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예레미야 11:18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시편 64:3-4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시 64:9).” 너무 겁이 없다. 온 세상이 억지를 위한 억지로 서로를 견제하고 압박하고 위협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한다. 금방 무슨 일이 날 것처럼, 서로는 벼랑 끝 전술로 대치중이다. 나라가 나라를 개인이 개인을 지지하는 세력이 지지하지 않는 세력을 향하여,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3-4).”
때로는 혼자 있는 게 참 어렵다. 사무실마다 텅텅 비어서 나 혼자 덩그러니 있는 시간이 늘었다. 다들 먹고 사느라 분주한데 나 혼자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게 고즈넉하였다. 곧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렘 11:18).” 뉴스를 보며 가슴을 졸인다. 누구를 생각하며 한숨을 쉰다. 그 모든 게 헛됨을.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3-4).”
전날에 와서 주무시고 오전 일찍 부모님 핸드폰을 새로 개통했다. 처음 갖는 자신의 스마트폰 앞에서 낯설고 어색하여 불안해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짠하였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가도 그리하여 누리는 편리함과 위안에 대하여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처음으로 구글 계정을 만들고 ‘카톡’을 깔고 자식들 순서대로 번호판에 단축다이얼을 입력해주면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온다는 말에 실감하였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5-7).”
그럼에도 마치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구는 세상을 보면 낯설다. 탐욕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지난 날 자신의 과오에 대해 끝까지 정당성을 부여하며 오히려 시대를 탓하고 남을 겨누어 너 때문이었다고 하는 자들의 부질없음이 무서웠다. 주를 알지 못한다면, 나 또한 여전하여서 그러고도 남았을 텐데.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다. 금세라도 큰 일이 터질 것만 같이 다급한데,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렘 11:18).” 이를 보면서 나는 무얼 할 것인가? 마당에 반공호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앉으면 좀 나을 것인가. 어림없는 일이다.
나의 오늘 행복을 위하여 성경은 일갈하신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먼저는 주를 경외하라는 것. 그의 말씀을 행하고 살며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 왜냐하면 모든 건 주께 속하였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14).”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16).”
덩그러니 혼자 있으면서 읽은 말씀으로는 참으로 결연하였다. 목을 곧게 하지 말라는 말씀에 밑줄을 긋고 공책에 메모하였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20).” 살아서 남은 사는 날 동안 주를 경외하고 섬기며 의지하고 그 이름으로 사는 일. 이를 알게 하시려고 주는 나를 이끄신다. 내가 의지하고 위로를 얻으려고 하였던 것은 다 닳아서 더는 쓸모가 없게 하신다. 이를 지혜자의 말씀으로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전 12:11).” 그래서 누군 더 새로운 걸 찾고 ‘욜로 인생’을 부르짖으며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외쳐대지만,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2).” 더 말해 무엇 할까? 참 무서운 건 안 들리고 안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로 치면 저들 눈에 나의 모습도 다르지 않을 것인데, 그 끝을 무엇으로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인생이 그것으로 끝이라면 모를까….
나는 이제 주를 바라는 여기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다 잃는다 해도, 모든 게 헛되었다 해도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신 이것, 이것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던 게 아니었나?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예수님의 기쁨은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아는 것. 매사에 주의 뜻을 바로 알고 이해하는 일.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아는 것.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자식 앞에서 또는 이제 노인이 다 되신 나의 늙으신 부모 앞에서 혹은 거울에 비친 나의 낯선 모습을 마주하고, 나는 그저 속수무책이다. 누가 세월을 잡을 수 있나. 오후께 혼자 남아서 썰렁하였다. 공연히 빈 사무실의 고즈넉함이 막막하였다. 혼자 있다는 게 새삼 어려웠다. 어슬렁거리듯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 외에 겅중거리듯 이 책 저 책을 읽었다. 새로 받은 호로비츠 음반이 난해하게 연주되었다. 그러다 슈만의 12개의 시 중 ‘남모르는 눈물’과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즈’가 울려 퍼지자 눈물이 핑, 돌았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
갑자기 밀려든 우울감에 노곤하였다. 나무늘보처럼 소파에 붙어 엎드려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내 안의 어린아이는 여전히 엄마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이들은 다 늙고 낯선 노인들이었다. 그러다 훌쩍 자란 아들 녀석의 냉랭함이 서운하여 서글펐다. 어릴 때 그리 치대며 어리광을 부리던 게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꿈이었는지 아니면 굴러 이어지던 회상이었는지, 멘델스존의 ‘베네치아의 뱃노래 1번’이 연주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붙드시는 것과 달리 나의 무지하고 몽매한 미련은 그리움으로 사무쳐 오후 한 때를 헐떡거리고 있었다. 이어서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2번 2악장’이 흘러나왔다. 내가 주를 붙든다고 여겼는데 주께서 나를 붙드시는 거였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살 수가 없음을. 어릴 적 늘 알 수 없는 불안이 나를 몰아치곤 하였는데, 여전하여서 참으로 여전히 여전하여서 불안하였다. 이제는 나의 순종 때문도 아니고 나의 기도와 헌신 때문도 아니고 오롯이 주의 보혈로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심에 안도하였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 곧 내 안에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고질적인 외로움에 대하여도 또는 불안정한 우울감에 있어서도 확신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전과 후과 확실히 다르다. 나는 이제 나의 우울까지도 슬픔도 외로움도 낙심과 좌절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데 디딤판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았던가? 나는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던 때에 용서함을 받았다. 도저히 사랑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심을 입었다. 어찌 나 같은 걸, 하고 한탄스러워할 때 주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였다. 나의 수고와 노력이 아니었고, 나의 기도와 헌신이 이유가 아니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확실하지 않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 아닌가.
오늘의 나 된 것도 여전하여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7:18).” 그러므로 내가 구할 것은 주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인 것처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어릴 때, 나의 부모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며 그 삶의 여정에 깊숙이 개입하셨던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목격하면서 자라지 않았던가. 실제 나의 삶 가운데서 그러하셨듯이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러하실 것을.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나의 하루가 또한 매순간이 주께 드릴 영적 예배가 되는 것을. 살아서 사는 동안에 주의 인도하심을 붙들고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이고 복된 일이었는지. 나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1악장’을 들으면서 생각하였다.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시 64:1).”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9).” 그리하여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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