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이사야 51:1-2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편 38:15
하나님은 이상한 아이만 붙이신다. 너무하시다 싶을 정도로 문제가 있는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면면을 들어보면 단순히 다 그렇지 뭐, 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한 가정엔 다 저마다 폭군이 산다. 대놓고 욕질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고, 직접적인 언사는 없다고 하나 무관심과 반목과 괄시와 혐오가 난무하다. 어느 가정이든 조금씩은 그런 것이겠으나 문제는 그 피해자가 대체로 여자이거나 아이들이다.
엄마는 남편의 무시와 막말과 폭력을 아이에게 되갚는다. 앙갚음은 큰애가 둘째에게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주추인 아버지든 혹은 엄마든 저의 변덕과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저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위장을 하는 것이다. 예의바름과 솔선수범은 전적으로 저의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 길들여지고, 가정의 평화는 그리 유지된다. 폭력은 중독이다. 언어폭력이든 무관심 또는 반목이나 무시에 이르는 것이든 실은 다 몸에 밴 것이다.
문제는 그게 그 가정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아이는 두 가지 형태로 변형을 가져오는데 하나는 사회성에서 저도 모르게 그 대상, 폭력적인 아빠나 잔소리꾼 엄마와 흡사한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이다. 친구들 사회에서 또는 학교 구성원 가운데서 그 상대가 실제 어떠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는 스스로 자신을 억압하는 대상을 찾고 설정한 그 상대의 기분을 중심으로 자신을 맞춰 간다는 것이다. 혹은 반대로 누군가 위에 굴림 하기도 하는데 말투나 몸짓은 물론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든 게 몸에 밴 자신의 숙주를 닮았다.
아이는 안하무인이다. 무서울 게 없다.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굴었다. 그럴 때 엄마나 아빠, 저 아이의 숙주를 언급하면 금세 주눅이 든다. 그 아이가 누구 위에서 굴림을 한다. 억압하고 다스린다. 감정 기복이 심하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이다. 반면에 또 누구에게는 너무 저자세다. 너무하다 싶게 양보하고 참는다. 언니는 동생에게 폭언을 하거나 심지어 아무도 몰래 폭력을 쓴다. 부모도 그 사실을 알지만 어떻게 제지가 안 된다. 그건 어려서부터 그 집안에 왕좌를 틀어지고 있던 부친이 사업에 실패해서 신세가 처량하게 된 뒤였다.
점심을 먹으며 아내에게서 ‘아이’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엄마가 늘 비난을 감내한다. 그런데 저의 유일한 출구는 교회다. 일주일에 절반을 교회에 간다. 기도하고 청소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의 열심은 하나님 앞에 무기가 된다. 잘 될 거야.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실 거야. 그래야 마땅해! 그러는 동안 사업에 실패한 남편은 혼자서 구멍가게를 일구며 점점 쇠락해간다. 의기소침하여 큰 딸의 폭압으로 작은 애가 독이 올랐다는 걸 방관한다. 이빨 빠진 수사자는 만사가 귀찮다. 잘 믿던 신앙도 아내의 열심으로 신물이 난다.
정말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이상한 아이들만 붙이시는 것 같아. 아내의 말에 나는 공감하였다. 일부러 지어내는 소리처럼 아이들 하나하나 어쩜 일부러 골라다놨을까? 싶을 정도이다. 한 녀석의 사연은 기구하다. 안 됐다 싶어 내가 어찌 마음을 기울이고 싶은데, 하는 짓이 정말 밉상이다. 약삭빠르고 눈치만 살살 보면서 머리 꼭대기에서 논다. 어찌 통제가 안 된다. 걔가 안 왔으면 싶고, 왔다면 빨리 갔으면 싶다. 그러니까 그 애 때문에 나도 내 안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 애를 대할 때면 열 번은 기도를 더 해야 한다.
오늘 말씀은 그런 내게 시의 적절하게 다가온다.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허걱! 지금에 나를 떠내시고 파내신 데가 어디였던가? 내가 누구와 어울리고, 어울릴 때마다 누구의 폭정으로부터 늘 억압당해왔었는지를. 오늘 본문은 각각 ‘생각하여 보라’ 하신다. 다음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사 51:1-2).”
그랬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떠내고 파내어 어찌 이루어 가셨는가를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우상의 땅에서 힘의 논리로 적당히 묻혀서 살아갔을 아브라함을 떠내셨다. 파내신 뒤에 저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지 않나? 이 뜻을 헤아려 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내 입에서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 38:15).” 주의 응답을 바라며, 두시는 동안 묵묵히 주의 마음일 수 있기를. 우린 요즘 가정예배 때마다 기도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감당이 안 되니까 말이다. 언제부턴가는 아이를 교회로 나오게 하는 게 주목적이 아니라는 데 생각을 하게 됐다. 저의 영혼구원이 내 사역이 아니라 저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을, 그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게 나의 일이었다. 이게 참 그렇다. 교회래, 글방이 돈을 안 받는데, 하다가 어쩐지! 교회 나오란 소리지? 하는 등식이 성립 됐다. 그럴 줄 알았어, 하는 것이다. 곧 우리의 친절이 계산된 거였다. 다 꿍꿍이속이 있던 게 된다.
그러다보니 드는 생각이 교회로 나오게 하는 게 주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린 주님이 돼야 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아이를 교회를 나오게 하려는 데 주안점을 두었더니 영락없이 중2 아이가 떨어져나가게 생겼다. 엄마가 막무가내로 싫다는 것이다. 아이도 속내를 드러내길, 그럴 거면 전에 다니던 교회엘 가겠다는 것이다. 아뿔싸.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내가 얼마나 성의 없이 아이를 대했나 싶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저들의 여정이 어떠했던가.
예수를 처음 만나면 혼돈이 온다. 혼란스러워하는 게 당연하겠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다들 괜찮다고 했는데 왜 이들만 이러는가? 우리의 관심이 또는 기도가 저들에겐 못 견디겠는 무엇이 된다. 그런데 그냥 빤한 등식으로 방정식을 풀려고 하니 이등삼각형의 각도가 구해지겠나? 교회로 오게 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내가 교회가 돼야 하는 일이었다. 예수에 대해 알려주는 게 일이 아니라 내게서 예수의 향기가 나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니 우린 우리대로 죽겠는 거다. 애가 싫은데, 딱 질색인 아이인데 하필 어쩌다 이런 애를, 하나님은 골라도 꼭 이상한 사람에게만 관심을 두신다.
하고 불평하다 오늘 아침 말씀 앞에 붙들린 것이다. 너를 어디서 떠냈더라? 너를 어디서 파왔더라? 주님이 물으시는 것 같다. 생각하여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9:39).” 얼마나 역설적이신지. 내가 알았다고 하면 모르게 하신다. 모르겠다고 하면 알려주신다. 보인다고 하면 감추신다. 안 보인다고 하면 보여주신다. 1958년 <사상계>에 실렸던 함석헌 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을 조금 메모해두었다.
뜻이 있으면 있다.
뜻 없으면 없다.
뜻이 있음이요, 뜻은 뜻이다.
하나님은 뜻이다.
모든 것의 밑은 뜻이다.
모든 것의 끝의 뜻이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다.
뜻 깨달으면 얼(영혼), 못 깨달으면 흙.
...
이를 나는 이렇게 읽었다. 주님이 계시면 주님이 하신다. 주님이 안 계시면 아무도 못한다. 주님이 곧 저 아이다. 저 아이가 내게 주님으로 왔다. 주님이 저 아이들의 바닥이고 끝이시다. 아이를 주의 마음으로 품으면 사역이고 나 몰라라 내버려두면 고역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우리가 어찌 아이들 가정을 또 부모를 한심하게 여길 수 있겠나. 우리에게 두신 건 저 아이들이다. 아이들도 지금 이 상황을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보고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이 아니고는 어찌 담아낼 재간이 없다. 약 오르고 기운 빠지는 일이다. 아니 기껏 잘 다니던 아이가 물론 다른 이유를 댔지만 엄마가 그만두라는 것이다. 혼자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억척스러움을 우린 당할 수 없다. 설득이 안 된다.
시무룩하게 있었는데, 거의 포기하고 있던 다른 아이엄마가 뜬금없이 두 달 치 교육비를 보내왔다. 아내는 순간 이건 뭐지?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니까 우리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바쁘시다. 성령은 계속 일하고 계셨다. 우리가 그 애를 그냥 품자, 하고 있었더니 그렇게 또 아는 체를 하신다. 풋, 웃음이 났다. 그래봐야 아직도 일 년 치 넘게 남았는데, 아내는 어이없어했다. 우리가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한다는 건 우리가 우리 자신과의 싸움을 그치지 않는 일이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이내 우리는 깨닫는 것이 ‘뜻을 정하여(단 1:8).’ 그 뜻을 있게 하는 것이다. 뜻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그 뜻을 바로 삼는 것이다. 뜻을 정해야 한다. 정한 뜻을 굽히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만 바라지 않으면 금세 우린 또 나가자빠지게 돼 있다. 우리가 뭔 수로 저런 애를, 애 엄마를 사랑할 수 있을까?
것도 주가 하신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사 51: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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