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전봉석 2017. 8. 29. 06:46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예레미야 4:19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편 57:7

 

 

 

주님의 능력을 바라고 주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주를 원하는 게 우선이었다. 주님의 도움도 없고 어떤 능력도 행하지 않으시더라도 주님이었다. 여실히 주님으로 만족함을 얻기를 기도하였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주님이 그러하심과 같이 나 또한 그러하다. 그러하여서 주님만으로 나의 구주 삼고 살기를. 그럴 수 있는 것이 나의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지나간 것에 대하여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되어진 새 것을 붙듦이다. 이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20).” 그래서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하였구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필 그 시간에 전기가 단전되어 전철 운행이 중지되었고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였던 아이는 오지 못했다. 누가 왔으면 싶다가도 아무도 오지 않아 좋았고 어디를 좀 갔으면 싶다가 아무 데도 가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한다. 이런 나를 아내는 염려하였고 그러든가말든가 성큼, 가을이 다가왔다. 춥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고 오후 내내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나의 자연적인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으로 안도한다. 나의 만족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다행이다. 그 모든 배후에는 주님의 섭리가 있고 주의 뜻을 헤아려 알 수 있는 영이 항상 내 안에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오류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주의 도우심이 이루어지는 게 아닌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모든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이시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계 3:14).” 내가 주도하고 하나님이 끌려오는 형국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만물보다 먼저 계신 만유의 주님이시다. 나는 무엇을 놓고 기도하며 이루어지길, 도와주시기를 바라다 ‘그게 아니더라도’ 곧 그리하지 않으실지라도 주의 뜻을 온전히 구하며 설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니까 몸에 밴 나의 요구와 바람이 그릇되었음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를 구하였구나.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가 거기 있었다.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하나 다 뜻이 있었다. 기도는 내가 무얼 구하지만 그 너머에 계신 주를 바람이었다. 순종이란 그런 내가 주의 뜻을 행하려는 수단이었고, 거룩이란 이와 같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작동되는 모습이었구나. 믿음이란 묵묵히 듣는 일이었듯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걸 마치 ‘스스로 돕는’ 역할로 삼으려 했으니 나의 믿음이 얼마나 고단하였나. 착하게 사는 걸 거룩으로 여기었으니 나의 수고가 단순하였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내가 아는 나의 믿음 이면에는 어마어마한 주의 권능의 영이 함께 하시는 거였다.

 

그래서 순종은 주의 뜻을 이행하려는 바람이었구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억지춘향’이 순종이 될 수는 없었다. 내 안에 계신 영이 그와 같이 이루시는 게 순종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결국 내가 이루는 것은 주를 바라는 일뿐이구나. 온통 사위가 어둡고 요란하게 퍼붓는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하였다. 주께서 그리 하신다.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말이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이런 말씀을 읽고 메모하며, ‘아 그렇구나!’ 하고 있는 나의 경탄이 곧 신비한 거였다. 그러니까 말이다. 선물은 받기만 하는 되는 일을 어째서 그처럼 재고 따지고 묻고 재확인하느라 시간을 지체하고 있던 것인지. 주님을 먹고 마시는 게 나의 일이었는데 말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나의 하루는 지루하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고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이셨구나.

 

사는 게 때론 고단하기도 하여서 얼마나 더 여름이 가고 또 여름이 와야 하나, 생각을 놓치기도 하였다. 내가 주님을 닮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 사는 일이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여겼는데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였다. 이때 거룩은 모방이 아니라 증여다. 내 안에 오시는 것. 연합을 이룬다는 게 그것일 테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이제야 이 원리가 뭔지 조금은 알겠다. 내가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 오후께 이 말씀 앞에 얼마나 안도하고 감사할 수 있었는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듯 휴, 하는 만족감이 일었다. 살면서 사는 데 따른 고단함에 대하여는 그때마다 울리는 주의 경고음이었던 것을.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 4:19).” 때로는 돈이 또는 건강이 사람 관계가 이해가 엉뚱한 사건이 툭, 불거져 ‘경보를 들음이라.’

 

누구는 그래서 더 주를 멀리하지만 그래서 나는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데 한 발짝 더 다가오게 하시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내가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게 중요하였다. 그러자고 가난도 슬픔도 고통도 허용하시는 거였는데, 나는 그것으로 더욱 주님을 밀어내려고만 하였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내 안에 계신다는 소리 아닌가. 그런 걸 내가 어디 가서 거룩을 도모하고 무엇으로 순종을 흉내 내며 어떤 입술로 찬송을 대신할 수 있을까. 나의 뒷발질이 고달프기만 하였구나.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11:42).” 다른 수 없다. 마주하는 것마다 말씀뿐인 것을. 이로써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8:29).”

 

뭐 하나 변변한 게 없다 해도 그것으로 주가 내 안에 계신 것과 나로 하여금 주만 바라게 하시는 것을 새삼 감사하였다. 옆 사무실 직원이 와서 관리비가 너무 많이 청구되는 것 같다며 내게 어떤 동조를 구하는 것 같은데, 사는 데 따른 비용은 죽기까지 거듭될 거였다. 때론 부당하게 청구되고 때론 횡재를 한 듯 좋다고 여겨질 때도 있겠으나, 나는 더 이상 그 말이 가깝게 다가오지 않았다. 왜 저가 내게 와서 저런 말을 하는가, 이상하게 여겨질 따름이었다. 다들 몸서리치게 바쁘다. 말에 말이 이어지고 사람에 사람을 줄지어 만나고 일에 일은 끝이 없고,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고단하기만 하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 될 줄이야. 그러므로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렇지. 그래 맞다. 전광석화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나의 생애 어느 부분에서도 그렇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때론 내가 그릇 행하여 곁길로 갔을 때도 주님은 나를 외면하신 적이 없다. 분명히 마음은 어렵고 여러 생각에 골머리가 지끈지끈한데 어째서 넉넉한지 모르겠다. 결코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다.

 

예레미야는 이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렘 4:14).” 이에 화답하기를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 새벽 같이 깨워 일어나 앉히시더니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아멘을 하게 하시는구나. 이것으로 새 힘을 얻고 남은 길을 가게 하시려고.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그것이었다.

 

누구의 말을 들어주는 일. 혹은 저를 생각함으로 주께 아뢰는 일. 바라고 구하여 주 앞에 내가 바로 서는 일.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감당할 수 있는 거였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런 걸 보면 늘 죽을 것처럼 쩔쩔매기 일쑤였으니까. 결국은 나를 겸손하게 하시려는 거였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6).” 성급한 판단이 아니라 진득하니 주를 바라며,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57:9).” 왜냐하면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10).”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