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예레미야 5:24-25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편 58:11
아이와 같이 왔으면 한다고 동기 전도사의 문자가 들어왔다. 다음 날 시간이 어찌 되는가 물었다. 하필 점심 때 초등학교 아이들 수업이 있고, 뒤미처 아들애도 필리핀에서 들어오는 날이라, 시간이 좀 그렇다고 말하였다. 어디 직장에 취직을 할 거 같아서 그럼 아무래도 당분간은 찾아보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런다는 이유였다. 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요양원에 면접을 봤던 모양이다. 말끝에 이어지기를 아무래도 생활비라도 벌어야 해서요, 하는 말이 깊은 한숨과 같이 올라왔다. 요는 돈 때문이다. 남편 목사 사례비로는 충당이 안 되는 것이다.
사는 데 드는 비용이 사역을 쥐고 흔드는 것인데, 이제 세 살 된 아들은 어린이집에 맡기고 아무래도 자신도 벌어야 할 것 같다며… 문자와 문자 사이에 시름이 깊었다. 나 역시 요 며칠 어디 싼 이율의 대출이 없나 하고 여기저기 알아보면서, 살아서 충분한 돈이란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멀리 있는 주인의 지시는 명확하게 알아듣기 힘든 법이다. 당장 피부로 와 닿는 돈이 우리를 지배한다. 돈은 죄의 총량의 무게다. 돈은 항상 수치심과 죄책감을 동시에 전달한다.
이 땅을 살면서 돈이 곧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부러움은 우리 안에 죄의식을 불러낸다. 나의 궁색한 변명이 하나님의 자리를 옹색하게 한다. 돈 앞에서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신 것 같다. 뭐라 하시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세상에 사는 동안 나는 그 부조리와 무관할 수 없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동기 전도사를 생각하였다. 내 신세도 처량하면서 그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요양원은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일하기에는 좀 그런데. 혼자 생각이 길어졌다.
이 땅에 살면서 돈 앞에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아니면 빌라도처럼 자기와는 상관없는 듯 멀찍이 설 뿐이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고상을 떠는 것이다. 어떤 책임으로부터 회피가 있을 뿐이다. 그런 자신을 무마하려고 꾀를 낸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요 19:19).”
어쩌면 사역자도 이와 같은 숙명을 동시에 가지고 사는지도 모른다. 직업이 무언가 묻는 질문에 나는 목사라는 말을 할 때마다 민망하였다. 그래서 꼭 덧붙이기를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말했다. 스스로 명패를 붙여 다는 식으로, 좀 무마가 될까 하여. 가난과 장애가 죄는 아니겠으나 수치심과 죄의식을 동반하는 것은 사실이다. 직업을 묻는데 무직이라 말하기는 그렇고 목사라고 말하려니까 궁벽한 변명이 필요한 것 같고, 그리하여 써서 붙이기를 ‘유대인의 왕이라.’ 안 해도 될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난 뒤 동기 전도사와의 문자라. 그 내용이 참 절묘하였다. 사역을 감당한다는 일은 동시에 수치심과 죄의식을 이고 지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모면하려니까 저들도 그 앞에 명패를 해서 붙이는 것이다. 신학박사, 어디 무슨 대학 헬라어 전공, 무슨 협회 이사 등등. 세상과 다를 게 없으면서 더욱 교묘하게 자신의 죄책으로부터 한 발 비껴서는 것이다. 누가 누굴 인도하며 누가 누굴 구원으로 이끈단 말인가. 저들끼리 명패를 앞세워 손을 씻는다. 어디 무슨 집회를 광고하면서 그냥 목사가 아니라 그 앞에 붙는 수식이 화려하였다.
다른 무기는 비난이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하는 식으로 남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것이다. 어디 두고 봐! 하는 식의 복수어린 칼날을 숨기고, 때론 빈정거림으로 또는 단정적인 언도를 구사하면서, 마치 그런 세상과 자신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이런 표현이 맞는가 모르겠으나, 나는 목사가 되고 ‘빌라도 증후군’을 앓고 있다. 내 안에 이는 죄책감을 저들에게 돌리려고 한다. 마치 나는 한없이 고상해야 할 것처럼, 저들과는 다르다는 신념으로.
모르겠다. 사는 데 드는 비용에서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전에 딸애한테 들었다. 선교단체에 설교를 부탁 받고 오신 목사님이 사례비가 든 봉투를 받으면서 말했다. 저희 교회가 어려워서 염치없지만 그냥 받겠습니다. 나는 그때 괜히 마음 한편이 어려웠었다. 의당 그냥 받던가, 아니면 되돌려주던가. 왜 저는 그와 같은 소릴 하였을까? 돈은 그런 것이다. 마땅한 노동의 대가를 운운하지만 그 앞에서 수치심과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조금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질이 의심된다.
남들처럼 요구하고, 남들보다 더 억척스럽게 깎고, 벌고, 모으는 따위의 일은 아무래도 그렇다. 돈은 엄연히 죄로 인해 비워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통화로 쓰인다. 두 말할 거 없다. 죄의 결과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그리스도인으로서 돈을 벌 때마다 또는 필요로 할 때마다 수치심과 죄의식이 드는 것은 마땅하다. 세상 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다면, 오히려 이를 추구하고 산다면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러니 어디 사역지를 찾을 때도 사례비를 먼저 저울질하게 돼 있고, 사는 데 따른 비용을 값으로 환산하여 얼마쯤의 보장을 바라고 요구하는 일은 허다하다. 돈 앞에서 순수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모처럼 강한 수치심과 자괴감이 들었다. 하나님 앞에 입을 댓 발 빼물었다. 입을 삐쭉거리며 울먹거리는 아이처럼 앉게 되었다. 어찌 죄의식 없이 이 땅에서 살 수 있겠나.
도대체 우리의 마음을 막고 있는 게 무언가? 오늘 말씀은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다.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 5:24-25).” 사느라 여념이 없을 때,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잊는다. 마치 내가 처음부터 고상하여 고상한 줄 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을 잊었다.
왜 그런가?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사는 날 동안 수치심과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겠으나, 이를 스스로 무마하려고 명패를 달고 또는 사람들 보란 듯이 그 앞에서 손을 씻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놓고는 너무 빨리 간증을 한다. 진리의 한도를 거기까지 정해놓고, 등급을 매겨 금리를 책정하는 은행들과 다를 게 없다. 바라던 게 이루어지면 간증이 되고 바라던 대로 안 되면 슬그머니 폐기처분하고 마는, 도대체 무슨 진리가 증시처럼 널을 뛸까?
무던히 또 묵묵히 주만 바라는 마음으로, 부디. 그래서 자신의 약함을 아는 사람이 가장 강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곧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15:43).”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고후 11:21).”
그래 맞다.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다. 이리 말해놓고 어찌 다른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시 58:11).” 주가 이루시게 서둘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며 겸손하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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