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사야 52:7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시편 39:1
문제는 문제를 회피한다. 문제 있는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안 하고 자꾸 남 이야기를 한다. 혹은 듣지를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한다. 가정의 문제를 아이는 말하지 않는다. 부모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부모는 자녀의 어리석음을 말하지 않는다.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카펫 밑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하는 말, 나중에. 아이는 원고에 흥미를 보였다. 어디에 보낸 원고에 대해 담당자가 메일로 확인하고 뭐라 답을 한 모양이었다. 더 쓰고 싶고 잘 쓰고 싶다고 하는 아이의 말에 풋, 웃음이 났다. 좋은 일이다.
문제는 외부의 도움을 거절한다. 저의 입에는 아니에요, 하는 말이 달렸다. 종기는 건드리면 아프다. 그런데 남이 건드리면 더 아프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살 것 같다. 됐어, 하나님은 다 아시지요? 막무가내다. 자신의 게으름을 하나님 핑계로 돌리려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하나님은 절대 게으름을 고쳐주지 않으신다. 태만은 불안보다 위험하다. 아이는 자신이 모른다는 걸 숨기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아는 체를 했고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들통 날 게 빤하다는 소리가 된다.
문제는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하고 자신을 채근하듯 돌아눕는다. 게으름의 특징은 문제를 껴안고 뒹군다는 것이다. 실은 싫지가 않은 것이다. 다 배부른 소리야. 우울할 시간이 어딨어? 감정놀음일 뿐이야. 마치 먹고 사는 문제에 전념하는 듯 바쁜 척은 혼자 다하지만 이건 마치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다. 영웅을 보호하는 일이다. 내 안의 불안을 보호해야 한다. 나를 구박하고 폭압을 일삼는 우리 집 가장을 지켜내야 한다. 그래도 모자랄 시간에 슬픔 따위는 하품만도 못한 것이다.
문제는 문제를 지식으로 처리하고 싶다. 아는 범위 내에서 한정지어 규정하고 추상화하는 것이다. 의미를 축소한다. 또는 부정한다. 다 그렇지 뭐, 하는 낙천적인 시늉을 하면서. 감정을 고립시킨다. 아니 아예 혼자 알아서 삼키고 만다. 그래서 믿는다는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아시지요. 자기 안에 주문을 건다. 하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자기 이야기로 가져오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아이와 좀 길게 통화를 했다. 누구와는 문자를 여러 번 주고받았고 오후께는 누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제를 앓고 있는 우리의 약점이 보였다. 신뢰를 구축하지 못한다. 당연히 발전시킬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무도 모른다는 걸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있다. 잃어버린 감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잘 달리던 말이 지랄발광을 하는 것은 안장 밑에 낀 돌멩이 때문인데, 감정을 따위로 여겨 슬픔을, 우울함을, 억울함을 별 거 아닌 듯 치부하고 만다. 자신을 화통한 사람인 줄 안다. 그리곤 블랙 코미디에 심취한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7).” 이 단순명료한 진리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아무도 자기를 알 수 없다. 페르소나, 그래 맞다.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산다. 정작 자신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의 성품은 정작 하나님만이 아신다. 내가 안다고 여길 때 이미 ‘그, 나’는 내가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문제는 충동적이다. 감정을 무시하면서 감정을 이기지 못한다.
충동은 반복적이며 각자 독특하다. 거기엔 다 원인이 있다. 배후에 조정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늘 에너지 소모가 많다. 그래서 감정을 회피하지만 정작 감정에 휩쓸려간다. 그게 또 나은 것 같기도 하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유용하다고 여긴다. 문제는 말 그대로 전염성이 높다는 것이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그럼 어떻게 돌보실까? 오늘 본문은 그 증거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그런 자가 되어주어야 하고 그런 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이를 소극적으로 적용할 때, 그래서 열심을 낸다. 적극적으로 적용하려 들면 참견하고, 핀잔주고, 지적하고, 비판하고, 규정한다. 왜냐하면 그 통치를 자기 이야기로는 가져오지 않으려니까 말이다.
누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또 아이의 구구한 변명을 듣다가 혹은 충동적인 은혜와 감사에 기꺼워하는 누구에게,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명제는 모두에게 당연한 것이면서 그 해석이 서로 분분하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거기에 놓아두신 자로 사는 일이다. 때론 고되고 힘에 겨워 산을 넘는 일이다. 산 넘어 산이라. 얘길 듣다보면 끝이 없다. 장황한 말 속에 자기를 두둔하고 또는 문제를 회피하며 기어이 도움을 거절하는, 악성종양이 발견된다. 종기쯤으로 여겼던 일들이 말이다.
그런 걸 자꾸 파스만 붙이고 진통제만 먹으려고 하니까, 이를 어쩌면 좋을까. 이런 소릴 하면, 당신이 그걸 어찌 압니까? 대번에 물을 것이다. 최소한 나는 의사가 아니지만 내가 환자인 건 확실합니다. 말해주고 싶었다. 산을 넘는 발이 고되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내 스스로 주의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2).”
몰랐으면 모를까, 알겠는데 그걸 모른 척 하려니까 더 힘들다. 죽겠다. 아니야, 거긴 낭떠러지야! 하고 말해줘야 하는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3-4).” 내가 죽겠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누구의 문제를 함께 진다는 일은 그게 단지 생각뿐이라 해도 벅찬 일이다. 그래, 같이 글 쓰자. 아이에게 권하고 다음은 주가 하실 것을.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드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상담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의사놀이 같아서 말이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치료를 하거나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구는 게 마뜩찮다. 저의 이야기 속에서 내가 더 문제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게 우리 이야기인 것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이야기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표준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그럴 때 나는 혼자 신비주의자가 된다.
내 안의 주의 영이 어찌 반응하시는지, 가장 예민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내가 즐거워 떠들면 뭔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불편한데 듣게 하시고, 산을 넘어야 하는데 마다하지 못하게 하시는 경우는 분명하다. 둘 다, 여러 번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생각은 선명해진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자신을 즐겁게 하는가. 그러느라 마음이 원하는 바가 앞서는가. 정서적으로만 위로를 삼으려고 드는가. 이는 사망에 이르는 대화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가. 곧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는, 않았던 생각과 행동을 제거하려 하는가. 분명히 고통스러운데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가. 이는 생명의 대화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6-17).” 내가 백날 자녀라고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생활이 생각이 말이 그리고 어떤 느낌이 그게 아닌데.
성령이 하신다. 문득 주시는 마음을 또 말을 곱씹어볼 때 그 기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인가, 하는 것이다. 누구를 제어하고 통제하는 권한을 주신 게 아니다.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나는 오늘 아침 말씀에서 자꾸 그 소리만 들린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건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 자리에 서는 일이다. 거기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나를 말이다. 우리를 이 상황을 사건을 여러 문제를 물론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그걸 내가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드니까, 그런 충동이 과시가 되고 우쭐하여 뭔가 좀 다른 냄새를 풍겨야 할 거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뭐라 기껏 말하다, 마치 자신이 다 짊어지는 게 나은 것처럼 군다. 그게 최선이라고 말한다. 가장 무서운 문제는 자신을 자신이 통치하려는 일이다. 그럴 수 있다고 여긴다. 기껏 말해놓고는, 도로아미타불이다.
그 보상으로 자신을 두둔하듯 변명하고. 대화의 90%는 그런 것 같다. 직면하고 인정하고 고백하고 다짐하면서 기껏, 내가 나를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목이 터져라 외쳐주고 싶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나를 주께서 통치하실 수 있도록. 여기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하고 물으시면 나는 무어라 대답할까?
그 고백에 이르기까지,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시 39:5).” 나의 허상을 주께 내어드리는 일. 거짓과 거짓과 거짓뿐인 나의 나 됨을.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12).”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한 귀족이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혔을 때 구두를 수선하는 기술을 익혀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훗날 저가 복권되어 호화로운 생활로 돌아왔을 때, 저의 위안은 스스로 다락방에 들어가 구두를 수선하는 일이었다. 장성하지 못하는 믿음은 자꾸 같은 말만 되풀이하게 돼 있다. 어른이 되어 딱지를 모으고 무슨 장난감에 심취하는 ‘어른아이’처럼, 버릴 걸 버리지 못하며 꾸역꾸역 안고 사는 게 미련이다. 말을 하고 도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께 맡긴다는 건 그 어떤 성숙보다 장성함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사 54: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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