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전봉석 2017. 9. 18. 07:35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예레미야 24:7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시편 77:13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때이다. 아이가 오기 전까지 나는 괜히 속상하고 성가시고 귀찮아서 마음이 뚱하였다. 어차피 그리된 거, 너그럽고 초연할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참 옹졸하다. 뭐가 그렇게 싫은 것이다. 그러다 또 막상 아이가 왔을 때 어떤 반가움이 혹은 안쓰러움이 앞섰다. 잘했다 잘했다고 응원하면서 고단할 고3 아이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내가 어떤 셈법을 앞세워 주의 마음을 운운하는 건 옳지 않을 거였다. 결국 내가 너그러울 수 있는 건, 주가 돌보신다는 확신에서다.

 

이래봐야 뭐하나, 싶은 어떤 마음 씀은 그런 거였다. 문득 수천만만 마리 메뚜기 떼가 넓은 강을 건널 때의 장관을 생각하였다. 선두를 형성하고 있던 메뚜기 떼 한 무리가 무모하다 싶게끔 강을 향해 돌진하였다. 수면을 따라 긴 유형을 이루던 메뚜기 떼 진영은 기류의 영향으로 중심을 잃고 물 위에 떨어졌다. 그 수가 어마어마하였는데, 수천수만 마리의 메뚜기 떼가 긴 띠를 이루며 강 위에 스러지고 그 유형을 따라 수천만 마리의 메뚜기 떼가 길고 긴 강 저편으로 이동하였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참으로 고귀함이란 무모함에서 더욱 빛나는 게 아니었을까?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14).” 언젠가 <동물의 왕국>에서 본 장면이 클로즈업 되면서 아이를 대하는 내 마음에 자극이 되었다고 하면 이 또한 놀라운 연관이 아닌가.

 

우리가 이러고 있어봐야 뭐하나 싶게, 이 사람에게 내가 이런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을 때, 당최 부질없는 것만 같을 때,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1, 28).” 온전히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긴다는 것 또는 감사함으로, 내가 아이와 마주하고 있으면서 속단하지 않는 거였다. 이처럼 내게 분별력을 주시는 까닭은 상대를 분석하고 평가하며 비판하라는 게 아니시었다. 바로 그 분별함으로 기도하지 못하는 저를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라는 것. 이 황당하고 무모한 가운데서, 그저 맥없이 스러져가는 메뚜기 떼의 찬란한 유형 앞에 나는 숙연하였었다. 그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이다. 그 선연한 물에 띠가 뒤따르는 수천만만 마리의 이정표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나의 앞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이것이 오늘 나에게 선연한 길이 되어서 좌로도 우로도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겠나(11:13). 그런 나는 마치 씨를 뿌리기도 전에 수확할 걱정을 하고 있는 꼴이었다. 심고 경작하고 거두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 4:37).”

 

오늘 말씀은 이에 더욱 확신을 더한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시는 이도, 전심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아이가 오기 전에는 한 시간만 뚝딱 해치우듯 봐주고 얼른 끝낼 거였다. 한데 그 시간은 늘어났고 아내와 딸애는 지루하여서 산보를 나갔다 왔다. 것도 모자라 수요일에 보내야 할 것은 화요일에 가져와 좀 더 보자, 하고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시 77:13).” 내가 내 안의 변화를 보며, 수면 위로 선연히 띠를 이루며 길을 내는 유형을 보는듯하였다. 마음은 저 혼자 뒤채는 수면 위의 바람처럼 변덕스러울밖에. 이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 14:30).” 내가 부를 이름은 주님뿐이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31).”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꾸짖음도 사랑이었다.

 

다 저녁에야 끝내고 아이와 다 같이 나오면서 주일을 권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같이 가자고 말해주었다. 고3인데, 대학이 되면 날아가 버릴 텐데, 그 부모가 반대할 텐데, 싶은 여러 이유와 반감을 뒤로 하고 나는 그리하였다. 아이가 네, 하고 대답해줄 때 그게 또한 얼마나 기쁨으로 다가오던지. 전날에 서러웠던 마음이 그 말 한 마디에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하긴 단테의 <신곡>에서 묘사된 지옥 맨 아래 밑바닥에 있는 자들이 ‘여름 시원한 그늘에서 불평 불만하던 자들’이었다는데, 내가 아니었겠나.

 

고통스러워도 멈출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무모함이라 해도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 126:2).” 곧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 그리하여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사 60:5).”

 

구원을 허락하시는 일, 그 장엄한 대열에 비록 나의 오늘은 스러져 가련하기 그지없다 해도 멈출 수 없는 길이었다. 가고 또 가야 하는 여정이었다. 결국 나는 여기에만 유용한 것이다. 작전지역을 벗어난 병사는 탈영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바울 사도의 결연함이 공연한 게 아니었다. 자기 의지로 자기 신념에 겨운 일이었다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행 9:1).” 그 일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리 적극적인 원칙만을 고수했을 것 아닌가. 저의 살기등등했던 완고함이 주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된 것이,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9).” 저 둘이 한 사람이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거듭나고 또한 거듭난다. <지킬 박사와 하이디>를 쓴 로버트 루이트 스티븐슨은 아침마다 하나님께 먼저 인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저는 아침에 하나님께 먼저 인사하지 못한 날은 하루 종일 회개를 해야 했다고 한다. 노예 선장이던 존 뉴턴이 그처럼 인자하고 너그러운 목사님이 되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주옥같은 찬송을 지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은 결코 먼 곳에 계시지 않았다. 시궁창 같은 내 마음 가운데도 함께 계셨다.

 

아이 하나를 두고 나 혼자 씨름하다 그 안에 담긴 놀라운 은혜가 무궁무진하였으니,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내가 누굴 생각하고 어떤 일을 마음에 두고 쩔쩔맬 때도 그러므로 주가 곁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가 내가 내보이는 너그러움이지 않은가. 왜 이처럼 너그럽지 못할까, 싶으면 강퍅해진 마음을 짐작해야 한다.

 

반드시 주가 이끄신다는 것.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공연히 수면 위에 즐비한 헛되고 헛됨을 두고 낙심할 것 없다. 저것이 향하고 있던 저 너머 강 저편을 바라보고 나아갈 뿐이다. 행여 나는 여기 스러진다 해도 나의 마음이, 시간이, 공연한 실천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거였다. 주님 이 아이에게 복음을 주세요. 그 가정이 이 아이로 인해 구원 받게 해주세요.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기도하였다. 그런 것이다. 그러라고 그러시는 것이다.

 

‘우리를 붙드는 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믿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이 말을 메모해두었다. 나의 수고와 애씀이 결과를 낳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기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기억에서 잊힐지도 모른다. 이를 끝까지 기억하시고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셨다. 나는 그 증인으로 나를 세운다. 부모 형제의 기도 제목이었을, 나아가 이생에서 더는 만나지 못할 수많은 누군가의 기도였을,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원인이었고 동기였을 저들의 기도 결과이다.

 

언젠가 저들은 주 앞에서 말하겠지? 우리가 언제 주의 이름으로 저를 위해 기도하였습니까? 정작 당사자들은 기억도 못하는데 주님은 그 기도를 기억하시고 이루시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러니 공교롭게도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무모하지만,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날고 또 날아서 저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시 77:16-19).” 그러나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20).”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