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전봉석 2017. 9. 8. 07:35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예레미야 14:7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편 67:1-2

 

 

 

친구가 문학상을 탄다. 권위는 물론이고 상금이 무려 삼천만 원이었다. 오전에 일찍 축하 문자를 보냈다. 점심께 전화가 들어왔다. 이런저런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오후 내내 기분이 울적하였다. 가감 없이 말하지만, 나의 그 마음은 시기심이었다. 부럽기도 하고, 난 뭐하고 있었는가, 싶은 자책이기도 하다. 책도 읽히지 않고 중학교 아이들 수업도 어물거리기만 하였다. 모처럼 느끼는 부러움이었다. 나는 조금 초라하였다. 자극이 되려나, 싶어 그러는 나를 그냥 두었다.

 

내 안에 이는 감정이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구나, 하는 정도의 감정은 예전에 그처럼 몸살을 앓던 것과는 달랐다. 아주 잠깐, 나의 지난날을 생각하게 하였다. 싱겁게도 그게 다였다. 친구의 성실한 글쓰기에 대하여는 고개를 숙인다. 무던하다는 건 은사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주님은 나의 친구다. 나는 이제 이런 말씀에 거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

 

부러운 건 사실이고, 은근 시기심이 일어 입을 삐쭉거리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싱거운 나의 감정이 되레 이상할 정도였다. 다 저녁에 고3 아이가 ‘자기소개서’를 봐줄 수 있냐고 문자를 했다. 기꺼이, 아내와 나는 저 아이를 두고 기도하고 있었다. 교회로 인도할 수 있었으면 하고 말이다. 토요일 오전에 원고를 들고 오겠다고 하였다. 당장 다음 주 금요일까지 수시접수 마감이라는데, 늦장을 부려놓고 마음이 조금해졌는지 이런저런 말이 길어졌다.

 

나에게 두시는 상황이란 내가 임의로 바꾸거나 조작할 수 없다. 물론 다들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보다 어리석은 판단은 없다. 나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애쓰고 수고하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우리의 성실함은 무엇을 위한 게 아니라 무엇에 의한 것이다. 무엇을 위해 성실한 삶은 억울할 따름이다. 하지만 무엇에 의해 성실한 삶은 마땅히 그러해서 결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나는 이 말씀에 안도한다. 내가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다. 사람 관계도 글쓰기도 나름의 성실함으로 얻을 수 있다고 여겼더랬다. 한데 돌아보면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었다. 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다. 자아실현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기독교인이 그래서 많다. 자기가 살고 그리스도가 죽기를 바란다. 기도는 외형적인 변화를 꾀하는 게 아니었다.

 

문득 보면 더 나빠지고 오히려 원하던 것과는 멀어졌는데, 내적인 변화가 기도의 결과다. 하나님 쪽으로 한 걸음 더 간다는 건 내 쪽에서 한 발 더 발걸음을 떼는 것이다. 나는 친구의 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하지만 주를 더욱 멀리하는 그의 자아실현이 안타깝다. 이런 소릴 저에게 한들, 어떤 논리로 저들을 설득할 수 있겠나. 자아실현은 죄다. 물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겠으나, 돌릴 게 별로 남지 않는다. 누가 스스로 죄인인 걸 인정할 수 있겠나. 그래서 보수단체의 기독교인들은 무섭다. 신념이 자아실현을 부추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실명을 거론하긴 그렇고, 나는 문단에서 현재도 살아계신 두 원로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을 안다. 한 분은 여전히 강의도 하고 책도 내면서 베스트셀러작가로 추앙받는다. 또 한 분은 소설을 쓰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까무룩 하다. 성경과 소설에 대한 저의 글을 우연히 읽었을 뿐이다. 누군 이제 자신의 사상을 성경보다 앞세우는 듯하고, 누구는 정말 어디에서 뭘 하시는지 궁금하다.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만족할 뿐이지, 자신의 사상과 깊이를 나타내는 데 애쓰지는 않는다. 뭐라 단정 지어 말하기엔 나의 철학이나 판단이 미천하여 조심스럽지만,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2).” 몸의 사욕은 나를 인정하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육을 입고 사는 날 동안 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다. 시도 때도 없이 이는 자기애는 찐득이 같다. 그래도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14).”

 

내가 수고하고 성실하여서가 아니라 주의 은혜다. 기도도 하고, 열심히 말씀도 보고, 나누고, 돕고, 헌신하여서 이룬 열매가 아니다. 행여 그리 여기는 자기 의가 있다면 이는 자못 위태롭다. 성경은 우리의 온전함을 바라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앞서 산상수훈의 여덟 가지 복에 대하여는 좌절만 더할 뿐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스스로 심령이 가난할 수도, 애통한 자로 긍휼을 더할 수도 없다.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때, 은혜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그리 아뢸 수밖에 없는 나의 심경이지 않나.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렘 14:7).” 나는 안 그러려고 하는데, 그게 싫은데, 몸서리치게 싫고 또 싫은데, 여전하여서 계속 죄를 더듬는 나를 어쩌면 좋을까?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나의 타락이 많다. 나는 범죄 한다. 하루에도 수골백 번은 죄악 되다. 그런 내가 무슨 수로 의를 이룰 것인가. 나의 성실함의 결과로? 또는 기도로? 턱도 없다. 어림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1-2).”

 

주가 주시고 주가 이루셔야 할 거였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 이는 시기심을 보고 오히려 신기해하였다. 여전하여서, 겉으로는 축하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시샘을 내고 있는 나를 나는 주체할 수 없었다. 거기다 대고 내가 무슨 성실로 얼마나 경건을 더하면 의로움으로 진심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7).” 주님이 주셔야 하고 이로써 나로 하여금 주를 경외하게 하셔야 할 일이다. 내 안의 죄악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참으로 나의 타락이 많으니이다. 내가 주께 날마다 범죄하였나이다.

 

말씀 앞에 선다는 일은 내가 해야 할 말을 말씀이 말씀하시게 하는 일인 것 같다. 분명히 시기심 때문에 우울해하고 공연히 마음도 뒤숭숭하였는데, 이제는 전과 같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기도가 어떤 일을 이루어가는 게 아니다. 상황을 바꾸지도 못한다. 그래서 나는 누가 기도 응답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바뀌고 새롭게 이루어졌다고 하는 간증을 들을 때면 아찔하다. 오히려 기도를 통해 자신이 바뀌는 건 모를까. 기도는 나의 영혼을 다스리고 영혼은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

 

나는 내 앞에 산적해 있는 문제를 두고 없애달라고만 기도하는데 어느새 보면 그 문제들을 사뿐히 지르밟고 지나왔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실제 날 위해 기도할 건 그리 많지가 않다. 나도 몰라 뭘 구해야 할지, 그러나 이미 하나님 나의 아버지께선 아신다. 그러니 저들처럼 중언부언할 거 없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 기도는 날 위한 게 아니라 널 위한 거였다.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려고 나를 위한 기도는 주님이 더 잘 알아서 처리하신다. 안 믿는 가정에서 자라고, 안 믿는 아이로 우리 곁에 보내시는 ‘이상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새로 온 중3 아이가 또 가관이다. 중1 녀석은 또 그렇게 부모를 증오한다. 들어보면 그게 다 오락 때문이고 공부 때문이다. ‘저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남을 위한 거였다. 뭘 위해 또 어떻게 기도하고 있다고 내세울 것도 없다. 스스로 적어두어 셈을 하듯 따질 것도 없다.

 

오히려 나의 병적인 관심이 기도를 가로막는다. 돈에 대해, 자식에 대해, 어떤 성취감에 대해 내가 애원하고 기도한들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못하는 이유였다. 안 들어주시는 게 아니라 못 들어주시는 거였다. 내가 날 위해 비는 것은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죄로 여겨지도록 늘 나에게 예민한 마음을 허락해달라는 것이다. 나의 나 된 것이 모두 주의 은혜인 것을. 여전하여서 내 안에 이는 감정이 행동이 마음 씀이 온통 죄악 될 뿐이오니,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7).” 오직 예수 안에서,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