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전봉석 2017. 8. 17. 06:15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이사야 58:11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편 45:6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누구나 그렇겠으나, 무엇을 선택하여 십년씩 두어 번의 세월을 흘려보낸 적이 있었으니 나로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87학번으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97학번으로 신학 학부를 다녔으며 09학번으로 신대원을 마저 마친 셈이니까, 그 터울이 족히 강산이 한 번씩 세 번은 변하였던 것과 같다. 무 자르듯 그렇게 선명하게 선을 그어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으나, 예수를 믿는 믿음에 전부를 걸어도 되나? 싶었던 건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던가 보다.

 

두려움은 막연하고 모호한 게 아니라 사실이고 구체적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문맥적으로만 보면 예수님도 두려워하셨다. 이들마저 떠나려는가, 싶으셨을까? 저들이 누구던가? 예수를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던 자들 아니었나?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15).” 그런 그들을 예수님이 실망시키셨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41).”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란 말인가! 우리는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왔는데 주님은 자꾸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 당장의 병 고침과 배고픔과 수많은 압제와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자를 바라는데 엉뚱하게도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니, 이게 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곧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48).” 당장 살 궁리를 해도 모자랄 판에 죽으러 간다니까 하는 소리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44).” 제자들도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갈등은 내 안에 들어차는 의심의 넝쿨줄기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60).” 망설여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61).” 결국 사람들은 떠나갔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같은 복도에 있는 교회의 젊은 목사가 ‘작은 도서관’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지난 주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들려준 말을 실제 자료를 찾아 들고 온 것이다. 이후로 나는 자꾸 묻는다. 주님, 어떠세요? 최소한 나는 세 번을 미적거림으로 족히 30년을 돌아온 사람이라, 내 임의로 무엇을 선택하기에는 이제 두려움보다 책임에 따른 문제가 앞선다. 내가 가진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 가운데 하나는 자연스러움이다. 억지로 내가 무엇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그리 연결하시고 이끄시는 것이다.

 

97학번으로 신학을 다시 공부할 때도 나는 싫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생면부지의 사람을 동원하여 나를 설득하고 학비까지 지원하게 하면서 결국 공부를 끝마치게 하셨다. 물론 그것도 미덥잖아 걷어차 버린 주제이지만, 내가 망가뜨리면 하나님이 다시 복원하셨다. 그러는 동안의 불순종의 세월이 얼추 십년씩이었으니 이제는 가히 짐작이 간다. 작은 도서관에 대한 정보를 훑어보기 전에 나에게 두시는 마음이 어떠한가, 하는 거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어떠하신가? 그러므로 교회가 할 일인가? 그럼 나는 감당할 수 있겠나?

 

예수님의 역설은 놀랍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요한은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 대충 들은 바를 아내에게 말하자, 전도에 좋겠네! 하고 단순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책을 보러 온다? 그 안에서 같이 책을 읽고 글쓰기를 가르치고 누구와는 대화를 하면서, 주님이 증거 될 수 있다? 그러게! 어떨까?

 

나는 또한 주관적일지 모르지만 복음 전도를 빙자하는 손익계산을 경계한다. 영혼구원을 기치로 내세우면서 실은 자기 살 궁리를 하는 게 모름지기 사람이다. 마치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우선하여 추진하려는 게 주를 나타내는 것이라 하지만…. 그래서 카페를 차리고 빵집을 운영하며 학원을 경영하면서 교회를 운영하는 일에 대하여 나는 좀 위태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물며 그 뜨거운 열정으로 멀리 저 타국으로 나가려고 하는 선교에 대한 열망도, 글쎄. 난 잘 모르겠다. 결국은 ‘먹고 살자고 하는 짓’에 함몰될 위험이 크다. 물론 그게 아니라고 나름의 원대한 포부를 갖고 시작하겠지만….

 

그럴 때보면, 포기는 새로운 희망이다. 한 알이 밀이 죽어야 산다는 역설의 말씀을 오래 머금고 있었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눅 22:36).” 그럼 어쨌든 사람들의 왕래가 있을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그 쓰임이 보람되고, 그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아내의 말은 이어졌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꾸 묻는데, 내 생각은 유보였다. 내가 포기해야 할 것과 포기하기 싫은 것과 포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생각이 명석하게 돌아갔다.

 

한데 새벽 일찍 깨우시곤, 오늘 아침의 말씀이다.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사 58:1).”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들어앉아 있을 것인가?! 그리 물으시는 것 같기도 하고. 이에 대해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어제 메모해둔 말씀이 하필 이때 눈에 띄었다.

 

나는 워낙에 우유부단한 사람이라, 이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던가 아니면 유야무야 없던 일로 하시던가. 다만 이제 나의 기준은 교회다. 교회다울 수 있는 건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이다. 인위적인 계산에 의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타나시게 하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날 위해 일하시게 하는 것. 무슨 일에서든 안 그렇겠나만 교회란 특히 그 목적이 우선이고 전부인데,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 곳이다. 그 대표가 기도다. 성령을 일하시게 하는 일. 이는 사람을 이롭게 하자는 것도 아니고 무슨 지역사회를 운운하며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으로 전락해서도 안 된다. 결단코 사람이 먼저가 아니다.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오후께 모처럼 어느 아이가 문자를 주었다. 요즘 유독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갈구하고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청년 서넛이 모여 글과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사업을 도모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그게 뭔지 묻지 않았다. 돌아오는 마지막 주일에 예배 끝나고 찾아와도 되냐고 하는 걸 마다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아이의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열심에 대하여는 전에부터 경계를 주고 있었다. 사업에 대한 얘길 나누고 싶은 모양인데, 나는 세 가지 ‘가짜 믿음’에 대해 짧게 설명해주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이니까 좋은 믿음.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나은 것 같고, 다른 여느 종교보다 하나님이어서 괜찮은 것 같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사는 데 따른 위로와 의지를 삼으려는 실용적인 믿음. 마음에 평안을 도모하고 뭔가 삶에 활력을 얻는 것 같은, 같은 값이면 하나님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믿는다고 여기는 신념을 확고히 하는 믿음. 자신이 아는, 그래야 하는 당위적인 하나님으로 그 하나님은 나의 믿음을 저버리거나 배신할 리 없다는 주관적인 믿음이다. 뭐 더하자면, 그래서 보편화시키려는 객관적인 믿음도 문제이겠으나.

 

아이가 뻘쭘해하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아이가 도모하고 있는 사업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섬기는 교회 목사를 초대해 개업(?) 예배도 드리고 그때 주신 말씀을 신줏단지처럼 여기며, 뭔가 뜨거운 열정으로 주의 뜻을 따르려는 듯한 각오와 다짐과 바람에 대하여 나는 크게 응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도 와야 오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고착돼서 ‘또?’ 하는 심정이었다. 이를 밖으로 티를 낼 수는 없는 것이고. 한데 내 안에서 ‘그럼 넌?’ 하고 되묻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 뭐.

 

사람은 믿을 게 못된다. 나에게 나를 포함해서다. 베드로의 열심이 베드로를 실망시켰다. 가룟인 유다의 열망이 저를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 기어이 예수를 떠나게 하였다. 다들 예수님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실은 사람 때문이다. 자기 자신들 말이다. 영혼에 대한 무슨 대단한 열정으로, 당장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굴면 영락없다. 사람은 믿을 게 못된다. 하나님의 일을 도모한다고 하면서 손익계산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물론 나의 위신과 처지와 그렇듯 고상을 떠는 명분에 대해서도.

 

어느 순간 이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사람은 하늘을 향해 종주먹을 휘두른다. 다 당신 때문이다. 그런 내게 오늘 말씀은 큰 위로이면서 동시에 나의 위선을 흔들어놓으신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 얼마나 좋은가? 누가 액자로 선물한 성경구절이기도 하다. 한데 이 말씀이 나온 흐름에는 나의 가식과 아집과 몰염치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4).” 어떤 열심이든 내 목소리를 상달하려는 게 아니다. 이어지는 5절에서 물으신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행색은 온전히 '주를 바라는' 것처럼 굴지만, '주가 바라시는' 게 아니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6).” 그리고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7).” 곧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8).” 그러므로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9).”

 

이어서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10).” 한 마디로 내가 여기 있는 건,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하셔야 할 일이니까,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이 우선이어서 사람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이 차이는 엄연히 다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 144:3).” 내가 돌보다 나은 게 무언가? 내가 짐승보다 나을 게 무언가?

 

우리에게서 주의 형상을 빼고 나면 오히려 돌보다 못한 것을. 짐승만도 못할 것을. 이에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 왜냐하면 내 안에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 끔찍이 사랑하신 성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성령 하나님이 거하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나? 마리아가 고결한 것은 그녀 안에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셨기 때문이다. 고로 저는 다만 계집종일 뿐이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8).” 그런데 저를 신봉하는 무리가 이래로 파다하였으니, 저가 하늘에서도 민망하기 그지없겠다. 고로 우리가 ‘거룩한 나’인 까닭은 주께서 내 안에 계신 까닭이고, 이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 45:6).” 하는 증거로 삼고자 하심이었다. ‘작은 도서관’이라…. 글쎄. 하나님이 어찌 이루어 가시려는가. 나는 다만 가만히 있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예수를 바라보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