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전봉석 2017. 9. 7. 07:34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예레미야 13:15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편 66:9

 

 

 

성을 예찬하며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이가 자살하였다. 저의 나이 예순 여섯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하는 나의 생각에 내가 놀랐다. 자정이 다 돼 친구가 전화를 하였다. 자다 일어나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다가 싱거웠다. 늘 어울리던 둘은 술을 마시다 갑자기 내 생각이 났다며 횡설수설하였다. 뭐라 옮길 내용이 없다. 아직도 거기 있구나, 하는 나의 표현이 안타까움을 더했다. 누가 무슨 문학상을 타게 됐다는 소식에 반가웠다.

 

소슬한 바람이 불며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계절의 길은 정직하여서 볕이 드는 날도 여름의 힘센 햇볕은 수그러들었다. 길은 명사이기보다 동사이어야 맞다. 맞닿았다가 갈라지고 휘어졌다 곧게 뻗은 길은 서로 또한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는 것을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도 그렇지 아니한가. 저의 자살이 내게 낯설지 않게 다가온 것은 저의 벗을 잘 알고 있었다. 둘은 천재 소리를 들으며 같이 공부했던 동무였다. 사상이 같아 어울리면 늘어지는 말이 순 그런 내용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나의 무거운 육신의 하중을 견디느라 무릎이 아팠다. 전날에 아들아이와 노느라 초딩 중딩 수업이 연달아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허물없이 구는 걸 좋아한다. 본래 나는 싱거운 사람이라 소위 말해 ‘아재 개그’를 먼저 날리기도 한다. 아이들이 ‘쌀 사랑’ 주제로 쓴 동시를 공모전 사이트에 일일이 올리느라 성가셨다. 순 엉터리여도 아이들이 한 자 한 자 쓴 글에는 고스란히 아이의 세계가 담긴다. 글이란 잘 쓰고 못 쓰고는 없다. 좋은 글과 나쁜 글이 있을 뿐, 좋은 글이란 정직하게 세상을 보는 것이고 나쁜 글이란 위선을 떠는 글이다. 이 또한 아이들의 글에서는 맥을 못 춘다. 어른 흉내를 내는 것도 아이니까 가능하다.

 

어른이 어른 흉내를 내면 이는 좀 문제가 있다. 친구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횡설수설하였다. 나이가 그리 되었다며 ‘안수집사’에서 떨어졌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두 해 후배인 다른 친구는 전화를 바꾸더니 목사가 된 나를 ‘배신자’라고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웃자고 드는 말이 어른 흉내를 내는 어른 같아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하긴 옛날 같았으면 어디냐? 하고 달려 나갔을 건데. 아들 녀석은 중학교 때 친구들을 만난다며 외박을 하였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 18:29).” 주를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이 이어지면서 나는 이제 거리에서 저러고 있는 게 안쓰럽다. 물론 저들은 내게 ‘벌써부터’ 그러면 안 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긴 나의 시간표가 노인의 시간표를 닮기는 하였다. 언제 한 번 오라는 말밖에 할 게 없었다. 그 시간에 거기 있으면 안 된다는 소릴 그렇게 하고 있었다. 건강을 위해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지 음식이 건강은 아니다. 온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직분을 감당해야지 직분이 신앙은 아니다. 횡설수설하는 친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구원은 거저 주시는 거지만 구원을 이뤄야 한다. 구원을 위해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지만, 담담히 주를 신뢰하고 겸손히 주를 섬겨야 한다. 구원의 요건이 아니라 구원의 현상이다. 저 둘은 교회 친구다. 어릴 때부터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 지금도 교회 그늘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신앙이 헐렁하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받았으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같은 하늘 아래서 살고 있지만 다른 세계를 다른 사람으로 사는 일이다. 이를 어떻게 술 취한 친구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모르는 게 병이 아니라 아는 게 병이다. 교회에 대해, 목사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잘 안다고 여기는 한 뭐라 한들. 교만이란 얼마나 단순무식한 것인지, 도무지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이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나도 안다, 나도 할 수 있다 하는 마음으로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게 구원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리로다(24).” 이에 두려워 떨 줄 모르는 자는 들을 귀를 가지지 못하였다. 오늘 말씀은 이를 뚫고 들어온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렘 13:15).”

 

중2 아이들에게 뭐라 말을 해줄 때 두 아이의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반듯이 앉아 똑같이 듣고 있는 것 같지만 한 아이는 귀를 기울이고 한 아이는 귀가 닫혔다. 표정이 또 눈빛이 서로 다르다. 요즘은 그냥 기능적인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서만 알고 싶어 하지 다른 말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말이란 듣는 이의 것이어서 나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싱겁게 풀어진다. 좀 들어라. 오늘 말씀이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귀를 기울이고 좀 들어야지, 이건 원. 교만이란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걱정 마, 나도 다 알아. 내가 알아서 할 게, 너나 잘 해. 할진대, 그래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자기 마음에 흡족한 정도여서 그만하면 됐다 하니 뭐라 더 이를까. 아직도 그러고 있을 수 있는 게, 주의 은혜다. 나는 다시 잠을 청하면서 생각하였다. 그런데도 여전하여서 그러고 있을 수 있다는 게, 저의 길은 휘어졌다 구부러져 더욱 먼 길로 뻗어가는 것 같으나, 어느 지점에서 다시 교차하게 하실 것을 바랐다.

 

주 앞에 엎드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시 66:9).” 할 수 있는 고백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를 깨닫게 하시기를.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아멘, 하고 주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기를. 곧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20).” 이런 고백으로 가슴이 절절할 수 있을 때 구원이 저의 것이다. 그러게, 옛날 같았으면 달려 나갔을 텐데. 그리고 밤거리를 배회하며 하늘을 향해 종주먹을 날렸을 것을. 나는 이제 여기에 있다.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렘 13:16).” 아직도 거기에 있는 친구들을 안타까워하느라, 달아난 잠은 좀체 다시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심조심 또는 장난스레 목사님, 하고 부르는 친구들의 고달픈 목소리가 안쓰러웠다. 잘 나가던 사업이 부도가 나고 검단 쪽 어디 사글세방을 얻어 들어갔다는 말은 얼마 전에 전해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저의 처진 목소리에서 팍팍하니 고비 사막을 건너온 모래먼지가 날리는 것 같았다.

 

아, 주가 나의 어려움에서 주님의 발을 두셨다. “레바논의 영광 곧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이 함께 네게 이르러 내 거룩한 곳을 아름답게 할 것이며 내가 나의 발 둘 곳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사 60:13).” 그러나 이를 한사코 외면하느라, “네가 마음으로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렘 13:22).” 사는 게 부끄러워서, 그처럼 붙들고 섰던 게 허망하여서, 종종 친구는 술에 취해 죽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장미여관을 외치던 이는 스스로 목을 맸다. 인생을 길로 비유하는 까닭은, 길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맞다. 살아서 사는 동안에 움직이는 것이다. 어찌 될지 모른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핍이라는 손가락을 내밀며 바른 길을 가리키신다. 저 길이 아니라 이 길이야, 하고. 우리의 결핍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다. 나는 친구가 사업이 망했을 때, 어디 사글세방을 얻어 처자식을 몰고 갔을 때, 저에게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손가락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뭐라 하며 그저 자기도 다 안다는 식의 친구에게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교만이란 스스로 검은 피부를 희게 할 수 있다고,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는 짓과 같다. 누구 말도 듣지 않다 이내,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렘 13:26).”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는 자에게 두 길이 놓여진다. 끝내 스스로 변하게 할 수 있다 하며 자살하거나,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시 66:9).” 하면서 주 앞에 돌아오거나. 달랑 쉰 살을 넘겨 살아본 바로 인생길이란 여전히 유동적이다.

 

내가 나의 체험을 붙들고 나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올바른 길은 아니다. 그래서 여전히 내겐 ‘저런 친구들’이 있고, 말해 봐야 소용도 없을 것 같은 ‘이상한 아이들’이 수시로 붙는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똑같은 일로 고민하고 씨름하며 얘를 어쩌지 못해서 쩔쩔매면서… 하나님은 나를 정신 못 차리게 시장 어귀, 저 장터 한복판에 세워두시는 것이다. 여전하여서 늘 겪는 결핍을 통해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방향을 다시 재차 확인하면서 말이다. 오늘도 내게 어느 쪽을 가리키고 계시나?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주밖에 없음을.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 결과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내가 어찌 인위적으로 무엇을 덧대고 흩어 저를 돌이키고 구원할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구원을 나타내는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이 거룩이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바꾸어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나는 생각한다. 고로 기도한다. 고단하였던 나의 친구의 목소리를 생각하며, 생뚱맞은 표정으로 한사코 시선을 외면하던 중2 아이의 얼굴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셀라)(시 66:3-4).”

 

주가 이루어 가시는 세계에서 나는 주의 길을 본다. 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간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