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전봉석 2017. 8. 14. 07:01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55:8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11

 

 

 

말씀이 내게 위로가 된다. 이게 맞나? 싶은 내 안의 여러 의문들이 나를 괴롭히더니, 주님은 내 생각과 다르시다는 거. 내가 꿈꾸고 바라는 길과 주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길이 다르다는 거.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목마름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은혜였다. 돈 없이 값 없이 주 안에 거하는 것이 복이었다.

 

시무룩한 영혼에 오늘 아침 말씀하신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11).” 딱 그러고 있었는데 어쩜 그리도 내 속을 정확하게 아시는 걸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달리 더 좋은 수도 없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아쉬워하고 속상해하다 한숨만 짓고 있을 때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지금이구나. 어느 때보다 가까이 계시는구나.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다. 참 내 맘 같지 않다. 생각은 이러저러해서 올 거다, 오겠지, 이렇게 하면 그리 될 거다, 그럼 이래야지, 했던 내 안의 분주했던 생각들이 머쓱하게 됐다. 심지어는 연락도 주지 않는 일이어서 애나 얘나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뭔가 가시적인 나의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어떤 위기감이 또는 막연한 불안이 엄습하고 있었다.

 

연락이라도 해보고 무슨 일인가 문자라도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자꾸 오라오라 하는 게 그지 같아서 말이다. 아니, 그렇듯 공들여오던 아이를 아이엄마가 보기 좋게 끊어버려서 말이다. 더는 손쓸 수 없는 지점에서 내가 이상한 건지, 모두가 이상한 건지. 여러 질문과 질문이 내 안에 가득 들어차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 말씀이 너무 좋았어. 우리만 듣기에는 너무 아까웠는데,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았어. 점심을 차리며 아내가 하는 말이 요즘 말로 ‘웃프’게 들렸다.

 

주가 하신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길을 내셔도 주가 내신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16).” 이는 모두 주를 위해서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25).” 마음이 혼잡하여 주체할 수 없이 어려웠지만 주님만 보고 하자. 이래도 계속 할래? 하는 내 안의 고약한 의문들을 뒤로 하고,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5:8).” 말씀 앞에 멈춘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어떤 일을 도모하기에 멈추고, 무엇에 대해 추론하고 유추하여 아이를 판단하고 그에 드는 마음을 멈춘다. 예수님의 목적은 다른 데 있음이다. 내 안의 빌라도가 자꾸 묻는다. 네가 왕이냐?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요 18:37).” 바로 그 진리에 대하여, 그럼 이 판국에 진리가 무엇이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고로 내가 아이를 생각하되 연연하지 않고,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주께 간구하되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며, 여기서 드는 내 안의 실망과 낙심하는 마음은 오롯이 나와 주의 문제인 것을. 그래 맞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아침부터 부산하니 의자를 더 끌어다 자리를 만들었다. 항상 누가 올까봐 커피를 내리고, 아이스크림도 사두었다. 밥을 잔뜩 하여, 일주일 내내 찬밥만 먹게 생겼다. 연거푸 맞는 매처럼 마음은 이제 눅지근하였다. 주께 이 모든 것을 맡기는 일이 이처럼 묘연한 일인가. 이제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어려웠고, 마음도 어지간하여 주만 바라는데 몸은 또 저 혼자 안절부절이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러할 때 말씀은 답이다. 곧 예배란 내가 내 자신을 드리는 일. 내 힘과 의지로는 할 수 없음을 주 앞에 고하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아침에 일찍 깨우시더니 말씀 앞에 앉히셨다. 내가 누굴 위해 이 일을 하나? 무엇을 얻고자 하나? 사나 죽으나 내가 주의 것이라면, 주님만 알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내 안에 드는 이런저런 서운함이 실체라면 그것까지도 깨어내고 털어내야 하는 일일 거였다. 머릿속에 정형화된 교회와 예배와 어떤 당위적인 마음가짐들이 실은 모두 나의 만족을 지향하는 것이었음을. 그런 와중에 아내의 말은 뜬금없으면서도 위로가 되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기도만 한다. 생각만으로는 힘에 부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내게 두시는 말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사 43:8).” 그럼 어떻게 하리까?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내가 저 아이 때문에, 이와 같은 일로, 여기서 이러고 있는 부당함이 내게 두시는 십자가였다. 단지 내 신세한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십자가였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우울해하다 우울해하는 이유를 몰라 우울해하는 꼴이 어린왕자에 나오는 어느 술주정뱅이의 푸념 같았다. 술이 깨면 부끄러워서 부끄러울까봐 도로 술에 취하는 것이라는, 나의 우울은 고질적인 나의 방어기제였다. 부끄럽고 송구스럽다는 생각에서 마치 그것을 내가 떠안음으로 충분한 변명을 삼으려고 하는 것처럼. 내 안에 싸움은 이처럼 요란하였는데 나는 최소한 아내와 딸애 앞에서 의연하여야 했다. 어쩌겠나. 서로의 영광이 다른 것을.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주님, 하고 부르다 눈물이 핑, 돈다. 그런 내게 주님의 질문은 때로 잔인하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꾸 어떤 현상이나 가시적인 효과를 기대하다 실망에 빠지곤 하는 내게 주가 말씀하신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아! 그리하여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막연하여 생각이 많은 내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하여 아이들을 생각하며 씨름하는 이 시간을 회피하지 않는다. 막연하여서 늘 마음이 먼저 저려오는 아이를 위해 기도한다. 어쩌겠나? 저도 그게 안 돼서 그러는 것을. 혹시나 나의 생각이 또 기도 한 줄이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으로 저 아이에게 흘러 나에게까지 전하여져 오는 것을.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사 55:4-5).” 그러므로 묵묵히 나는 여기에 있는 것. 오직 주의 뜻을 바라며 주께서 어찌 행하시는가, 목격자로 서는 일. 이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7).”

 

내 하는 게 너무 없으나 이것도 하는 것이라면 주만 바라게 하시기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9).” 곧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8).” 주님만 바라게 하신다. 기어이 말씀 앞에만 있게 하신다. 그러하여서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12-13).”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