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전봉석 2017. 8. 31. 07:35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를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는 땅으로 만들리라

예레미야 6:8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편 59:17

 

 

 

확신이 덜하면 아이의 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여기서 확신은 아이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 아이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다. 나의 부모는 나를 어찌 키우셨을까? 뜬금없이 이어지는 생각은 그 속이 오죽하셨을까? 싶은 데까지 이르러서 혼자 어려웠다. 걱정이 걱정을 낳고 근심이 근심을 잉태하는 형국이라, 아이에 대한 마음은 어찌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기껏 공항에 나와서 다른 데 정신을 파느라 비행기를 놓쳤단다. 어쩌다 그리 됐는지 대충 알겠으나 더는 묻지 않았다. 마침 다음 날 같은 시간대 비행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페널티가 물고 거의 편도 값으로 새로 끊은 셈이다.

 

스물넷 그리고 스물일곱. 훌쩍 커버린 아이들 앞에서 가끔 나는 어지럽다.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이 쓰이는데 이를 일일이 뭐라 할 수도 없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혼자 속만 끓이는 게 한둘이 아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나의 부모가 나로 인해 겪었을 고초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참 말 안 듣고 제멋대로 굴던 자식인데 어떻게 저들은 그 긴 시간을 견뎌내셨을까? 지금도 여전하시겠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로 성경을 읽었고, 십계명에서 새삼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간곡어법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여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온통 나와 하나님 간의 일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가 명령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신 5:7-21).”

 

이렇듯 나와 너의 구분이 뚜렷하다. 지극히 개별적이며 구체적이어서 누구를 향하신 말씀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오롯이 하나님의 마음은 내게 향하신다. ‘나’에게 ‘너’는 이인칭일까, 삼인칭일까. 삼인칭일 때 계명은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지만 이인칭일 때 그 대상은 나로 한정되고, 일인칭으로 가져올 때 나와 너는 하나가 된다. 나의 이 모든 건,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가 된다. 나는 노트에 옮겨 적고 오래 머물렀다. 하나님께 나는 어떤 다른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나다.

 

하나님의 마음은 간단하였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29).” 주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고, 나를 위하시는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께 향한 것이었다. 이를 일상화시킬 것을 다음 장에서 말씀하고 계셨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4-5).”

 

들을 때 사랑할 수 있다. 듣는다는 건 믿고 순종하는 것을 내포한다. ‘쉐마.’ 이를 야고보 사도는 단언하였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들어 스밈으로 하나가 될 때 들음은 온전하게 된다. 믿음이 들음에서 나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일차적으로 귀로 듣는다. 그러기 위해 입을 다문다. 다른 곁가지를 쳐낸다. 주의를 기울인다. 듣는다는 건 상당히 적극적인 관여이다. 그저 들리니까 듣는 게 아니다.

 

또한 듣는다는 것은 스밈을 전제로 한다. 햇살이 창가에 듣다. 스밈은 그 온기가 질량과 무게가 동시에 같은 점에 있는 것이다. 순종은 그래서 자연스러워야 하겠다. 그 안에 자유가 있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그래서였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뭐랄까, 삶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지, 하는 각오나 다짐 없이 보면 어느새 그리 되어진 것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16).”

 

아들 녀석이 비행기를 놓쳤다는 데 화도 나고 속상하기도 하면서, 습관을 좇아 말씀을 읽고 있을 때 하나님은 나를 붙드셨다. 나를 향하신, 나에게 이루시고자 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로서의 말씀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참으로 말씀은 시의 적절하였다. 내가 아이를 어쩌겠는가.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나로서 하나님께 독립된 존재이듯이 아들도 그러하였다. 딸애도 그러하고, 내가 마음을 끓이는 내게 맡기시는 아이들도 하나하나 그러하였다. 내가 저 애 때문에 애간장이 녹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은 나를 위해 그리 두시는 것이다. ‘나에게 너’로서의 ‘나’다. 삼인칭이 되었을 땐 이 말씀이 가슴까지 미치지 못한다. 이인칭일 때, 때론 감사하고 때론 불편하고 때론 부담스러우며 때론 놀랍다. 말머리마다 ‘때로는’이 붙는 까닭은 의식되는 ‘너’다. 의식해야 의식되는 너다. 이인칭에서 일인칭으로 넘어올 때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신경이 쓰이는 정도가 ‘때로는’을 능가하는 그 이상의 스밈에 있기 때문이다.

 

덮어버린, 아예 구분이 없어지는 너와 나다. 이렇게 노트에 적어두었던 메모의 질감이 생경하다. 왜 여기서 그토록 인칭구분에 생각을 모았는지, 오늘 말씀이 그 가늠자가 되어주신다.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를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는 땅으로 만들리라(렘 6:8).”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를 받지 않는다면, 그 대상은 인칭 밖으로 밀려나 익명의 다수가 되는 것이다.

 

아내는 안달을 부리며 이번에 좀 이러저러한 것에 대해 단단히 이르라고 당부한다. 아무래도 혼자 생활하고 사귀는 아이가 있다고 하니 그 삶이 어떨지. 어지러운 나라에서 행여 문란한 생활을 하지나 않을까 우려하여 하는 소리겠다. 그러니 이제 다 큰 자식을 뭐라 한들, 들으려하지 않는 훈계를 받지도 않으면 더는 이를 게 없다. 믿음 안에서 자랐고, 보고 들은 게 있으니 그 삶이 표준을 삼는 게 있을 테고, 아무리 뭐라 한들 하나님에게 ‘나’는 그처럼 끔찍한 존재였듯이 저 아이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을 붙드는 수밖에.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7).” 다들 자기 나름의 기준과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겠으나 이를 조율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돌이켜보면 나는 어떠했는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어찌 말로다 형용할 수 있을까. 괜한 소리가 아니라 참으로 나는 주 앞에서 면목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참견하고 간섭하는 사람은 그만큼 불안정한 정서를 가졌다. 저의 콤플렉스가 일일이 간섭하고 충돌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도 왜곡시킨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주 앞에 내려놓는 수밖에. 나의 부모가 나를 자식으로 두고 오늘 날까지 살아오실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겠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부분이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게였다. 아내의 심려는 알겠다. 나 또한 그에 못지않다. 애가 타고 속이 끓지만, 그것으로 우울해하다 주를 바라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누구보다 확신하는 건, 저의 긍휼하심이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 46:9).” 이를 알 때, 비로소 나는 오롯이 주 앞에서의 ‘나’가 된다. 군더더기 없는 나로서의 ‘너’로 주를 마주하는 게 은혜다. 택하시고 구원하신, 그 은혜 놀라와.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그래서 말씀 앞에 앉히시는 거였다. 안달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잠 5:21).” 주가 하신다. 우리는 각각 주 앞에서의 ‘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그 깊으신 뜻을 알 때, 기어이 나는 고백이 된다. 피할 수 없는 나의 나약함을 주님께 맡기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뭔가 고상을 떨고 의분하여 누구 앞에서 강론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그리 살아드리는 삶으로의 들음, 스밈, 순종에 이르기까지. 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닿는.

 

곧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시 59:9).” 내 힘으로가 아니라, 내 의지나 나의 결단으로가 아니라,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듯이. 나의 아들에게 또한 딸에게, 내 곁에 두시는 아이들에게 주님은 동일하시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