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예레미야 10:2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시편 63:3-4
가족들이 섬기는 교회에서 주일을 지키고 한자리에 모였다. 같이 식사를 하고 밀린 대화를 나누다, ‘살아있는 동안 이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 생각하였다. 한 곳을 바라보고 같이 그 천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건 커다란 특혜였다. 가정마다 반목과 불신이 난무하고, 사람마다 높다란 담을 쌓고, 서로를 비난하며 사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뜻을 헤아리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는, 우리 가족을 주셨다는 게 참 큰 은혜였다.
안 믿는 가정에서 안 믿는 부모 밑에서 안 믿는 형제와 함께 산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닐 거였다. 아이들을 생각하였다. 일 년 내내 서로 열 마디도 나누지 않는다는 부친과의 관계를 얘기하던 그 쓸쓸함에 대하여, 모이기만 하면 술에 취해 결국은 으르렁거리다 헤어지기 일쑤라며 씁쓸해하던 이야기며… 나는 아이들이 그 가정에서 믿음의 선봉이 되길 기도한다. 그 길이 비록 험난하고 구슬플 수 있겠으나, 하나님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황폐한가를 생각하면.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렘 10:2).” 온통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으로, 재미라고는 하지만 널리 보편적이어서 타로점을 보거나 손금을 알고, 별자리를 운운하며 오늘의 운세에 자신의 행운을 맞춰보는, 그런 게 어떤 건지 알겠다. 온통 불확실성의 날들에서 막연함을 ‘하늘의 징조’에 또는 각자의 길로 대신하는 것이다. 결국 의지의 대상이 다른 것이다.
사람이 어찌하리이까.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10-11).” 함께 주를 바라며 위하여 서로를 기도할 수 있는 게 복되다. 어떤 어려움이 고달픈 현실도 마다할 게 없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이를 어찌 세상 논리로 풀이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 하는 고백이 감사와 나란히 놓일 수 있다면 말이다.
비록 이런저런 어려움이 항상 우리를 엄습한다 해도 그것으로 더욱 주를 바라며, 서로를 믿음 안에서 의지할 수 있다는 데 복이었다. 새삼 좋은데, 좋을 때면 종종 아이들 생각을 한다. 믿음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왜 그처럼 고달프고 어려운지. 쉬 적응하지 못하고 도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경우도 이해가 된다. 안 믿는 가정에서 안 믿는 부모 형제와 함께 산다는 일, 그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이 더더욱 절실하였다.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사 61:11).”
그러게. 주께서 상한 심령을 치유하셔야 한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1:6).” 아이들을 돌아볼 때, 뭐 나름 학벌도 좋고 사회 기반도 든든하여 잘 먹고 잘 사니까 좋아 보인다 싶지만, 발바닥까지 상하지 않은 데가 없다. 조금만 들어보면 너무 흔하게 반목과 불신이 팽배한 것이다. 마음이 깨진 가족들이라. 서로는 다만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럽다.
우리는 어떤가.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61:1-2).”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지 않나. 그러니까 내가 믿음의 가족들과 있으면서, 그렇지 못한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는 일이 어찌 내 의지로 그러하겠나.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 5:14).” 열여덟 살까지 친부에게 성폭행을 당해 그 영혼이 너덜너덜 황폐해진 조이스 마이어란 여성이,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하는 말씀 앞에 ‘아멘’할 수 있었다니.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게 기적이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게 때론 우리의 체험이 우리의 이해를 능가한다. 오히려 우리가 처한 어려움이 또는 어떤 고달픔이 도리어 주 앞에서 감사를 배우게 한다. 그럴 때면 또한 역설적으로 그렇지 못한, 우리에게 맡기신 한 영혼을 두고 마음이 쓰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면서. 이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시다.
곧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 주가 이루어 가시는 일에 대하여, 가만히 의지하고 설 수 있는 것은 가족들의 든든한 신뢰와 지지가 아닐까? 원래 주 안에서 확신과 사랑을 심어줄 때 우리 영혼은 놀랍게 피어나는 법이다. 가령 사랑에 빠진 연인이 저의 사랑과 지지로 모든 시름에서 놓여나는 것처럼. 그래서 뭐라 비난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창조해내지 못한다. 사랑은 곧 면책이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잠 27:5).” 이는 주님의 사랑이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나는 늘 가족들과 있을 때 그 증거를 실감한다. 전에는 그처럼 불편하고 어려웠던, 하나님에 대한 오해였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그러했다. 그냥 싫고 불편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4-5).” 그러니 그와 같은 사랑을 절감할 때면, 나로 하여금 여전히 그렇지 못한 우리 글방 아이들을 떠올리는 일은 마땅하지 아니한가. 안타까움으로 또는 절실함으로 아이를 생각하다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일.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 63:3-4).”
비록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그러니까 말이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8).” 이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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