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전봉석 2017. 8. 12. 07:29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6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시편 40:5

 

 

 

한 날의 삶이 적당하다. 조금은 힘들고 우울하고 또 조금은 화를 내지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모든 게 감사하였다. 정직한 계절의 변화 앞에서 드러나는 것은 나의 변덕스러움뿐이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일은 즐거우면서 부담스럽다. 오죽하니 잠결에도 그 생각이다. 일찍 서둘러 글쓰기를 하고 있는데 동생이 전화를 하였다. 교회를 사임하고 개척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조금은 장황하게 그 전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또한 궁극적으로는 주의 인도하심이겠으나, 내가 하려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사뭇 다르다.

 

다소 즉흥적이고 혹시나 충동적이어서 그것으로도 시작하게 하시는 이가 첫 삽을 떼게 하시는 일일 수 있겠으나 좀 더 신중하기를. 묻고 기다리고 묵묵하기를. 뭘 꼭 해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선을 이루어가시지는 않는다고. 특히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라면, 한 번 더. 되게 하시는 주님이 어떤 주춧돌을 놓으셨는지. 때로는 의심 많은 도마가 신중한 것이다. ‘기드온의 양털’을 상기시켜주고 싶었다. 우리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 않나.

 

나의 말은 오래 된 엘피판처럼 그 음이 툭툭 끊기듯이 이어졌다. 모르겠다. 전날에 누가 왔었고, 저의 장황하고 유창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정이 나는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아서. 이렇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사기꾼과 목사의 말재간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 언변이 너무 화려하면, 그 생각과 계획이 유수 같아서 막힘이 없으면, 나는 이상하게 좋지가 않다. 좌우지간 말이 너무 많으면 말이다. 뭐 그러다보니 내 말도 길어졌고, 설교 원고는 한참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점심을 먹고 내려오자 억수로 비가 퍼부었다. 다리 밑에 거지는 눈 올 때 빨래한다고, 나는 모처럼 창틀을 닦고 창에 낀 얼룩을 닦았다. 마음이 이래저래 어려웠다. 돈도 돈이고, 그러자 궁여지책으로 주의 일을 꾸려가게 되는가. 행여 그 또한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면 어쩌나. 그게 왜 나빠요? 하고 묻던 어느 아이의 당돌한 질문이 같이 떠오른다. 그게 그러니까 나쁘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이겠다. 궁지에 몰려 주의 일을 할 수도 있겠으나 이를 궁리하여 이뤄가려는 건 옳을 리 없다. 하나님이 하시게 하자.

 

맡겨드리는 일만큼 한 순종은 없다. 나야 이제 모든 주파수가 한 채널로 고정된 패턴이라, 그러고 보니 날마다 설교 원고를 쓰는 셈이면서도 금요일이면 괜히 더 마음이 부담이 된다. 힘든데 좋고, 싫은데 하게 되고, 그게 처음부터 순종이면 좋으련만 억지로 복종이었다가…. 단락이 나뉘고 글이 구성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지는 걸 보면 신기하고 마냥 좋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으로 인도하시는 맛에 나는 글을 쓴다. 묵상글도 설교문도 그 안에 담겨가는 나의 어줍은 이야기들도 그렇듯 한데 버무려지는 게 말이다.

 

<에케 호모>를 그린 스페인 화가 엘리아스 가르시아 마르티네스(1589-1623)는 서른넷에 죽었다. 저의 벽화는 한 교회 기둥에 그려진 가시관을 쓴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에케 호모’는 요한복음 19장과 5장에 나오는 라틴어 어구로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운 뒤 성난 군중들 앞에서 ‘이 사람을 보라’고 한 말이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요 19:14).”

 

어디 책에서 읽고 찾아본 ‘에케 호모’는 익숙한 그림이었다. 그에 얽힌 내용을 따라가다 더욱 놀라운 연결고리를 보았다. 그 후 10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1719년 5월쯤. 친첸도르프는 그 그림 앞에서 발을 멈추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후 저의 회심은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의 경건주의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때, 1856년 어느 날, 영국의 시인 프렌치스 하버갈(1836-1879)은 <에케 호모> 앞에서 감명하여 <내 너를 위하여> 찬송 가사를 지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 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한없는 용서와 참 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주느냐(하버갈 작사, 새찬송가 311장).

 

이런 게 바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게 아닐까?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그 배가 어떤 배였나?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별식을 구하던 배가 아니었던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26:22).”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욕심구덩이가 아니던가. 욕망이 득실거리고 욕정이 난무하는 물욕(物慾)의 늪이었지 않나? 나는 이래서 설교문 쓰기가 신기하다. 묵상글 쓰는 게 희한하다.

 

어디로 이끄실지 알 수 없다. 동생과의 이런저런 대화는 어려운 형편과 사정으로 이어졌고, 장모 생일 축하를 위해 외조카가 모 호텔 뷔페를 예약하고 한 턱 쏘겠다는데 나는 자연스럽게 배재됐다. 못 가는 게 기정사실로 됐고, 그러면서 손위 처남댁이 새로 오픈하는 식당에도 들렀다 오는 걸로 했다. 어차피 못 갈 테지만 이제는 아예 오라는 소리도 않는 게 서운하였다가, 서글펐다가, 마음은 저 혼자 변덕을 부려댔고. 억수로 퍼붓는 빗줄기에 창틀을 닦는 건지 내 마음을 닦는 건지. 설교문을 작성하는 데 이렇듯 잡다한 사연들이 한데 섞였다.

 

그리고 완성한 게 <얼음냉수와 좋은 기별>이다. 퇴고를 하고 출력까지 끝내고 나니까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뒤미처 아이들이 왔고 나는 세 녀석을 얼레고 달래 ‘이웃, 배려’에 대해 글쓰기를 하게 했다.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하루인 것 같지만 그 안에는 계절의 변화에서부터 마음의 요동과 동생의 사연과 또 한 녀석이 그래도 다음 학기에 복학을 할 수 있게 됐다며 통화를 한 일에서 세 아이를 어르는 일에까지. 설교 하나가 버무려지는 데 실제 소요됐던 일이면서 동시에 며칠 전에 읽은 내용과 생각이 뒤섞여,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란 이런 것이다.

 

어찌 다 글로도 표현한 길이 없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그 광대한 역사하심을 두고 그저 사는 데 따른 근심으로 쩔쩔매는 꼴이라니. 오늘 아침, 완연한 가을 아침의 선선함 가운데서 나는 새삼 주의 부르심을 느낀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아! 이 사람을 보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4).”

 

곧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 그런데 도대체 넌 어딜 보고 있냐? 물으시는 것 같다. 보라! 좀 보라!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42:9, 1-9).” 그러니 좀 보라!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49:5, 1-7).”

 

그러므로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50:9, 4-11).” 말씀마다 버무려두고 계신, ‘보라!’의 이 장대함에 대하여.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52:13).” 하여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53:12).”

 

이 아침, 대체 넌 무얼 보고 있느냐? 하고 언성을 높이시는 것 같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들을 보라. 보고도 그런 마음이 그런 생각이 또 그런 말들이 나오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그럴 수 있었던 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 그 때문이지 않나!

 

동생의 생각이 단지 궁여지색이었을지는 모르나 그것까지도 주가 이루시는 데 사용하시는 것임을. 나의 이 허접한 하루 한 날의 여러 채색들이 그려내는 한 폭의 일화가 엘리시아의 <에케 호모> 벽화일지 누가 알겠나. 주가 버무리신다. 아이의 반가운 소식과 장모의 생신 날에 가보지 못하고 괜히 혼자 우울할까 염려하는 아내의 마음씀이 느껴지면서, 꾸역꾸역 설교 원고를 쓰고 있던 나의 오후는 그 어떤 경건주의 운동보다 치열하지 않았던가. 저마다 다 사연이 있다.

 

이를 한데 다 버무린 시편의 기도를 읊조린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그러나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