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전봉석 2017. 9. 2. 07:23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예레미야 8:18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편 61:2

 

 

 

실로 인생이란 갈등을 기초로 한다. 칡 갈(葛)자에 등나무 등(藤)자를 쓰는 이 글자의 구성만큼이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참으로 얽히고설켜 어찌 감당이 안 되는 듯하다. 우리 애들도 다들 장성하여 사귀는 아이들이 있었으니, 어쩜 이렇게 마뜩치가 않을까. 일찍 서둘러 병원에 갔다 온 아들 녀석이 무슨 말 끝에 여자 친구 이야기를 내놓았다. 오래 전 저들 부모는 별거를 하였고 몇 해 전에 기어이 이혼을 하였는가보다. 어찌 살았고, 누구랑 살고 있으며, 이번에 졸업을 하여 한국에서 어디에 취업이 된 것인지.

 

이른 점심을 먹고 녀석은 약속이 있다며 휑하니 집을 나갔다. 아내는 어쩌다 일찍 서둘러 수업까지 끝낼 거였는데 허전하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오시는 주일이라 설교원고를 작성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무실들이 모두 비어 오롯이 나 혼자 오후를 보냈다. 쨍하니 파란 가을하늘이 팽팽하였다. 폴 트루니에의 <죄책감과 은혜>를 새로 읽었다. 그게 참 신기하지? 여느 날보다 두 배는 외로웠다. 오후께 초등학교 아이 둘을 다독여 ‘저작권’ 관련 주제로 글을 쓰게 하였고, 한 아이의 원고만 간신히 시간에 맞춰 전송하였다.

 

그러게. 나는 무엇을 평가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자꾸 아이에게 들은 누구에 대해, 어떤 일에 대해, 혹은 앞으로의 사정에 대해 나도 모르게 평가하려 든다. 이는 참 고약하여서 예수님은 직접 언급하셨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 7:4).” 먼저는 나를 돌아봐야 할 일이다. 이에 성경의 헤아림은 필연적이다.

 

먼저는 함부로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가만 보면 비난은 상습적이다. 점점 더 화력이 세지고 거침이 없다. 남에게 총구를 겨누는 일은 무자비하다. 그래서 다음은 함부로 아무 말이나 주워 듣고 삼키지 말라는 것이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막 4:24).” 얼마나 귀가 얇은지 모른다. 혹하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누가 뭐라면 금세 귀 기울여, 그런가? 하고 현혹된다.

 

그래놓고는 자기 무장을 한 나의 미련함은 무지하기만 하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잠 27:22).” 그래서 헤아림의 세 번째 주의는 내 것을 내어주는 것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누구에 대한 평가를 또는 판단을 칼끝으로 휘두르지 않으려면 이와 같이 충분한 헤아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경하시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어주지 말라는 게 아니다. 그러기에 앞서 내 눈 속의 들보를 빼내라는 것이다. 나는 같이 기도하기를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였다. 주님의 마음이 아니면 도무지 탐탁치가 않아서, 앞서는 나의 판단과 기준을 주체할 길이 없다.

 

예수님은 격노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주님의 격정적인 비난은 화해와 용서보다 직설적이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15).”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 일인지.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16).”

 

두 아이가 다 늦는 바람에 아내와 둘이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말했다. 다들 커서 각각 자신의 하나님과 마주하며 살게 두어야 한다. 때로는 근심이 또 조바심이 우리를 못살게 굴지만 이는 전적으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 아이들을 채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두 아이의 삶 가운데서도 함께 하실 것을 믿으며. 나는 아내를 다독이는 것인지 나를 두고 마음을 다지는 것인지 의아하였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23).”

 

행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이와 같은 꾸지람에도 정신이 번쩍 들지 않는다면 심각하다. 이를 어찌 내게 두시는 말씀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나? 내 안에 외식함에 대하여는 사람을 의식하고 나의 만족을 우선하는 마음이 그것이지 않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뜨끔한 것이다. 제 눈의 들보를 빼내지 않는 자의 특징은 분명하다. 죄인이 결백을 주장한다. 결백한 사람도 죄인 취급을 한다. 누구를 끌어들여 자신의 허물을 덮는다. 정보화시대를 살면서 내남없이 우리는 모두 재판관이 되었다.

 

서슴없이 판결을 내리고 언도한다. 누굴 평가하고 판단하여 무차별 선고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 때는 내가 받은 은혜를 마주할 때이다. 누구를 뭐라 하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은 내가 더했다. 모름지기 나는 더했다. 주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감히 지금 얼굴도 들고 살지 못할 텐데, 누가 누굴 가늠하고 평가하고 언도한단 말인가. 아이에 대해 또는 그 모든 상황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계속 생각하다간 오늘 예레미야의 심정이 내 것이겠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렘 8:18).” 미숙한 어른이 채근하고 보채 아이를 휘어잡으려 든다. 은혜를 잊으면 비난만이 난무하다. 남을 향한 비난은 가장 손쉬운 자기방어이다. 나는 그럼 어쩌면 좋을까?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 61:2).” 그게 어디 한두 번인가. 나는 날마다 매 순간을 그러하다. 그러므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3-4).” 달리 어디로 숨을까? 무엇으로 위로를 삼을까?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렘 8:7).” 이런 황망한 때를 지나오지 않았던가.

 

‘은혜에 대한 감각이 없을 바엔 죄에 대한 감각도 없는 게 낫다.’ 적어둔 메모가 의미심장하다. 누구에 대해 뭐라 하고 판단하여 비난하는 걸 일삼는 얄팍한 나의 죄의식이 은혜를 소멸한다. 이에 방어적인 기질은 ‘양심의 마비’다. 누구를 비난하는 쪽이나 누구에게 비난을 받는 쪽이나 가장 손쉬운 자기 안의 반공호가 마비된 양심인 것이다. 그래서 노예무역선 선장이었다가 목사가 된 존 뉴턴이 말했다. 나도 그 수렁에서 은혜로 건진 바 된 사람인데, 저들이 아직 수렁 안에 있다고 내가 비난할 수 있겠나!

 

그렇구나. 은혜의 감각을 잃을 바엔 죄에 대해 무감각한 게 더 낫겠구나. 함부로 칼을 휘두르듯 누구를 판단하고 평가할 일이 아니다. 그것이 은혜를 막는다. 나의 결연한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킬 수 있다. 나의 목소리가 아이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런 얘기를 아내와 나누었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 일찍이 우리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개별적이면서 직접적이지 않으셨나. 아이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기도할 뿐, 주가 이루신다.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렘 8:15).” 그러니 어쩌겠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시 61:1).” 주께 아뢰고 구하는 일.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7).” 아이를 위해 기도한다. 누구에 대한 비난이나 평가가 아니라,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