의 것이었지 않겠나. 아브라함이 걸어갔을 길이고, 그저 막연하기만 하였을 미디안 광야에서의 모세의 나날이었지 않나. 속수무책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앉았을 때 제자들의 마음일 테고, 이를 견디지 못한 가룟인 유다는 기어이 일을 벌였던 것이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일이라는 게 때론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일 테지만.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행여 나의 이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 또한 주가 수정하실 일인 거고. 나는 묵묵히 나의 남은 여정을 마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전하여야 할 말씀이 고스란히 내게 들려오는듯하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지혜로 짓자. 주먹구구식으로 충동적인 게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한 표지가 필요하다.
말씀만 붙들자. 내가 나의 날들을 채운다는 건, 하루하루 방방마다 보배를 쌓는 일이어서,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잠 24:4).” 그러할 때,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3)”는 일이다. 미련하여도 말씀만으로 하자. 여러 더 좋은 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건 또 그럴만한 사람들에게 맡기신 것일 테고. 묵묵히 하려면 날마다 새 힘을 공급 받아야 한다.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5)” 그게 무얼까?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딤후 3:14)” 이를 붙들고 나아가는 수밖에, 지금의 나에겐 그것뿐이다. 왜 그러고 있어? 뭐든 해야지. 어쩌자고 그래? 내 안의 수도사가 자꾸 염려를 앞세워 말을 건다. 어디에 글 써. 선생님을 위해 써. 약사애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무슨 소린지는 알겠는데, 것도 적당하였다. 넘쳐나는 이론과 실재 사이에서 나는 다만 실제로 됐다. 내 글을 알려 돈벌이를 삼은들.
지겹도록 그러고 싶었던 적이 있다. 단꿈을 꾸며 몸서리치게 바라던 일이기도 하다. 한데 여전하여서 나는 유명해지고 싶고 그걸로 돈벌이를 꿈꾸며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삶을 바란다. 더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두렵다. 그러려고 주를 바라고 싶지는 않다. 옹졸한 사람이라, 나는 설교 원고도 날 위해 좋다.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이 껄떡거리듯 나를 쥐고 흔들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나는 무모한가. 주가 하시기를. 여기까지 오게 하신 이가 나의 남은 여정을 주도하시기를.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사 48:15).” 이 말씀 하나면 족하지 아니한가. 그런데 아무 효과도 없고 별 볼 일없이 살다 끝마치게 되는 인생이라면 그 또한 내게 가장 형통하였을 것이다. 내가 누구였나?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4).” 내가 다시 나를 주도해야 한다면, 나는 싫다. 이제 주님이 하시라.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9).”
곧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10).” 약사애가 보기에 오늘의 내가 어떠할지 안다. 내가 봐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으니까 말이다. 이에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 하였느냐(14).” 나에게 들리는 주의 말씀을 어떻게 좀 보여줄 수 있었으면. 아, 그래서였구나! 싶은 모세의 혹은 바울의 이러저러했던 사정과 상황이 오히려 복이었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이가 적어도 교회는 교회다. 평소 아이들이 글방에 와서 글을 쓰고 뭐라 설명을 듣고, 그러는 동안 나의 기도가 또는 마음이 주님의 것이기를. 그러하다면 종종 듣는 우려가 실은 내가 염려할 게 아닐 것이다. 어른 성도가 좀 있어야 할 텐데, 애들이 얼른 커서 교회에 보탬이 돼야 하는데, 하는 따위의 말들이 썩 올바른 것 같지는 않다.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17).”
됐다. 주만 바라자. 버티는 게 일이다. 것도 내게 평안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22).” 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이 어느 때보다 평강하지 아니한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앉아 온 몸이 뒤틀린 듯 찌뿌둥한 몸뚱이를 비틀면서 주를 바라는 일. 새로 한 날을 허락하신 이가 방마다 주의 보배로 채우시기를. 나의 시간이 또 일상에 그날이 그날 같지만 그러므로 채워지는,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잠 24:4).”
고로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시 35:1).” 내가 싸울 일이 아니다. 이김은 주의 것이고,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그렇다면 말은 다한 게 아닌가.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 35:9).”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0) | 2017.08.09 |
---|---|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0) | 2017.08.08 |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0) | 2017.08.06 |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0) | 2017.08.05 |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0) | 2017.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