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전봉석 2017. 9. 1. 07:3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예레미야 7:3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편 60:12

 

 

 

아이에 대해 더는 내 맘 같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한다. 이 절망은 필히 거쳐야 하는 단계로서 서로의 성장을 위한 도약이 된다. 아이는 일정한 부분 어릴 때 가지고 있던 부모에 대한 의존적 죄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모로부터의 간섭과 그것으로부터의 독립 사이에서 죄책감이 붙든다. 그러나 아이는 딛고 일어서야 하고 부모는 과감히 놓아주어야 한다. 독립된 개체로써 주님을 마주하는 자리로 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에 실패할 경우 ‘어른아이’로 살거나 다 큰 아이들을 품에 끼고 살려는 고약한 늙은이가 되기 십상이다.

 

눈이 빠지게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녀석은 같이 들어온 여자 친구가 짐이 많다며 저를 데려다주고 온다고 늦었다. 나는 어떤 서운함에 휘감겼다. 그런데 우스운 건 얘가 기껏 내 앞에 왔을 때 나는 왜 뜬금없이 싸한 것인지, 슬그머니 안정제를 깨물어 삼켜야 했다. 나의 연약함에 대하여는 늘 하는 말이지만 어찌 감당이 안 된다. 그러면서도 태연한 척 군다. 유아기적 부모에 대한 죄책감은 필시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그럼 안 돼, 하고 이른 것을 바르게 이행하지 못했을 때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한 데 대한 죄의식. 부모를 거역했다고 하는 죄책감. 자신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는 자책이 성숙을 돕는다.

 

한데 이 유아기적 의존 관계는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독립을 모색한다. 그러느라 반항이 늘고 사춘기라고 하는 거역의 늪을 통과하는 것이다. 이를 예수님에게 적용할 수 없는 것은 죄가 없으시니 죄책감도 없으시다. 하지만 인간의 그런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예가 성경에 나온다. 열두 살 되시던 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동행중에 성전에 남아 선생들과 묻고 답하느라 그 부모와 떨어지셨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

 

하지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49).” 이때에 사람의 근심은 숙명이다. 자식으로 인한 게 아니라 사람으로 사는 데 따른 마음의 일이다. 이를 어린 주님은 바르게 지도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여기서 볼 수 있는 유아기적 의존적인 ‘어린이의 법’에서 독립하는 모습이다. 곧 부모의 근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어린이의 법이다. 성인이 된다는 건 이와 같이 어린아이 적의 법에서 놓여나는 일이겠다.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아내는 애 들으란 듯이 내가 놔야지, 자꾸 붙들지 말아야지 하면서 혼잣말처럼 궁싯거렸다. 부모의 근심이 될 수 없다는 어린아이의 법이 유아기적에 바른 인지능력을 향상시키지만 필연적으로 죄의식을 동반하며 그 굴레에서 벗어나 어른이 된다. 부모 또한 더는 미련을 두지 말아야지, 자신의 근심을 무기로 하여 끝까지 아이를 쥐고 있으려는 데서 서로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에서 적용된다. 성도를 향한 목회자의 마음도 그렇겠다.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없는 부분에서 근심은 기도하게 하는 매개가 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2).” 사람으로 사는 일에서 근심은 숙명이다. 하나 어떤 근심은 영적 성숙을 위해 필연적이다. 사실은 아이가 들어오기 전에 아내와 그런 얘길 좀 나누었다. 언제까지 품에 끼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인데, 그 근심하는 마음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나 그것으로 아이를 붙들 수는 없다. 아이는 우리 품을 떠나 독립된 인격체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이를 마음에 둠으로 새로운 관계가 형성하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눅 2:51).” 나는 마리아의 이 마음을 묵상이라 생각한다. 묵상이란 주 앞에 내려놓는 시간이다. 마음이고 자세다. 맡겨드리는 일의 무던함이다. 그것으로 때론 속이 볶이고 안달이 나고 조바심이 일지만, 이를 통해 성장해 가는 것이다. 어찌 아이만 성장하겠나. 죽기 전까지 우리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 일이고 이를 향하여 무던함은 진득하게 주만 바라게 하는 것이다.

 

그런 거 보면 버려야 할 죄책감이 있고 끝까지 도움을 주는 죄책감도 있다. 쓸데없는 양심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데 가령 성경을 안 읽었다는, 혹은 누구를 위해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어떤 상황에서 내가 그리스도인답게 대처하지 않았다는 죄책이 나를 당위적으로 몰아가 외식하는 자가 되게 하거나 또는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 동시에 선한 자책이 되어 주를 바라고 구하는 데 바르게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사람에 대한 죄책이냐 하나님께 향한 죄책이냐의 차이겠다.

 

누가 봤으니 저가 나를 어찌 생각할까, 싶은 자책은 나를 외식하는 자로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 부족하고 부끄러워 주의 도우심을 바라게 하는 자책은 성장을 돕는 죄책감이다. 더 무서운 건 이를 묵살하는 것이다. 묵인하거나 암묵적으로 자신을 길들여가는 타협이 그것인데 그러므로 생겨나는 자기합리가 그 대표적인 반응이다. 내 안에 이는 죄의식을 깡그리 무시할 때 맹목적인 광신자가 되거나 모든 신경이 마비 된 자기 좋을 대로의 신자가 되기 십상이다.

 

중2 아이 두 명이 글을 써서 ‘저작권’ 관련 주제의 공모전에 보낼 거였다. 한 아이의 글은 수정하여 다듬어서 어지간해졌는데, 한 아이의 글은 어디에 내보이기가 좀 그랬다. 같이 읽고 문장을 다듬으면서 나는 갈등했다. 그럭저럭 고쳐서 그냥 보낼까 아니면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해주고 이번에 응모하는 걸 포기하게 할까. 기일이 하루 전이라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때, 아이에게 상처가 되더라고 그리 해야 할지 또는 그냥 유야무야 좋게좋게 이끌어야 할지. 실망하는 아이의 표정을 보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아니 그러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더 나을 것 같았다. 결국 한 아이의 원고만 보내는 것으로 수업을 마쳤다.

 

싫든 좋든 나도 아이도 여기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이는 선생에게 부끄럽게 됐다는 동시에 자신이 좀 더 성실하지 못했다는 죄책을 이겨내야 한다. 나는 아이를 실망시켜 낙심하게 했다는 죄책과 함께 내가 좀 더 일찍 원고를 봐주지 못한 데 대한 죄책이 든다. 그렇다면 먼저 원고를 전송하고 뒷자리에 물러나 있던 아이는 괜찮을까? 그렇지 않다. 혹시 자기 때문에 시간이 늦어져 친구의 원고가 뒤로 밀려서 그렇다는 죄책에 사로잡힌다. 이렇듯 죄책은 사람으로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어떻게 상처 없이 살 수 있겠나. 문제는 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누군 더욱 주를 바라고 주만 의지하며 살고, 누군 더욱 강퍅 건조해져 그 마음이 황량하며 무책임해지고, 누군 유아기적 의존적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어른아이로 산다. 신앙을 성장시키지 못하는 이유도 다양하지만, 성경의 기본 질서는 고난이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러므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병적으로 소심하고 예민한 사람이라, 나는 더러 안정제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쩔쩔매면서도 그리하여 주를 바란다. 자식들의 일로 이러저러한 마음이야 별 수 없는 노릇이고, 어쩌면 저 아이들은 나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없을 텐데 나 혼자 아이를 생각하면서 어려워지는 마음을 어쩌겠나. 얜 요즘 어디서 뭘 하는지, 신앙생활은 아예 담을 쌓고 사는지. 어떻게 연락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나는 아이를 생각하다 주의 이름을 부르곤 한다.

 

이를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하는 말씀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내가 주를 온전히 바란다는 건 또한 다른 면에서 일반 사람들처럼 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죄의식에도 빠지게 한다. 친구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고 옛 선생에 대한 배은망덕한 처신은 아닌지 되묻고는 하면서. 이와 같은 갈등은 죄의식은 자책은 필연적으로 사람이기에 감당하며 살아야 하는 일이다.

 

다들 커서 더는 예전처럼 뭐라 쥐어흔들 수 없는 데서 오는 무력감은 그러므로 나를 더욱 주님께 의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삶으로 사느라 겪는 고난과 주를 바라며 더욱 주께 의존하려는 데서 오는 고난은 다르다. 죽겠다 죽겠다하면서도 살겠는 것이다. 누군 좋다 좋다하면서 죽겠는 것이고, 서로의 결이 다른 고난은 죄의식의 무게에서도 현저히 나타난다.

 

이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렘 7:3).” 오늘 말씀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게 나의 허접한 죄책감을 일갈하신다. 나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것. 좌고우면하지 말고 일희일비하지 말며,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그러할 때 '내가 너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하시는 주의 음성이 뚜렷하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시 60:12).” 내가 싸우는 게 아니다. 내가 아이를 구원할 수 없듯이 내가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11).” 내 안에 이는 온갖 근심과 걱정이, 거짓 부끄러움과 유아적인 죄책감이 나의 대적이다. 주께 아뢰기를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그러므로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