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9:24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62:5-6
얼떨결에 가을이 됐다. 더위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다. 아이들 외가 쪽 식구들이 오기로 했다가, 아내와 아들애가 그리로 가서 늙으신 장모만 뵙고 왔다. 다들 부산하고 바쁜 토요일 오후에 나만 한가로운 듯하였다. 오후께 다 같이 모여 모처럼 바깥을 서성거렸다. 다들 훌쩍 자라 그 사이에 있는 내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주일 날, 큰 아이가 제주도로 출장을 가서 못 온다는 연락이 왔다. 이래저래 자꾸 주일을 범하는 일이 생겨 속상하였다. 그렇다고 뭘 어찌할 수 있는 게 내겐 없으니, 아이 이름을 입에 머금고 주께 고하였다.
자랑삼아 붙들고 사는 것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경고하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 9:23).”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더욱 주를 구할 수 있는 자리이면 좋을 텐데, 사람이 참 그러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아이가 너무 좋은 직장에 그것도 단번에 취직을 하게 되었을 때 그런 우려를 했었다. 하긴 그래도 여기까지 이렇듯 이어지고 같이 온 게 기적 같은 일이기는 하다.
우리의 자랑은 한정된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4).” 이외에 자랑삼는 것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어쩌면 사람의 생리다. 있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없어서 주를 바라던 만큼이 못될 때가 흔하다. 견물생심이라고 생각과 실제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우리 아이들과 또는 나의 바람을 두고 주께 구하면서도 주저한다.
그것으로 주를 바라는 데 경홀히 여기게 될 거라면 차라리 없음으로, 안 됨으로, 어렵고 힘듦으로 주를 더욱 바랄 수 있기를. 가끔 아들의 생각이 단호하고 결단이 있어 나는 그것이 위태롭게 여겨진다. 아무리 젊음이란 게 무모함을 담보로 한다지만, 그래서 주를 더욱 바라고 구하는 자리에 들기를. ‘주를 아는 것으로, 주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행사하시는 분인 것을 깨닫는 것’으로 자랑하기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하는 고백이 우리 아이들의 것이 되었으면, 하고 나는 기도한다.
그리하여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5-6).” 우리의 소망이 주께로부터 나오는 것을 바로 알기를. 그렇지 못할 때 우리의 만족과 결핍이 우리들로 하여금 신경증 환자로 만든다. 그러고 보니 스위스에 신경증 환자가 가장 많다는 소릴 어디서 읽은 것 같다. 어느 나라보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프랑스에서 항우울제약품을 복용하는 사람이 가장 많고, 승자의 나라 미국에서 문맹률이 40%를 육박한다는 통계는 아이러니하다.
더는 주를 의지하지 않을 때, 사람의 몰락은 불을 본 듯 분명하다. 서로에 대한 비판이 늘어가면서 자기 입으로 자신을 고하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그래서 신경증 환자만큼 남의 허물을 누구보다 잘 꿰고 있는 사람도 없다. 저에게는 이런저런 허점이 저를 괴롭히는 것이다.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나였다. 내 안에 있는 싸움은 항상 치열하다. 열등의식은 비난을 양성한다. 언제든 쏘아댈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 아이 외가 쪽 사람들이 기껏 오기로 했다가 당일 날 틀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혼자 다투어야 했다. 공연한 우울감이 밀려오기도 하였다. 순식간에 저들에 대한 진단평가가 내려졌다. 그러다 문득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의 나 된 것이 너무 얕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혼자 덩그러니 토요일 오후에 남겨진다는 일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누구한테 무슨 소릴 할까. 공연히 나 때문에 서로 불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아 한껏 태연한 척 구는 일. 그러는 사이 내 안에는 온갖 비난과 그것으로 인한 정체불명의 죄책감이 끓어오르는 것이다. 난 늘 이처럼 생체실험을 겪는 마루타 같다.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렘 9:4).” 언제든 그게 나일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역설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7:9).” 내 안에 이는 이와 같은 갈등이 나로 하여금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것이기를. 때론 꾹 참고 때론 혼자 삼키면서,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주께 고하는 것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 된다.
수많은 질문이 마음을 찌른다. 평소에는 감추어져 있던 나의 됨됨이를 스스로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갈 2:4-5).” 그런 것이구나. 복음의 진리가 내 안에 있다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투고 싸우고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는 일이었다.
이처럼 말씀 앞에 있을 때는 평안하였다가 어떤 일, 무슨 상황 앞에서는 단박에 근심과 우울감이 목을 조이고 들 때면 모든 게 회의와 함께 바람에 이는 겨와 같다. 그럼 다 잊고 있던 내 안의 거짓 형제들, 저들은 나의 결핍의 자리에 또는 완고함의 몫으로 내 고집을 뒤틀고 가만히 들어온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신경증 환자다. 이를 고백함으로 내 안의 거짓 형제들의 실체를 마주한다. 부정하지 않는다. 누구를 향한 비난이 들끓다가 그게 고스란히 내가 들어야 하는 소리라는 데 소름이 끼친다. 이를 폴 트루니에는 죄책감이라 하는 것인지도, 칼 융은 이를 일컬어 콤플렉스라고 명명했는지도,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자아를 언급하였는지도 모른다.
바울 사도는 이를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라 칭하였다. 어쨌든 저것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가진 자유를 엿보아 나를 저의 종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이것이 도리어 나에게는 ‘복음의 진리’가 내 안에 있게 하려는 데 예민해지게 한다. 오만가지 생각이 또 억울한 마음이, 서글픔으로, 안달로, 서러움으로 치달으려 할 때 나의 눈물은 비수처럼 헝클어지는 마음을 찌른다. 그러므로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이 참 가치인지. 여기서 나는 무얼 하고 있는지, 새삼.
그러니까 나의 싸움은 건강한 거다. 볶일 때 잘 복종하면 오히려 내가 가진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자유는 그냥 맹물이 아니다. 흐리멍덩한 안일함이나 안주함이 아니다. 아내와 아들애만 처가에 가고 혼자 남았을 때 이는 열외감이 나를 우울하게 몰아갈 때 나의 신경증은 예민하게 굴다 그래서 뭘 어쩌겠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복종의 첫 걸음은 잠잠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2).”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되었을 때의 든든함에 대하여는 다 잃는다 해도 결코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이 되었다. 내 안에 이는 여러 비난과 표적이 된 이에게 쏟아지는 여러 힐문과 나의 판단과 가차 없는 비판에 대하여,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3).” 나는 쉼 없이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4).”
내 안의 거짓 형제들 혹은 열패감들의 무리지어 덤비는 상황에서 혼자 꿀꿀하게 시무룩하였다가도,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7).” 하는 한방이 있었다. 내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할 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주님, 하고 내 안에 전하는 외마디 부름이,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8).” 나의 피난처가 되어준다. 나는 내가 상대할 수 없다. 내 안의 온갖 거짓들과 싸워 나는 이길 수 없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9).” 그러게, 나의 이 한없이 가벼운 존재감 앞에서, 내가 어찌 자식이라고 저를 내 맘 대로 하겠으며 주일을 허투루 여기는 우리 아이들을 어떤 방도로 교회에 나올 수 있게 한단 말인가. 내가 시시로 주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나의 마음을 토하는 이유였다. 토해내지 않으면 내가 볶여서, 내 속이 볶이고 고통스러워서, ‘그의 앞에 토하라.’ 나는 이제 이런 말씀 때문에 산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로다.’
그러므로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10).” 이게 온전히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지 않나. 포악을 떨 때면 내가 나에게 정나미가 떨어진다. 혼자 꿍, 해서 당장이라도 뭔 일을 낼 것처럼 굴 때는 내가 두렵다. 그러다 남의 마음을 그 상황과 처지를 탈취하여 내 맘대로 판단하고 비난의 화살을 날려대는 것이다. 아, 내겐 희망이 없는가. 이때,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11).”
이를 다스리고 통치하실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12).” 그러므로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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