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전봉석 2017. 8. 18. 07:1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이사야 59:1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편 46:10

 

 

 

괴성을 지르고 온갖 욕설을 퍼붓는 아이의 발악에 잠이 깼다.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여름 날 새벽 막바지 구성진 참매미 울음소리가 아직 어두운 사위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내가 수업을 마칠 때쯤 들어왔는데, 수업 내내 잠들었던 아이가 짜증을 부리며 신경질을 내고 있던 것이다. 아니 그걸 다 받아줘? 나는 어이가 없었다. 본래 막돼먹은 건 알았지만 공부하러 온 거고 상대는 선생이지 않나! 아내도 당황한 듯 혀를 끌끌 찼다.

 

그 부모와 아이가 벌이는 일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서로 싸울 땐 막말을 하고 주먹다짐도 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런 애를 보듬어주며 건사하는 게 우리 일이기는 하겠으나, 나는 아내가 그 정도로 시달림을 당하는지는 몰랐다. 알아듣게 야단을 치고, 안 되면 손을 떼야지. 아이엄마한테도 알리고 그만둬야지. 어떻게 그걸 다 받아줘? 나는 아이가 돌아가고 아내를 다그쳐댔다. 아내는 아이를 변호하듯 오늘 뭐 때문에 화가 나서 저런다며 두둔하였다.

 

그러니 참, 사람이 징글징글하다. 애써 더 신경 쓰고 건사하며 한다고 한 애가 덜컥, 그만두었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 집구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의, 사람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 부모의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된다. 애도 답이 없다. 부글부글 속이 끓는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나! 나름 공들였던 마음이 크면 클수록 억울함은 더한다. 그 부모야 우리가 상종할 위인들이 아니지만, 어떻게 아이들조차 그냥 그렇게 끝, 아무 일도 없던 게 되는 것일까?

 

이러면 안 되는데, 가정예배를 드리며 나는 골난 심정으로 마음이 뚱했다. 정주지 말아야지, 거기까지 더는 애쓰고 마음 주지 말아야지. 사람종자 참 몹쓸 것들이다. 난 사람이 싫다. 치가 떨린다. 사랑하기 싫고 정주기 싫다. 친절한 타인으로 그 정도 선에서 서로 웃고 마는 정도면 족하다. 공연히 자꾸 마음을 두게 하시고, 돼도 않을 일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야 우리 일이니까 그렇다 쳐도. 왜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자꾸 화가 났다. 다 털고 사람 상대하는 일, 그만하고 싶었다.

 

그렇게 불편해하다 잠들어서 그런가.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악을 써대며 기를 쓰고 달려들던 아이의 울부짖음이 사라졌다. 공허한 마음으로 앉아 말씀을 붙든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사 59:1).” 아! 왜 하나님은 가만히 앉아 잠자코만 계시는가? 하고 투덜거리던 마음을 아셨는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순종뿐이다. 순종이 안 되면 같은 길에 있는 복종을 해야 한다. 복종은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하여야 하는 일이다. 만약 우리에게 가난을 두지 않으셨다면 저런 꼴을 당하면서도 아이를 품으려 했을까? 다 돈 때문이야! 먹고 살자고 이 짓이라도 해야 하는 거야. 나는 볼멘소리를 하듯이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하긴 돈이 좀 있었으면 당장 때려 치고 어디 내려가 땅이라도 일구며 사는 게 제격일 텐데. 그냥 다 그만두고 싶다. 아이들한테 정나미가 떨어지고 그 어미들의 몰상식한 작태가 치를 떨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가난은 복종의 채찍이 되는 것이다. 나는 고상을 떨 듯 아내를 훈계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게 어떤 건지 잘 안다. 아이들 비위 맞추고 그 엄마들의 몰염치에 변죽을 울려줘야 하는 일이란, 말 그대로 간 쓸개 다 빼놓지 않고는 못한다. 나는 이제 교육비를 받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과감히 ‘안 돼!’ 하고 말할 수 있다. 돈 받고 하는 일이었으면 돈 때문에도 그렇게 못할 것을. 아이가 늦게 와서는 글 주제가 맘에 안 든다며 다른 걸 쓰면 안 되냐고 짜증을 부렸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갈 때 점점 유용하다. 그럼에도 저를 위해 기도하게 되는 마음이 어찌 내 마음이겠나. 꼴도 보기 싫은데, 아예 상종을 하기 싫은데, 그럼에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를 아이와 아이의 가정을 두고 주께 아뢰는 일.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 나는 자꾸 먼저 상처를 받고 혼자서 냉가슴을 앓는다. 어떻게 그러고 살아? 앞으로도 숱한 사람을 상대해야 할 사람이! 아내의 나무라는 소리가 꼭 주의 음성 같았다. 엎친 데 덮친다고 잠이 들려 할 때 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런저런 사연을 늘어놓고 결국 약속한 날 또 못 온다고 했다. 그럴 줄 알았다. 답을 보내지 않고 미뤄뒀다.

 

큰일은 큰일이다. 자꾸 사람이 싫으니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애가 뭐라 문자에 답이라도 주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공들여 마음을 주었던 것만 억울하게 됐다. 하긴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린다고 해서 일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진이 빠진다. 연거푸 묻기를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나? 하는 환멸만이 밀려든다. 본래 흙으로 만들어져 그런가,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만 싶다. 먼지처럼 풀풀 숨어버리고만 싶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할까? 졸라봐야 소용없는 걸 빤히 아는데.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그래서 화가 나는 거였다.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지만 실은 나의 이익과 어떤 보람을 앞세웠던 거였다. 앞서 주님은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43).” 주의 이름으로 바라고 구한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다. 내가 아이를 못 견뎌하는 건 그게 나인 까닭이고, 치를 떨며 사람의 위선과 몰염치를 욕했으나 실은 그게 어쩌지 못하고 사는 나의 본질이었다.

 

그러면서 허울 좋게 주의 이름으로 구하고 바라지만 그 이면에는 나의 영광을 바라는 마음이 항상 우선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우리 기도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막을 수도 있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 때는 대체로 내가 보기에 나쁜 때였다. 나를 쳐 복종시키는 일에서, 그러라고 하나님은 여실히 가난을 또는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놓으신 거였다. 그러니 고상을 떤들 저들의 위선이 내 것이었지 않나. 저 아이의 막돼먹은 태도가 또 그 어미의 몰상식과 몰염치와 몰지각이 고스란히 나였지 않나.

 

정작 나만 나를 모르고 있었다. 1980년대부터 인간 DNA 연구가 시작되어, 2000년대에 이르러 게놈 프로젝트라는 이중나선구조 형태의 DNA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한 과학자가 재밌는 연구를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의 세포 하나를 문자화한다면 31억 개의 문자로 조합이 이뤄지는데, 이를 하루 12시간씩 꼬박 읽어간다면 총 31년이 걸려야 다 읽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문자 하나하나가 약화돼 빈틈이 생길 때 아이가 생태적으로 미숙하게 태어난다거나 사람이 살면서 암에 걸리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 세포 수억만 개를 가지고 매일 매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기이한 현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저 단세포적으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며, 당장의 일에 굽실거리기 일쑤인데. 그러니 우리가 구할 것은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시 46:1-3).” 어떻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다.

 

먼지처럼 훌훌 날아가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에도,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말이다. 나 혼자 애태우며 저 애를 생각하고 위하여 기도한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저런 걸 두고 뭐라 이르고 다독인들 뭐가 달라질까 싶다가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왜냐하면 그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저들을 어찌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저들을 통해 지금 우리를 건사하시는 일이 주님의 관심이신 것을.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9:21).” 주의 영이 아니시면 우리는 단 한 시도 살 수 없음을. 살아도 그게 사는 게 아니었음을. 결국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1).” 아, 그리 두시는 까닭은 다 그 까닭에 맞는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2).” 그런 내가 누구를 뭐라 하고, 감히 내가 뭐라고 저를 판단하고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주의 편지라. 그의 향기라.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할 수 없는 거였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위로부터 받은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이구나. 인간의 DNA로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넣으셨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고개를 돌려 주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아니면 우리가 무슨 힘으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주님도 날 위해 십자가를 지셨건만 나는 무엇 주느냐? 찬송가 가사가 떠오른다(새찬송가 311장). 그래 맞다. 우리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내 의지와 노력으로는 헤쳐 나갈 수 없는 것임을. 오직 주만이.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애를 보지 말자. 환경과 여건 때문에도 말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그래야만 감당할 수 있다. 내가 감당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하시게 하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서럽고 답답한 일뿐이지만, 곁에 두신 아이를 그 부모를 사랑하는 일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닮아가는 일이었다.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사 59:12).”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곧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낳으니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13-14).”

 

아, 주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