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예레미야 26:13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시편 79:13
논문학기가 미뤄져 한 학기를 더 하게 된 아들과 하루 왕복 네 시간의 출퇴근으로 곤죽이 된 딸의 피로와 다음 주 중등부 아이들 시험을 앞두고 덩달아 고생이 많은 아내에게 사는 데 따른 삶의 고단함에 대하여 할 말이 없다. 이런저런 걱정이 늘 앞서지만 주님은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 이 사실은 또 바탕을 이뤄 당장의 서러움과 안타까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뿐이라는, ‘주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주를 바라고 의지할 때에만이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어거스틴의 말에 공감한다. 같이 둘러 앉아 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읽을 때, 서로를 위해 또 우리에게 맡기신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의 어떤 든든함이라니!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다는 데에 은혜가 깊고, 자격이 없는데서 또한 저항감도 크다. 그리하여 늘 그 자격을 놓고 씨름하는 사람들이다. 전심으로 원하면서 전적으로 거부하는 우리의 생태적 특징을 어쩌면 좋을까?
어쩌면 우리 안에 혼재 돼 있는 상대적평가의 망령이 되풀이되기 때문은 아닐까? 가령 탕자의 형은 타락했던 동생이 돌아왔을 때 이를 반기는 아버지의 은혜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눅 15:24-32). 내 안에도 늘 그와 같은 속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저보다 우리가 낫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끌어다 돌로 치려했듯이, 언제든 나도 그쪽에 서 있는 것을 목격한다. 길게 하품을 하며 아침을 먹는 딸 앞에서 나의 마음은 공연히 안 됐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욘 4:5).” 내 안의 심보가 딱 그러하다. 누군 잘만 사는 것 같은데, 다들 좋게만 여겨지는데, 어찌 우리의 삶은 이처럼 고단한가 싶은. 마음이 우울했던 이유가 낮에 부모님이 이사를 안 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같다. 잘 됐다는 마음과 공연히 서러워지는 마음이 같이 섞였다. 감사와 원망이 같이 뒹구는 것이다.
힘내라. 괜찮다. 주가 함께 하신다. 아이들에게 그리 말해주고는 나는 순간 요나가 되어 그 셈법이 복잡하다. 탕자의 형이 되어 뭔가 불만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나는 너무 하는 게 없다는 자책이 나에게 두시는 소명을 훼손한다. 고3 아이가 오기로 했는데 다섯 시가 지나 여섯 시가 다 돼도 오지 않았다. 문자를 해보자 지난 주에 쓴 대학의 것을 조금 고쳐서 그냥 내려고 한다나. 그래서 안 오면 안 온다고 문자라도 해줄 일이지. 정말이지 나는 목사로 살면서 이런 게 제일 싫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삼십 분은 일찍 서두르고 삼십 분은 넘겨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다 그냥 안 와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나한테만 그러는 걸까 다른 데서도 그러는 걸까? 난 그런 게 딱 질색이어서 차라리 안 보고 만다. 그런 류의 사람을 경멸했으며 허투루 구는 사람을 피해 다니며 살았다. 한두 번 그러면 더는 상종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그냥 그러는 게 내 일이 되었다. 갈게요, 하고 함흥차사다. 연락을 해주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는 격이다.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안 그럼 내가 지레 죽겠다.
속으론 그처럼 툴툴거리면서 힘내라. 잘 될 거다. 하는 식의 답을 보내놓고는 뚱하였다. 이럴 때 또 밀려드는 게 나에 대한 자책이다. 이중적이어서 말이다. 이런 내용을 쓰고 있다보면 나를 두둔하려고 남을 욕하는 것 같아 또 자책이 밀려든다. 그러니 온통 나와의 싸움이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내게 더하시는 말씀 앞에서 입을 삐쭉거린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60:1).” 소명이 훼손된다.
나는 기도하기를 의연하였으면 좋겠다. 초연하여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으면 좋겠다. 요나의 심정이 딱 내 것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욘 4:3).” 화딱지가 나는 것이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공연히 억울한 것이다.
한 세월을 탕자로 지내다 돌아와 염치없음을 송구스러워 자책하더니, 이젠 그의 형이 되어,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3).” 입바른 소리가 먼저 튀어나오는 격이다. 궁벽한 생활 앞에서의 난처함이야 이젠 온전히 주를 바라는 것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여겼는데, 번번이 서럽고 서러워서 원망과 걱정이 먼저 앞서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쯤 더 지나야 나는 의연할 수 있을까? 주님 앞에서 너그러울 수 있을까? 늘 왜 골탕 먹은 사람처럼 심통을 내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놓고는 그게 또 자책으로 밀려들면 금세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주께 고개를 숙인다.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6).” 수시로 싸움질인 마음으로 인해 고단하다. 고3인 애가 바쁘니까 그럴 수도 있겠거니, 그걸 또 나는 시간을 정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유로 내가 애썼고 내가 화가난다 이거지. 정작 니느웨로 가라하실 때 그게 싫어서 다시스로 갔던 위인이 말이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욘 1:12).” 자책에 겨워 스스로 그와 같던 심정이었는데,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4:5).” 어찌 하시는가 보자, 이거다.
그런 날 위해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6).” 얼마나 좋은가, 지금의 이 글방이. 교회가. 내 처지가. 우리의 살림이. 한데 또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7-8).”
고스란히 내 모습이지 않나. 나의 어리석음이고 못남이고 답답함이었다. 요 나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시고,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게 하신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내가 아니던가. 좀 나아지나 싶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제자리인 게 요, 나, 아닌가? 삐쭉거리며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3).”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되풀이하는 일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5).”
생각처럼 되지 않을 때, 나름 수고하여 어떤 보상을 바랄 때, 또는 당연한 약속 앞에서 부당하게 구는 아이를 비난하고 있을 때, 말씀은 이르시기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고로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 14:11).” 나는 사는 날 동안 어쩔 수 없는 위인임을 날마다 고백해야 한다.
은혜가 아니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다. 오직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6).” 내 안에 이는 온갖 더러움을 매순간 주 앞에 내려놓으며 산다. 중1 아이가 미주알고주알 아내에게 뭔 속 얘길 그렇게 한다. 또래가 돌아가면 몇 분씩 길게는 몇 십 분씩 자기 이야기를 한다. 전날엔 엄마가 아이를 어찌 때려 눈 밑에 상처가 났다. 들어줘. 들어주는 게 우리 일이다.
심령이 상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아이엄만 아이엄마대로 죽을 맛이다. 더 지랄 맞은 남편 등살에 시달리느니 마트에 나가 계산원으로 일한다. 하루 24시간을 아무리 쪼개도 중1 아들을 어찌할 수가 없다. 며칠째 영어 학원을 거짓말로 빠졌던 모양이다. 화가 치밀 수밖에. 더는 화딱지가 나서 교회도 나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함구무언이라. 대체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느니 내가 알아서 해보겠다는 것인데, 그 생활이 피폐하다.
가정예배를 드릴 때 아내가 말해준 아이 이야기에서, 종일 씨름하던 내 이야기에서,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들 이야기에서,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렘 26:13).” 하는 오늘 아침의 말씀을 유추해본다. 나의 길과 행위를 돌이키라. 말씀에 청종하라. 하면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시 79:13).”
은혜가 아니고는 다른 무엇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약하게 구는 사람의 경우 열에 아홉은 ‘전에 다녔던 신자’가 많다.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는 말씀에서 어그러졌을 때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가는지 여실히 증명이 된다. 나는 하루에도 열두 번 요나가 되고, 탕자의 형이 되어 심보가 고약해진다. 언제든 나도 다를 바 없음을 말이다. 그래도 들어주자. 기다리고, 또 참자. 뭔 소린가 싶은 말을 나는 혼잣말처럼 가정예배 때 궁싯거렸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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