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전봉석 2017. 8. 19. 07:12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이사야 60:20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시편 47:6

 

 

 

찬송은 거듭 생각나고 흥얼거리며 누굴 마주하면 묻지도 않았는데 자꾸 말하고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장대한 자연 앞에서의 놀람 같이 또는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의 보고 또 봐도 시들지 않는 시선처럼, 왜 좋은지 뭐가 좋은지 어째서 좋은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좋고 또 좋은 것이다. 기도란 그런 것이어서 생각으로 마음으로 수시로 하나님께 말을 건네는 일이다. 미주알고주알 아뢰고 구하며 내 안의 모든 걸 숨김없이 주께 내어놓는 일이다. 그럴 때 언제부턴가 내 이야기는 줄어들고 누구를, 기도할 수 없는 저를 대신하여 주께 구하고 아뢰게 된다.

 

딸애가 올해로 꽉 채우면 4년을 다닌 선교단체를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으로 옮긴다. 이를 위해 같이 기도하고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지만 애가 타지는 않았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하고 기도하는 정도의 반에 반도 안 되게 딸애나 아들애에 대해서는 다소 무심하게 하신다. 우리 아이들을 신경 쓰고 집중하느라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 생각하고 기도하는 일이 소홀해질까봐 그러시는가, 딸애는 이어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총신대 입학관리부서로 출근하게 되었다.

 

전 주에 다녀온 외숙모 일가의 가게 가운데, 카페 매장을 맡아주었으면 하는 제의를 받았었다. 매니저로 전담하여 그리하면 보수도 그렇고 앞으로 어떻겠다, 하는 그림이 제법 그럴듯해보였다. 서로가 잠시 저울질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아닐 거였다. 주일을 지키는 일에서도 그렇고 사역의 한 몫으로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본인도 이를 생각한 것인지 저들의 제안에 그리 귀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곤 흔쾌히 감사하게 되는 새 직장으로 주가 인도하신 것이다. 보수도 반 토막 나고, 소위말해 계약직이라는 불이익도 있겠으나.

 

찬송은 의지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저절로 알 수 없는 무엇에 의한 이끌림이다. 누가 장대한 폭포 밑에서 의지적으로 작정을 하고 놀라나? 나도 모르게 와! 하는 탄성이 먼저 앞서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생기는 이상한 증상은 어려움이 어려움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산 넘어 산이라고 우린 그 산을 없애달라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보면 그 산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 넷이 그만뒀으니 아내의 시름도 깊다. 나가야 할 건 늘었는데 들어올 건 얼추 백만 원이 모자라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와중에 찬송을 운운한다면 너무 인위적이지 않을까? 설령 억지로 탄성을 지른다고 해서 그건 이미 감탄이 아니다. 경탄은 하나, 둘, 셋 하고 시작되는 게 아니다. 저절로 와! 하고 입이 쩍, 벌어지는 게 찬송이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게 하신다.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 60:20).” 우린 남들처럼 해와 달을 의지하며 그 빛에 살고자 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언제나 숭고하면서 구구하다. 구차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이를 벗어나게 하신다는 것인데.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저의 특징은 두신 바 그 자리에서다. 산골 깊은 수려한 자연 속이든, 길가 참 흙먼지를 뒤집어 써야 하는 곳이든,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돌 틈 낭떠러지 언덕배기든 저는 자신의 생명을 다한다. 맡김이다. 두신 이에 대한 경외는 묵묵히 그 생에 충실한 것이다. 더불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일찍이 우리에게 이와 같은 자유를 주시려고 때론 우리에게 촘촘한 고단함도 용인하신다. 저 하늘의 새가 자유로울 수 있는 까닭은 그 날갯짓의 정도와 비례한다. 무던함이란 그 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의무를 준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찬송이다. 재고 따지고 의미를 부여하여 인위적으로 준비 땅,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시 47:6).” 억지로 그게 되나? 저절로 그리 되게끔 ‘억지로’는 갈등을 소멸하는 힘이 있다.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7).” 그러기 위해 우린 ‘지혜의 시’를 짓는 시인이다. 하루 매 순간을 한 편의 시로 또는 한 컷의 영상으로 혹은 멜로디로 담아내는 게 예술이다. 돌아오는 주일은 아버지가 오시는 날이어서 설교 원고를 따로 작성하지 않았다. 덕분에 하루가 헐렁했다. 오후께 아이들이 안 와 이상하다 싶었는데 영어마을 캠프를 간다는 걸 뒤늦게 생각하였다. 아이들을 기다리다 머쓱해져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였다. 복도까지 닦아내고 나면 땀으로 곤죽이 된다.

 

그럼에도 시를 짓는 일처럼 한 운율, 한 마디에서 주를 바람이었다. 교회가 든 자리이지 않나. 교회 곁의 사람들이지 않나. 교회 안에 머무는 사람이지 않나. 찬송이란 하나님으로 인해 번져나는 덧정이다. 이런저런 근심이 떠나지를 않지만 그 근심의 날갯짓이 자유함으로 내연을 확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남들이 보면 보잘것없겠으나 우리 가족은 딸애의 계약직을 여느 정규직 대기업 입사보다 축하하였다. 그 뒤의, 새가 나는 하늘이 자유로운 것처럼 되어지는 모든 일 뒤에는 하나님이 배경으로 계시었다.

 

찬송이란 이를 만끽하는 것이다. 새가 하늘을 날며 날갯짓을 연연해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분명 고단하고 힘에 부치는 일이기도 하겠으나,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그리하여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2-3).”

 

다 저녁에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가 몸이 좋지 않고, 다 다음 주일에 아들애도 들어오고 하니까, 그 주일에 오시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얘길 더 나누는데, 아무래도 곧 또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사연이었다. 마음이 어려우면서도 ‘광명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것도 알 수 없는 감사로 여겨지는 것이다. 궁핍하여 궁색한 삶의 번거로움이 분명하지만 이상하게도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곧 주가 이루시고 다스리심을 확신할 수 있는 자유다.

 

우리의 기도가 서로를 향하는 까닭은 내 안에서 주의 영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인위적이지 않고 억지스럽지 않다. 저절로 그리 되는, 찬송과 같은 것이다. 경탄처럼 와! 하는 내 안의 어떤 놀람 혹은 부름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높은 산에 오르면 야호, 하고 외쳐 부르는 본능과 같아서. 기도는 저 시원을 향해 손을 모으는 일이다. 이러저러한 상황을 말씀하시곤, 그렇게 알고 기도 좀 해라! 할 때의 그 자명한 우리의 일이 사명이었다. 사역이란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시선을 두고 주님의 입을 빌어 주님의 손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찬송의 다른 표현이고 말이다.

 

찬송이 안 되는데 기도라고 되나. 기도가 되면 그게 찬송이었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시 47:1).” 당연한 의무다. 의무가 의식될 때 힘이 들어간다. 고달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본래의 의무는 다 스며들어 구분이 따로 없다. 오늘 시에서 화자는 그 즐거움을 함께 해보자는 것이다. 청유다.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와! 하는 경탄 속에는 어찌 표현할 길 없는 경외감이 묻어 있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2).”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