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전봉석 2017. 8. 13. 07:27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사야 54:10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편 41:12

 

 

 

비록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사 54:7).” 할 때의 놓아두시는 은혜를 생각하였다. 아이가 와서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하였다. 장모 생신이라 아내와 딸애는 일찍 서둘러 처가에 갔다. 손위 처남댁이 가게를 새로 개업하면서 이 규모를 법인으로 신고하였다. 더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딸애는 간간히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시장 어귀에 3층짜리 건물을 새로 리모델링하여 전체를 다양한 분식 코너로 꾸며놓았다. 아이는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다.

 

종일 조용하고 우울한, 무료하고 서글픈 마음에 짓눌리기도 하였다. ‘나를 듣게 하소서.’ 그 가운데는 어떤 부러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 그것을 네가 듣게 하여 네가 이것을 내 신이 행한 바요 내가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48:5).” 의연할 수 있기를. 덤덤하여서 이젠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하시기를. 나로 듣게 하시어 이 모든 상황과 여건 가운데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을 보게 하소서.

 

아이에게 전화를 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원래 그런 아이였다. 아니, 언제부턴가 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신기할 정도이다. 목사가 되고 또는 교회이면서부터 그저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두는 경향들이 있다. 굳이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정오가 되면서 땡볕이 내리쪼였다. 내 안의 기쁨도 다른 데 초점을 맞추어져서 그런가? 그러려니 하는 쪽으로, 크게 서럽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럴 것이란 예상을 하고 있어서 말이다. 사람이지 않나!

 

주가 나로 알게 하시려고, 이를 듣게 하신다. 내가 부어 만든 기대와 희망과 어떤 바람이 얼마나 허망하고 일시적인가, 하는 것을.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 말씀을 두시고 이젠 오로지 말씀으로만 서게 하시는 까닭도, ‘그것을 네가 듣게 하여 네가 이것을 내 신이 행한 바요 내가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행여 나의 노력과 바람마저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린 얼마나 저를 위해 기도하는지.

 

내 안에 두시는 기쁨은 그런 게 아닐 거였다. 어떤 부러움이 더 나은 무엇을 꿈꾸게 하지만, ‘믿음으로의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이지 하나님 안에서의 나의 기쁨이 아니다.’ 챔버스의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에서 읽었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였다. 자주 혼란스러웠던 기쁨의 정의가 다시 정립되는 것 같았다. 내 안의 만족이 또는 감사가 어떤 소망이 또한 확신이 모두 이에 적용이 될 것이다. 내가 주 안에서 열심을 다했더니 이런 좋은, 만족을 감사를 결과를 주시는 게 아닌 것이다. 정작 감사는 모든 환경을 초월하는 것에서다.

 

얼마나 거꾸로 믿었는지 알겠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나의 기쁨을 누리려 하였다. 하나님을 통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랐다. 어떤 일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도 그 만족은 내 것을 구하였지 하나님의 것을 중심에 두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43:4).” 주의 제단이다. 그 제단은 내가 임의로 어디를 정하고 그곳에 두는 게 아니었다.

 

이에 하나님의 약속은 견고하시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0).” 차라리 산이 떠날지언정 언덕들이 옮겨질지언정 나를 향하신 주의 자비는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소리다. 나를 향하신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의 말씀이시다.

 

고로 내 기쁨은 그와 같은 주의 말씀에 가까울수록 그 의미가 선명하였다. 사는 일이란 기준, 좌우정렬. 하고 누가 외치는 일이다. 그럼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듯 서열을 맞춰 산다. 이때 기준에 가까운 이가 있는가 하면 그 기준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는 이도 생긴다. 살다보면 다 그렇지 뭐, 할 수 있겠으나 그 기쁨의 농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처의 사촌언니뻘 되는 이가 이혼을 하고 간신히 그 옆에 돈가스 집을 차렸는가보다. 그 맞은편에 처남댁 친정 식구들이 가족 법인으로 아예 3층짜리 가게를 올린 것이다.

 

서로는 서로를 부러워하고 각자는 죽어라 하고 열심을 다한다. 자 그럼, 그 기쁨의 농도가 수치상 예상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않는다. 믿는 이에서도 누구는 주안에서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고 누구는 모질게도 주의 기쁨을 바라게 된다. 기준에 가까운 기쁨은 그만큼 연습이 필요한 것이겠다. 저절로 뚝딱 생겨나는 마음은 아닐 것이다. 누군들 부럽지 않겠으며 누구는 서러워하지 않겠나. 각자 그 속을 누가 알까.

 

한데 또 이것도 개별적일 때와 인격적일 때는 다르다. 가령 아담이 하나님으로 만족하던 시절은 그 실현이 하나님의 실현이었다. 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을 실현하는 삶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삶으로 옮겨온 것이다. 즉 저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에서 개별적인 관계로 바뀐 것이다. 이때 나타난 처음 증상은 하나님을 피해 숨는 일이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아니었다. 다만 전 같지 않은 게 되었다. 싫은 것이다.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내가 주 안에서 나의 기쁨을 추구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주님의 기쁨은 내가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이를 복원하시려고 오늘도 나를 붙드신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시 41:12).” 만족함이 없다. 반목과 불신만 쌓인다. 죽어라 하고 벌면서 죽겠다 죽겠다하며 산다. 저녁에 딸애가 돌아와 의미 있는 말을 했다. ‘좋긴 좋은데 이상하게 부럽지는 않더라.’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가난한 우리 살림과 어찌 비교가 될까. 궁벽하기 이를 데 없어 행여 아내가 친정을 다녀오면 그 마음이 어렵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고는 하는데. 딸애의 그 말 한 마디가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턴가 우린, 주를 기준으로 주를 바라보지 않으면, 그 기준과 멀찍이 섰을 때 오는 공허를 느끼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러는 데 있어 오늘의 고통이 또 서글픔이 우리 안의 기쁨을 훼손할 수 없는 것이다. 돈으로 좌지우지되는 그런 기쁨이 아닌 것이다. 건강으로 또한 하는 사업의 확장으로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아니듯이 말이다. 설령 그것을 잃었을 때도 드러나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본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것이었으면 나를 실현하면 할수록 자아를 실현할 때 만족함이 더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그저 일시적이다. 그런 것 같은, 술 취함과 같을 뿐이다. 잠시 동안은 그럴 수도 있겠다.

 

이 기쁨의 근원은 따로 있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그러므로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27).” 믿었으므로 느껴지는 기쁨이다. 믿기 전에는 그 기쁨을 기쁨인데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고후 4:3).” 우린 아니다. 그럴 수 없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4).” 안 믿는 거야 그렇다 치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나님 안에서 내 기쁨을 추구하려니까 말이다. 정작 하나님의 기쁨에는 관심도 없는 안 믿는 자의 기쁨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기쁨을 추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걸 축복의 기준으로 삼고, 기도 응답을 거기에 두고 있었으니, 고작 기쁨은 잠깐 즐겁다 마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 어떻게 주님이 계시지 않는 이 땅에서, 주님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으로, 대체 무슨 확신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성령을 구하는 마음은 그래서였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곧 이 말씀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 안에 성령을 주시는 거였는데 우리가 구하는 기쁨은 안 믿는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었으니.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을 실현하는 삶보다 자신을 실현하는 삶으로 그 기준을 삼으려고 하는 것이었으니. 성령 없이는 하나님의 기쁨과 나의 기쁨은 거리가 멀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에서 ‘그 기준에 얼마나 집중하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이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아! 어떤 수고이어야 하는지, 왜 그 수고이어야 하는지 알겠다. 나는 늘 어리석어서 또 휘청 부러웠다가 서글펐다가 좀체 그 마음을 이겨낼 수 없는 것이지만.

 

내가 주 안에서 주의 기쁨이 되는 일,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저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이었다. 주일 아침, 또 아무도 안 오면 어떻게 하나… 싶은 우울감이 나를 엄습한다. 누구를 생각하고 한 아이를 기억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주의 제단에 나와야 할 영혼을 주께서 이끌어주시기를. 고로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4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