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57:19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시편 44:20-21
종일 비가 내렸다. 여느 날과 같이 글방으로 올라갔다. 민수기 22장 ‘발람의 이야기’를 읽었다. 저의 얄팍함이 나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의 추대와 주어지는 물질에 혹한다(4, 7). 더 높은 고관들과 영예에 넘어간다(15). 그럴 때면 얼마나 영적인 사람처럼 보이는지 모른다.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숙하니라(8).” 밤이 늦었다고 저들을 환대하고 주께 여쭈어보겠다며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감추었다.
하나님의 의중은 분명하셨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12).” 그런데 저들이 다시 오고 더 큰 영예를 가져오자,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19).” 다 알면서도 말이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18).”
어쩜 그리도 내 마음의 비밀과 같은지.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다. 참 재밌는 대목은 미련한 저를 일깨우는 게 부정한 짐승 나귀였다(레 11:1-8). 나귀에 대해서는 대속이 필요하다(출 13:13, 34:20). 그 사체는 힌놈의 골짜기에 내다버려야 한다(왕하 23:10, 대하 28:3, 33:6). 우리 삶에 유용한 동물이지만 부정한 짐승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것을 구속의 주 우리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타셨다(마 21:2-7). 부정한 것도 주께서 쓰실 때 성결한 데 사용된다.
영적으로 우리의 그릇됨에 대하여, 주의 대속하심이 없다면 하등에 쓸모가 없는 존재인 것을 생각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빗줄기가 약해지면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오후 내내 몸이 좀 아팠다. 약을 먹고 파스를 붙이고 누워 존 스토트의 <제자도>를 읽었다. 그 사이 아이에게서 긴 장문의 문자가 들어왔다. 짜증 섞인 내용이었다.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그냥 선생인 나를 좋아해서 그리 믿는다고 여기는지. 또 선생은 어째서 자신의 생각에 삶에 마음에 딴죽을 걸듯이 지지를 하지 않는지. 뭐가 그렇게 선생을 바꾸어놓은 것인지. 대체 그 하나님이 뭐기에…. 긴 문자를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읽을 때마다 답을 하고 싶었다. 할 말이 많았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일일이 지적하며 지금의 생활에 대해 나무라고 싶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답을 보내지 않았다. 할 말은 앞서 한 것으로 충분하였고, 나는 아이의 짜증을 당연한 반응으로 이해하였다. 성령이 오실 때 우리 안에 평안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 혼란이 생긴다. 여태 괜찮은데 왜 사사건건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가. 남들이 뭐라 하는 이 없는데, 오히려 주체적이고 주도적으로 나를 실현하는 삶으로 옳게 여기는 것을 (물론 세상 문화는 지지하는데) 누구보다 이해해줄 선생이, 그 선생의 하나님이 자꾸 죄책을 마주하게 하는가.
그 심정을 알겠다. 안타까움에 울컥, 눈물이 핑, 돌기도 하였다. 주께서 다루시기를. 성령께서 시작하실 일,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아이를 붙드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사 57:19).” 이 아침, 주께서 말씀하시는 앞에 고개를 숙인다.
누구를 생각하고,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나는 더할 것이 없다. 주의 이름 말고는 붙들 수 있는 게 없다. 늘 싱거운 듯 그만그만한 아이의 무덤덤함 앞에서, 또 했던 말 더해도 늘 그 모양인 아이에게, 들을 때 발끈하고 돌아서면 도로 그 자리로 이끌려가는 아이와, 나름 알아서 더 나은 교회를 찾아가는 아이에게. 나는 가만히 아이들 이름을 수첩에 적으며 뭐라고 할 말을 잇지 못하였다. 마음이 우울한 것도 같고, 속상한 것도 같고. 세차게 퍼붓는 빗줄기만큼이나 몸은 혼곤하여 안 아픈 데가 없었다.
부정한 나귀를 존귀한 것으로 사용하시는 데는,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것이지만 이에 주님이 오셔야 존귀와 영광이 더해지는 것 아니겠나. 버려진 듯 마구간 말구유에 지나지 않던 게 주님의 침상이 되었듯이. 가난한 고깃배에 지나지 않던 게 주님의 말씀을 받아내는 강단이 됐듯이. 온갖 흉악한 죄인들의 죄악으로 얼룩진 십자가가 거룩한 보혈의 증거가 되었듯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아니면 내가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무슨 수로 주 앞에 이끌 수 있을까? 아이의 짜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자를 읽고 다시 또 읽으면서 나는 주의 이름을 불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성소수자에 대해, 채식주의니 나름의 다양성에 대해 저들의 논리와 판단이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으며 훨씬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일이 아니겠나. 나의 반박은 논리적으로도 빈약하고 외골수처럼 광신적이다. 어째서 하나님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 먼저다’ 하는 구호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시는 것일까?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사 57:12).” 마치 고상을 떨 듯, 이 사람이면 내 목숨도 내어놓을 것처럼 사랑한다고 굴지만, 혹은 어떤 가치와 기준에 대해 절대 변하지 않을 것처럼 여겨 고집을 부리지만, 그런 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어려서 그러했던 것을 얼마나 유치하게 여기곤 하는지. 그러므로 우리의 절대란 말이 얼마나 가치 없는지를.
“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 네가 행한 일이 네게 무익하니라(13).” 오늘 본문은 강한 어조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아,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시 44:20-21).” 나도 모르는 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나를 잘 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생은 알아줄 줄 알았던 것이고,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줄 줄 알았던 것이다.
주 앞에 선다는 일은, 곧 성령이 오신다는 건,“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15-16).” 가까이 여겨 늘 곁을 주었던 사람은 물론 나를 나의 원수로 돌리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 아이 마음에 서운함이 그득한 것도, 어떤 짜증이 또 화가 밀려나오는 것도 당연하였다.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나는 이제 안다. 부디 주께서 붙드시기를. 또 한동안 그것으로 서운하여 담을 쌓게 하지 마시고….
그래서 성경을 읽어보겠다고 하는 아이의 말이 다행이었다. 기뻤다. 소망이 있었다. 우리는 단순하여서 사는 날 동안 주님만으로 충분한 사람이었다. 결코 우리의 생명이 넉넉한 데 있지 않음을.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남들 다 사는 앞서 우리 스스로 어찌 독불장군처럼 굴 수 있겠나. 그저 광신자로만 보일밖에. 아이의 항변도 그거였다.
어느 교회는 또 무슨 목사는 동성애를 옹호하더라. 누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희락을 주장하더라. 즐겁게 신나게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면서 사는 게 축복 아니냐. 누군 그렇더라. 누군 저렇더라. 하던 아이의 항변이 귀에 쟁쟁하다. 그러니 넌?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주님은 사람들이 어떻다더라 하는 덴 관심이 없으셨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 8:27).” 그러자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28).” 그들의 생각이 분분하다.
그럼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29).” 왜 선생님만 그래요? 하는 아이의 말에 나는 성경을 내세웠다. 하였더니 저들도 다 자기들 나름의 성경을 들고 그러는 거 아니냐? 하는 반박에 논리와 이해로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문제여서, 나는 다만 고백할 뿐이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뭐라 한들. 끊임없이 근거도 없는 평화를 갈망하고, 눈도 없이 보이는 것을 말하며 혀도 없는데 할 말만 되풀이 하는 꼴이라서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중간은 없다. 중도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든 세상이든, 육으로든 성령으로든 둘 중 하나다. 나는 아이의 짜증을 사랑한다. 부디 그 짜증을 묻어버리지 말기를. 그 불편함으로 주 앞에 서기를. 기어이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비로소 들을 수 있는 귀와 고백할 수 있는 혀를 간직하기를.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시 44: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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