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이사야 49:8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편 36:7
언제부턴가 모 기독교 신문 하나가 매 달 발송되어 온다. 솔직히 읽을거리가 없어서 휘휘 둘러보는 정도라 뭐라 말할 게 없다. 주로 낯익은 유명한 목사나 어느 큰 교회의 부흥(?) 소식이 주를 이룬다. 어제는 더욱 좀 그러했던 게 어디 기도원, 무슨 집회, 모 기도회를 통해 알리는 치유나 신유에 대한 초대가 주를 이뤘다. 심지어 모든 병명을 나열하고 성령의 능력을 운운하는 기사도 있었다. 글쎄. 난 잘 몰라서 그런가, 사기꾼들 같다. 내가 읽고 이해하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사뭇 달라서 말이다.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란, 평소엔 티도 안 난다. 본인도 잘 모를 때가 많다.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하여서 스며든 매순간의 삶이어서 말이다. 그럼 그런 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푸르름이다. 싱그러움이다. 어떤 진공상태의 무공해적인 삶이 아니다. 오히려 늘 사사로운 것에서도 다툼이 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일이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성경에서의 일곱 번이란 숫자로 꼽을 수 없을 만큼의 무수함이다.
아침에 글방에 올라가면 늘 물을 줘야 하는 나무가 있는데 항상 그 잎이 무성하다. 녀석은 밤새 시들하여서 잎을 축축 늘어뜨렸다가 물을 주고 곧 햇살을 받으면 고개를 빳빳하게 든다. 그 싱그러움은 또 그만큼의 시들고 메마른 잎사귀들로 증명된다. 여느 것과 달리 항상 보면 누렇게 변색된 잎을 떨구고 파릇한 새싹을 돋아낸다. 문득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란 그와 같은 생명이 아닐까? 한 번 견고하게 굳어지면 물조차 스미지 않는 콘크리트 같은 게 아니다.
가령 내 안에는 수시로 어떤 탐심이 든다. 음란한 생각도 끊이지 않는다. 누구에 대한 평가와 비난도 인다. 불평과 짜증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묵상글을 쓸 때나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있을 때 정도만 좀 깨끗하다고 할까? 돌아서면 영락없이 도로 번져가는 이끼 같다. 이때,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이끼가 없는 곳에 놓여진다는 게 아니다. 나도 모르게 금세 내 안의 탐심을 감지한다. 언제 들었는지 음란한 마음으로 부끄러워한다. 누구에게 대해 뭐라 하다가 오히려 저를 안타까워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성령의 사역이란, 어떤 능력을 강조하고 무슨 체험을 부추기는 건 음모다. 철저하게 사기꾼이겠거나 돈으로 성령을 사려는 자이다.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잠 17:16).” 성령의 요란한(?) 역사는 크게 두 번이었다. 한 번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눅 3:22), 또 다른 한 번은 예수님이 떠나시고 난 뒤 오순절 날(행 2:3)이다. 성령이 오신 뒤에는 오히려 잠잠하고 평범하였다. 왜 그럴까?
성령의 역할은 그리스도 예수의 영을 우리의 삶에 연합시키는 것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도록 하시는 거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3-14).” 먼저는 ‘진리 가운데’로다. 진리에 묻혀 내가 도드라질 리 없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한다. 이는 철저한 스밈이다.
삶에 스며져 정작 본인도 뭐 그리 거창하게 요란을 떨며 장사꾼처럼 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삶에서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왜 그럴까?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리시기 때문이다. 실제 예수님의 생을 봐도 알 수 있다. 33년 정도의 생에서 30년은 묻혀 있었다. 드러난 게 별로 없다. 그렇다고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셨냐? 그렇지 않다. 성령의 사역은 예수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드러난 공생애 3년도 예수님이 나서서 요란했던 경우는 없으시다. 오순절 날 이후 되레 평범해진 것과 같다.
내가 좀 모난 사람이라 그런가, 기독교 신문을 보면서 또는 누가 뭘 어쨌네, 하는 소릴 들을 때면 정작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 사람은 티가 안 난다. 조용하다. 한결 같다. 요란을 떨고 마치 자기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구는, 은사를 운운하며 당장 ‘불의 혀’ 같이 뭔가를 사를 것처럼 구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자아도취를 성령으로 착각하는 카타르시스에 젖어 사는 위인들이다. 그런 자들을 보면 꼭 남한테는 엄격하다. 헌신을 강요하고 뭔가 가시적인 결과를 요구한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이 쥔 건 놓지 않는다. 자신에겐 관대하다.
조심스러워 말로 옮기기 좀 뭐한데, 딸애가 요즘 마음고생이 심하다. 새로 온 누가 그리 유세를 떠는 모양이다. 세상적으로 표현하면 ‘열정 페이’를 강요하고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종용한다. 원리 원칙을 따지고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정작 자신은 제 시간에 출근한 적이 없고 사적인 일인지 공적인 일인지 한데 묶어 업무지시를 내린다. 떠날 때가 됐나보다. 조용히 마무리하고 나오자. 딸애한텐 그렇게 말해주고 나는 속으로 욕을 해댔다. 그리곤 마음에 걸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회개했다. 나쁜 놈들이 너무 많다.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시 36:2).” 성령을 운운할 때 그와 같은 오류에 빠지기 십상이다. 마치 자신을 돕는 천사쯤으로 여긴다. 막 부려먹어도 되는 상대로 안다. 그리곤 무슨 무기처럼 휘두른다. 함부로 여기저기 총구를 겨누는 것이다. 내가 아는 은사는 그런 게 아니다. 스며서, 일상에 그대로 스며져서 정작 저도 그 사실을 미처 모를 정도이다. 지금 뭐 해? 하고 물으면 자신도 모른다. 다만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인이면 주와 동행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지 그걸 무슨 벼슬인 줄 안다면 문제가 있다. 목사면 뭐? 누가 그 손가락에 ‘불의 혀’를 달아주셨나?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라도 쏘게 하셨나? 난 사실 여기저기서 이단들 때문에 호들갑을 떨 때도 보면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를 경계해야 하고 주의하며 주목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상대해서 맞불을 놓을 게 아닌 것이다. 이쪽에서 이런다고 저쪽에서 우린 저러자는 식의 대응은 꼴사납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 임재하신다는 건, 말씀에 집중하는 일이다.
수시로 자빠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일이다. 나를 쳐 복종시키는 일이고 그리하여 주를 영화롭게 하는 삶이다. 내게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는 삶. 스며서 그 스밈이 싱그러움으로, 푸르고 무성함으로 증명된다. 그 밑에는 메말라 비틀어져 떨어진 잎들이 수두룩하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 때를 알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사 49:8).”
나는 늘 응답을 체험한다. 조지 뮬러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던데, 것도 우습다. 저가 몇 번의 기도응답을 받았다는 간증을 무슨 표본으로 삼으려고 하는 게 말이다. 우리는 수시로 응답 가운데 사는 것인데, 이를 또 별도로 구분하여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게 또 우상이 되면 것도 무서운 일이겠다. 기도가 들숨이면 응답은 날숨이다. 내가 가장 예민하게 응답을 체험하는 경우는 ‘읽기’에서다. 성경이나 기독교 서적에서는 물론 가볍게 읽는 신문에서 또는 지나다가 보는 광고전단에서도 나는 응답을 받는다.
기도는 묻는 일이고 응답은 듣는 일이다. 여전하여서 아직 풀리지 않고 어렵기만 한 물음에서는 솔직히 이미 답을 받았으면서 그거 말고, 다른 답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혹은 무슨 ‘소원성취’를 응답으로 착각하고 사는 경우이거나. 자, 다시 보자.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이는 매순간의 경우여야 맞다. 소위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다면서 말이다. ‘구원의 날에’ 이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기억일 수 있다. 구속의 날은 아무래도 특별한 간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내가 너를 도왔도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그 전에도 있었다.
예수님이 세례 받기 전엔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셨던가? 내가 구원 받기 전에, 그러니까 회심하기 전엔 주의 영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신 건가? 그렇지 않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까닭은 주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하여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려고 나를 보내셨다. 이미 예정하사 택정하신 바 된 일로써 말이다. 하면 이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성경의 약속이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다.
성령을 받는 건 받는 것이지 얻는 것이 아니다. 조건부가 아니다. 어떤 수고의 대가도 아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흠이 없던 다소의 바울(빌 3:6), 또는 늘 반듯한 부자 청년(눅 18:21), 아니면 존경 받을 니고데모(요 3:4) 저들이 가장 적절하였을 것이다. 자꾸 교회에서 어떤 조건을 붙이는 건 조직을 위한 경우이지 실제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과는 다르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건 내가 항상 주를 생각함이다. 주와 연합된 삶이다. 연합은 따로 구분해서 이럴 경우와 저럴 경우로 나뉘는 게 아니다. 연합된 삶이란 개인의 체험에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상이 늘 체험이기 때문이다. 또 개인적인, 자신에 대해 기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도가 필요한 곳은 따로 있다는 게 확연히 보여지니까 말이다.
그럼 난? 난 됐다. 늘 충분하다. 어렵지만 감사하고, 힘들지만 견딜만하다. 어떤 뭔가를 바라지 않아도 되는, 일상의 손길을 누리고 살기 때문이다. 죽겠는데 살겠다. 뭐랄까? 이런 게 되레 신기한 것이다. 새벽 네 시, 잠이 달아나고 일어나 앉아 그 시간에 말씀을 읽고 묵상글을 쓰고 있다. 더워 죽겠는데 들어앉아 그런 책(!)을 본다. 늘 같은 말 같은, 믿음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이 말씀을 붙들고 씨름했던, 것도 성경을 더 많이 운운하며 말씀으로 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글이 읽힌다.
신기하다. 가끔은 내가 이러고 있다는 게 말이다. 이러고 있는 내가 실은 내가 아니고 내 안의 성령이시다. 나는 이제 그것을 확신한다. 아니면 달리 내가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화도 안 내고 순도 100%의 청정지역에 산다는 소리가 아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솔직히 몇 개만 사실대로 말해도 역겨워서 봐줄 수가 없다. 그런데, 그래서 더욱 주를 바란다. 절실한 것이다. 숨쉬기가 가빠서 답답함을 느낄 때면 영혼의 갈급함도 그런 것이어야겠구나, 생각한다. 그럼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 하는 정도면 확실히 아닌 거다. 죽겠는 게 아니라 정말 죽는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하는 기도가 내 것이 되었다. 곧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사 49:5).” 아멘이지 않나?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13).”
오래 다녔던 아이가 갑자기 공부방을 끊을 것 같다고 아내가 말했다. 요즘 글방에 오면서,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일로 몇 번 엄마가 가지말라고 반대했던 모양인데, 그래서 기껏 잘 다니던 아이를 그만두게 하려는가, 마음이 어렵게 됐다. 공들여 뭔가 해볼까 하면 꼭 이런다. 이런저런 그 집 사정을 더 말해봐야 뭐하나. 아무튼 이번 주에 글방에도 안 오면 그렇구나, 그래서가 맞다. 나는 입을 삐쭉거리며 하나님께 심통이 났다.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죠?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 36:9).” 달리 할 수 있는 기도도 없다. 나는 다만 그래서 기도한다.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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