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예레미야 3:23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편 56:10-11
교회란 나다. 내가 교회 된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그때 베드로가 고백하였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나의 고백일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이를 알게 하신 이가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따로 구분하여 불러낸 자 된 이가 교회다. 교회가 모여 교회라 불린다. 우리는 주의 지체를 이룬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고로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왜냐하면 내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19).”
아이는 일이 있어서 예배를 못 온다고 했다. 가까운 교회에 나가 그래도 예배를 드리라고 하였다. 그러겠다는 답이 한밤중에 왔으니, 예배를 참석했다는 건지 그러지 못했다는 건지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종일 우울감이 또는 쓸쓸함이 휘감아댔지만, 이처럼 속상해하는 것도 미련일까 하여 안 그러려고 하는 게 속상하였다. 아내와 딸애에게 우리가 교회임을 우선하여 말씀을 전하였다. 어느 교회를 다니느냐가 아니라 어디서 교회가 되느냐 곧 교회로 세우심을 받았느냐 하는 점을 말이다.
전날에 나누었던 대화도 있고 해서 딸애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딸애를 살피느라 아내는 여느 날보다 수다스러웠다. 미련을 두지 않게 하시려고. 오롯이 주만 바라보게 하시려고. 교회를 이루어간다는 말, 이는 내가 주 앞에 바로 서는 일로서, 그러므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후 6:17).” 말씀을 음미하였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울컥, 마음에 어떤 서러움이 일었다. 그래서 나만 주를 바로 의지하고 붙들면 되겠는데, 자꾸 교회가 걸린다. 저 아이가 또 누가 이를 어쩌나, 싶은 마음이 조바심이 답답함이 인다.
하나님의 뜻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이게 좀 되겠다, 저리 하면 가시적인 뭔가 나타나겠다, 하는 기대는 항상 보란 듯이 허무신다. 사람에 대해 또 어떤 바람을 두고 하나님은 마치 나와 힘겨루기를 하시는 듯하다. 번번이 가로막는 것도 같고. 살 수가 없어 주를 부르면 가만히 위로와 또 평안이 되시면서 왜 어떤 성과는 좀처럼 기대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일까? 청교도 혁명가 당에서 활동하다 잡힌 존 밀턴은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 실명이 됐다. 아내와의 이혼에 두 번째 부인과의 사별. 실명한 후 15년, 55세 그는 세 번째 부인 엘리사벳의 대서로 12권의 대작 <실낙원>을 지었다. 이후 운명하기 4년 전 62세에 <복락원>을 지었다. 1671년도이다.
이런 여정을 가만히 보다보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도를 알 것 같다. 여기가 목적이 아니다. 보편적인 우리가 그 대상이 아니다. 바로 너, 나를 향하신 주의 섭리는 때로 잔인하면서 끈질기다. 존 밀턴이 붙든 말씀이,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이를 실명을 하고 15년이 지나는 동안에야 마주할 수 있었다니!
시무룩하게 앉아 시름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가 이런 내용의 글을 읽으면 부끄러울 정도로 소름이 돋는다. 고작 나는… 하고 이어지는 생각이 어찌 비교가 안 돼서 말이다. 궁극적 구원의 목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명하지만 진행 중이다.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누가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도다(사 33:9).” 하나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35:1-2).”
이 믿음, 오늘 내가 붙들 것은 이것뿐이지 않나. 아이를 생각함으로 때론 괘씸하여 고약한 서운함도 불만족도 가득하지만, 이를 회복시키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내가 저를 구원할 수 없다. 한 영혼을 돌이킬 수도 없다. 나는 다만 그러면서 그 애간장 녹이는 시간을 통해 나를, 교회를 이루어가는 일이었다. 어디 좀 숨었으면,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시 55:6).” 하고 생각할 때가 한두 번인가.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7).” 그러고 싶고, 충분히 그러고 있다. 그런 거 보면 하는 것도 하나 없는 사람이 이런 말하기가 참 쑥스럽기는 하다.
오후께 아내는 어느 자모와 길게 통화를 했다. 목회는 당신이 한다. 나는 기꺼이 인정하였다. 하나 같이 문제가 있는 아이들만 모으시는 걸 보면, 어찌 대처를 해야 할지 그 답은 하나다. 그리하시는 하나님만 바랄 뿐. 얼레고 달래는 일이 어디 아이에게만 소용 있나. 그 부모는 더하여서 문제 있는 부모에서 문제 있는 아이가 있다. 아이를 보면 그 부모가 보인다. 살아온 내력을 잠깐 들려주는 데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뭔데 그런 소리까지 할까? 싶을 정도로 내밀한 가정사가 들춰진다.
어떻게 해야 해? 아내의 난감함은 내 것과 다르지 않다. 거기가 교회가 되는 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교회인 것과 그러므로 교회를 안 다니는 또한 다녔었던 아이와 아이 부모에게 교회가 되어주는 일. 이게 그러니까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단 말인가. 말 그대로 ‘공수래공수거’와 같다. 이럴 거면 왜 여기로 교회를 오게 하셨나 물었더니 그리 연결이 되었다. 어찌 알았는지 글방이 교회라는 것과 교회가 글방이었다는 데 반응한다. 물론 주일에 자리를 채우는 것은 아니지만, 신기하게 하나님이 붙이신다. 한 녀석은 다른 덴 다 끊어도 여긴 다니겠다고 하니 것도 이상할밖에.
구구한 사연이야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이 피폐하고 황망한 상황들이라 어찌 말로다 할 수 없다. 우리 코가 석 잔데 우리 코가 석 자여서 저들 코가 넉 자인 게 안 됐다. 신기하지? 내가 죽겠는데 내가 죽겠어서 저가 죽겠다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기시니까 실낙원이 보이고, 사지육신을 떼어놓으시니까,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3).” 그 부모의 마음을 이와 같은 말씀으로 붙드시고, 저의 마음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말씀으로 붙잡으셨다. 1982년 호주 벨버른 한 목사의 가정에서 닉부이치치는 태어났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때론 환장할 노릇이다. 고난으로 우리를 기도하게 하신다. 하여 이와 같은 고백을 갖게 하신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참 신기하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 하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고난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아이의 사연은 구구하였고 그 상황은 절박하였다.
우리는 교회라. 나는 아내와 딸애 앞에서 나 들으라고 더욱 큰 소리로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어느 기독교 신문에서 교회가 망하기 전에 나타나는 증상 열다섯 가지를 적었는데 거짓말처럼 전부 우리 교회가 해당되었다. 어떤 근거로 그리 강조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런 교회는 가지 말라는 소리니까, 그렇기는 하겠다 싶었다.
전도에 열을 올리고 한 사람이라도 더 오게 하려고 환경을 표정을 기도를 바꿔야 한다는 등의 애씀이 가상하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오지 않는 교회가 교회일까? 나는 생각이 많다. 그러면서 말씀을 주시는 건 전혀 얼토당토 않는다. 나는 아내에게 당신이 목회를 하네, 하고 말하면서 머쓱하니 웃었다. 모르겠다. 어떤 교회가 안 망하는 교회고 그러자니 망하지 않게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하는 것인지. 그럴 거면 왜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했을까?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나는 과감하게도 그리 나를, 우리를 세워 가시는 게 교회라고 증거 하였다. 외형적인 건물이 또 사람이 어떤 시스템에 잘 운영되는 그런 교회도 포함이 되겠으나, 그게 내가 아니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정작 하나님의 관심은 나다. 온통 나다. 나에게만 관심을 쏟으신다. 그러느라 저의 눈을 멀게도 하고 사지육신을 떼어서 보내기도 하신다. 당연히 저주와 원망이 들끓어야 하는데서 온전히 주를 바라는 마음이 자라가게 하시니까, 나에게는 그게 늘 아이러니하다.
결국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이를 더하시려는 것일까? 오늘 말씀은 분분한 내 마음에 방점을 찍는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렘 3:23).” 작은 성과도 큰 성과도 아니다. 작은 교회도 큰 교회도 아니다. 여기도 저기도 아니다. 내가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다. 정작 그 구원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심으로 그것이 최종 목적이었다.
고로 다윗의 기도는 지금 내게 딱 시의적절하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10-11).” 사람도 아니고 어떤 희망도 기대도 아니다. 말씀이라, 주를 의지함이라. 하여 나는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민망하고 때론 송구하기 그지없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않으리.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 그래 맞다. 그렇구나.
저는 나에게 곤비한 땅의 큰 바위 그늘이시라.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사 32:2).”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더 무슨…. 내가 주의 성전에서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는 것처럼 위로를 얻는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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