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편 37:5-6
신앙의 정도를 혹은 그 상태를 간단하게 진단할 수 있는 법은 ‘자신이 결심할 수 없는 불능의 정도’를 얼마나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가령 내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수고하고 애쓰는지를 기억하고 있다면 자아가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설령 그래서 주 앞에서 열심을 다하고 있다 해도 그 열심을 앞세워 생각하는 정도가 폭력이 되니까 말이다. 그럴 바엔 오히려 내가 아무리 결심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자괴감이 더 낫다. 물론 자기 환멸이 무기가 되는 수도 있다. 교만하여 자기 결심을 신뢰하는 것이나 열등의식을 겸손으로 착각하는 정도나 크게 다르지 않은 문제다.
누구에 대해 얘기를 하다 또 무엇을 염려하다 아내와 나는 멈칫하였다. 그럼에도, 어떠하든,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어떠한가! 서로 자랑하다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는 위인이다. 그러니 매일 매순간이 감사하지 아니한가. 죽어 마땅했을. 아내와 나는 서로 공감하였고 지나간 것에 대한 책임에서 놓여났다. 오늘의 모든 책임에 대하여는 주께 맡기지 않은 것뿐이다.
아이를 두고 꽤 긴 시간을 상담했던 모양이다. 어린 두 자매가 또 그 어미가 서로는 서로를 어쩌지 못하는 화병이 들어 있었다. 글쎄. 교회로 보내고 각자 또 같이 상담을 권했다고 하는데, 주께서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그래 맞다. 그리스도 예수 없이는 각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성령이 내 안에 계신 증거는 분명하였다.
부끄러우나 동시에 기쁨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을 정도로 죄책으로부터 또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그리고 당장의 염려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것이다. 오후께 약사애가 왔다. 늘 보면 뜬금없고 부산하고 정신없이 바쁘며 여기저기 돌아친다. 나는 그것이 영적인 게으름과 다르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잠 24:30-32).”
경계가 모호하면 돌담이 무너진 포도원과 같은 것이다. 이를 복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게으른 영혼이다.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33-34).” 뜬금없고 두서없다. 몇 시까지 온다 하고 느닷없이 주유를 하느라 부산을 떤다. 이걸 한다면서 저걸 가져온다. 이랬다저랬다 소진된 힘은 금세 늘어져 자자, 졸자, 눕자 한다. 그리고는 사리에 맞게 말해주는 일곱보다 자신이 옳다고 여긴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26:16).” 신기하지? 두 사람은 서로 너무 잘해줘서 문제였다. 그 외로움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아무렇지도 않아! 하면서도 그 안엔 서러움이 또 원망이 가득했다. 부부 사이의 일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나만 ‘너를 위하여’를 외치지만 실제는 ‘나를 위하여’인 것이다. 괜히 불편해지는 게 싫은 것이고, 우리 부부는 10년 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 저이는 말했다.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싸움도 사랑이다.
건강하다는 건 항상 어떤 병원균과 싸우고 있고 거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소리다. 성령이 주시는 평온함은 내 안에 이는 끊임없는 다툼을 의미한다. 저들 부부가 매주 토요일마다 소그룹을 형성해서 성경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나는 더 이상 그게 뭔지, 어떤지,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 않았다. 다만 그것으로 무엇을 얻는가? 그 안에 성령이 계시다면 성령의 열매는 필연적인 것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평안의 열매가 있는지. 둘이 그저 좋은 것으로 족한 것인지. 그 안에는 항상 모멸감이 가득한데, 아이는 결코 사랑을 운운하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지만 편한 사람은 아니다. 아이들만 장성하면 떨어져 나올 생각이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나는 아이에게 성경적인 부부상을 한 마디로 정의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친밀감을 확인할 수 있다.
서로에 대한 고마움이 또 감사가 혹은 절실함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일 테니까 말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이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1).” 고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 곧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23).” 이를 설명하면서 그리하여 부부간의 친밀함은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를 설정한다고 말해주었다.
어떤 울분이 가득한데, 나는 다 알지만 막무가내로 그리 일러주었다. 우리가 결심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방언으로 기도를 하네, 누굴 위해 기도하다 뭐가 보이네, 하는 따위로 현혹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넘겨짚듯 하는 그와 같은 발설을 나는 경멸한다. 기도 좀 하네, 말씀 좀 보네 하는 사람들일수록 마치 그와 같은 마음을 무슨 초능력쯤으로 아는 모양이다. 지도교수(?)가 나에 대해 그 마음에 원한이 많은 사람이라나.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다고 했다나. 풋.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 느낌이 들 수 있다. 누구에 대해 또 어떤 상황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그런 유추도 가능하고 어떤 추론도 타당할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나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걸 무슨 염력이나 되는 것처럼 구는 게 가증하다. 어리석은 것은 그걸 또 듣고 그렇다고 인정하며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꼴이다. 문득 내 안에도 누구에 대해 또 어떤 일에 있어서 그처럼 단정 지어 말하곤 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는 걸 생각했다. 그래. 이것은 고약한 버릇이지 뭔가 있는 신통력이 아니다. 그 입 다물라.
뭐라고 얘기를 한들, 저를 두둔하고 나설 게 빤하여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나는 주께 아뢴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할 말을 내 입에 넣어주시고 거르고 버려야 할 판단을 주께서 제어하여 주옵소서. 그러려면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
나는 일부러 더 성경을 강조하였다. 성경을 읽는 게 무슨 숙제처럼 여겨져서야 어디. 삶의 기준이며 푯대다. 좌표인 것이다. 저가 참으로 성령이 충만한 자이면, 우리가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어도 성령 안에서 서로 화기애애할 것이다. 기쁨이 어떤 말할 수 없는 신뢰가 느껴질 것이다. 나는 이런 유의 판단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조심스럽다. 행여 이 또한 무슨 신통력쯤으로 여겨질까 봐서 말이다. 전에 누가 나를 만났을 때 자기 안의 영이 기뻐 춤추는 게 느껴진다는 소릴 했다. 순수하게는 그 의미를 이해한다.
그러나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자칫 신비에 매여 그것을 마치 자신에게만 부여한 어떤 괴력으로 삼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뭘 봤네, 들었네, 혹은 누구에 대해 먼저 아네, 하는 따위의 말들도 실은 그러면 그럴수록 입 다물고 주께 더욱 깊이 상고하는 묵상이 필요하다.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 누굴 대언한다느니, 뭐를 봐주는 식의 무당 같은 짓거리를 성경은 아주 혐오하신다.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출 22:18).”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우상 가운데 가장 끔찍한 우상은 하나님이라는 우상이다.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 20:6).”
곧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기가 막히게 추구하면서 정작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내친 김에 가짜 믿음에 대하여도 말해주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더 나은 것 같은 믿음. 다른 것보다 내게 유익을 줄 것 같은 실용적인 하나님이어서의 믿음. 그래서 붙들고 사는 주관적인 내 믿음. 이 모두는 어느 훗날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주를 빙자하여 자기의 일을 도모하는 자들이다. 저들 부부 사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 시간을 많이 놓아두었다. 필요하면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한 영혼의 구원 사역을 마치 우리가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이 가장 무서운 오류다. 영혼 구원은 주의 사역이시다. 우리는 다만 주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왜 나 같은, 몹쓸 그릇에 그 귀한 보배를 담으셨던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낮에 문득 아내와 나눈 이야기에서 아무리 오늘 우리의 형편이 그러저러해도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어떠했던가. 왜 이 보배를 너무도 하찮은 질그릇에 담으셨는가.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내가 무슨 주술사도 아니고 누구보다 대단한 염력을 지닌 척, 기다 아니다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여 내 입에 할 말만 담아 주옵소서. 그리하여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7).” 저들이 주의 이름으로 어쩌니저쩌니 내가 뭐라 그럴 게 아니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눅 9:49).” 내 안에서 뚱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50).”
그래서 나는 약사애에게 뭐라 하기보다 그 부부의 이런저런 사정을 듣는 것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 곧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5-6).” 뭐라 하든, 그러라고 그럴 수 있는 힘이 단련된다. 저는 내 일이 아닌 것이다.
이는 곧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7).” 주가 하신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시 37:3).”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0) | 2017.08.11 |
---|---|
생각하여 보라 (0) | 2017.08.10 |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0) | 2017.08.08 |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0) | 2017.08.07 |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0) | 2017.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