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전봉석 2017. 8. 15. 06:37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이사야 56:3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3:5

 

 

 

아이 생각으로 뒤척이다 늦게 잠들었는데, 창 밖에 퍼붓는 빗소리에 일찍 눈을 떴다. 시간을 보니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아이에게서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어떻게 믿을 건지, 도움이 될 만한 책을 권해달라며 답답해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답답해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기쁨으로 다가왔다. 내가 얘한테 이런 소릴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어제 그리 우울한 마음으로 아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우린 어제 밀린 이야기를 나누듯 하루 종일 말을 했더랬다.

 

내가 보는 것을 아이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내가 듣는 것을 아이에게 보여줄 수만 있다면. 이러한 나의 답답증은 때로 조급함으로 혹은 조바심을 내곤 한다. 안 그래도 되는데, 너무 애쓰고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들, 나는 수고의 허망함에 대하여 잘 안다. 사랑하고 싶어서 혹은 사랑 받고 싶어서. 뭔가를 해야 할 거 같아서 또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그처럼 애쓰고 수고하며 찾아 헤맸던, 나의 젊은 날이 아이에게서 중첩되어 보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내가 이제 이 말씀을 얼마나 소중히 간직하는지. 무엇보다 확신하는지. 나는 아이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보여줄 수 있다면, 하고 안타까워하였다. 답답하기는 내 속도 마찬가지였다. 살아봐야 아는 삶이라면 그보다 더 고단한 게 또 있을까? 안 그래도 돼! 하고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상상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이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 같은 죄인이 오늘에 이르러 다시는 바꿀 수 없는 게 있다면 바로 그 사랑인 것을.

 

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말씀 앞에 앉았다. 아!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사 56:3).” 나 같은 게 무슨, 하고 생각할 때.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하시는 주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이방인과 같고 고자와 같아서 그저 쓸모가 없는 위인이라 생각하곤 하는데 주님은 그런 내게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좀 더 보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4).” 나 같이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나 내가 이제 주일을 지키며 주의 약속을 붙들고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내게 이르신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5).” 고자라고 해서 얻지 못하는 자녀들보다 더 나은 무엇을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신다는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교회 같고, 이름만 멀쩡한 목사로 있으나 마나 한 것 같은 나이지만 수많은 교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나에게 주시겠다는 소리다.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나 같은 게 무슨, 이방인 같기만 한 내게 말씀하신다.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6).” 내가 비록 얼굴도 들 수 없는 이방인이라 해도 나는 이제 주일을 더럽히지 않고 말씀을 굳게 지키려 할 때….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7).”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 글방 같고 교회 같지만 이에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삼으시겠다는 소리다. 나를 주의 산으로 인도하시고 내가 있는 글방에서 기도하는 주의 집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이와 같은 기쁨의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나 같은 게 무슨… 하는 열패감으로 또는 자괴감으로 시달리곤 하는 우리가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혹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는 고자일지라도, 주께서 나에게 ‘기념물과 이름’을 주어 그 이름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실 거라는, 내가 있는 그 곳을 주의 성산으로 삼아 만민이 기도하게 하는 처소로 삼으시겠다는, 이 복된 소식을 어떻게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을까?

 

주일 날 아무도 오지 않아 우울하였다. 서글픔은 때로 나의 목을 조이듯 송구하게 또는 부끄럽게 만든다. 그래 맞다. 나는 고자와 같은 목사다. 교인이 없고 성도를 생산하지 못하는 위인이다. 교회라고 하면서 이방인처럼 겉돌고 먼발치께 서서 어정쩡하기만 하다. 이게 무슨 교회야? 하고 누가 말하면 나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당신이 무슨 목사야? 하고 누가 따지면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나는 수줍은 듯 고백한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물으실 때, 나는 말한다. 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그러자 주님은 우연처럼 아이를 보내셨다. 인도 여행을 다녀오고 처음 보는 거니까 꽤 오랜만이었다. 난감하다. 무슨 말을 할까? 뭐라 한들! 과연 얘한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16).” 입을 삐쭉거리며, 이런 얘길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고 볼멘소리를 하듯 주님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 나의 마음을 치라고 하셨다. 막연하여서 또는 하나마나 한 소리일 거 같아서, 아이가 그만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하고 있을 때였다. 엉덩이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다리는 저리고 그만 눕고만 싶어 하고 있을 때, 나도 나를 치고 먹여야 할 어린 양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17).” 저녁 시간을 넘겨 나 또한 들어가 쉬었으면 하는 시간이었다. 낮 동안 이야기가 겉도는듯하더니 비로소 물꼬를 튼 것처럼, 아이의 눈빛이 또 표정이 관심이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째로 물으셨다. 나는 근심하여 ‘주님이 아십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내 양을 먹이라.’ 주가 이르셨다.

 

이런 말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은데도 하게 하시는 이가 하게 하셨다. 아니 더 간절함으로, 아이에게 내가 보는 것을 들려줄 수만 있다면 또는 내가 듣고 있는 것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돌아와 급 피로감에 몸을 뒤채다 잠들었는데, 아이의 ‘그런 문자’가 들어와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내게 그 어떤 기쁨보다 크게 다가올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이 아침, 말씀으로 연관 지어 ‘이방인 같은 내게, 고자와 다를 바 없는 내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넌지시 다시 물으시는 음성을 듣게 하실 줄이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그럼 그 아이를 생각해라. 사랑해라. 기도해라.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것을 해라. 말씀하시는 것 같다. 아! 지금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 이것이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3:5).”

 

믿음에 대해 의문이 들 때 읽을 만한 책을 권해달라는 아이에게 나는 성경을 읽자. 거기서 먼저 요한복음을 읽자고 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우리가 이해하고 깨달아 알 수 있는 게 믿음이 아니었다. 다만 받아들일 것이냐, 어떤 의문을 품으며 걷어찰 것이냐. 거기에 주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

 

아, 내가 지금 느끼는 걸 아이에게 전해줄 수만 있다면. 졸필이지만 나는 나의 묵상글을 읽어주기를. 내가 무엇을 붙들고 씨름하는지. 하루하루 나는 또 얼마나 엉터리 같은, 이방인으로 고자로 떠돌며 살고 있는지. 그럼에도 주님이 벌레만도 못한 나를 또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아이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안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자라오면서 나를 보았다. 십여 년 전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오늘에 이르러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이 미천한 나를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살아서 열심을 다해 살면서 추구하고 애써 수고하고 노력한들. 그리하여 명성을 얻고 출세하고 성공하여 더 이룰 게 없을 정도로 만족함을 누린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아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위인이 되었다 한들. 저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저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로 살다 죽었다면. 그 모든 영광이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주의 진리로 나를 인도하소서. 그리하여 나는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비록 거지로 살고 저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나 연명하며 헌데를 앓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 살았다 해도, 저는 항상 주와 함께 하며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하는 자로 살았다면….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로 살다간 저의 삶이 영광되다. 그 어떤 영웅보다 값어치 있다. 저는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렀음이다.

 

내가 아이를 생각하는 일은 나의 하찮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정도여서, 나의 기도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라 해도.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4).” 나의 큰 기쁨 되시는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나의 완악한 마음을 녹이시고 무가치한 삶을 돌이켜 주의 성산에 이르게 하신 이가 나의 보잘것없는 기도 한 줄을 가지고도 아이를 돌이켜 세워 값지고 소중하게 사용하실 것을. 주님이 나보다 몇 억 만 배는 더 나를, 아이를 사랑하심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