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예레미야 25:5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편 78:72
벼르던 낚시를 갔다. 떡밥을 사고 저수지로 들어갔다. 그런데 예전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아늑하고 고즈넉하던 분위기가 없어졌다. 관리인이 물 위에 부표를 늘어놓아 나름은 사람들이 낚시하기에 용이하도록 자리를 만든 것인데, 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저수지를 한 바퀴 돌며 그림이 좋은 자리를 찾았으나 마땅히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맞은 편 다른 저수지에도 갔다가 휑하니 둘러보고 그냥 돌아왔다. 사람 손이 가면 자연은 훼손된다. 더 멀리 가볼까 싶었는데, 이제 난 바보가 다 됐다. 번잡하고 어수선한 도로가 무서웠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른 점심을 먹고 글방으로 갔다. 가장 안전한 곳이 되었다. 텅 빈 하루였다. 볕이 따가워서 블라인드를 쳤더니 우울했다. 갓프리의 <칼빈>과 트루니에의 <죄의식>과 챔버스의 <성화>를 겅중거리듯 읽었다. 몸은 버릇을 잘못들인 아이처럼 늘어져 있으면 좋아했다. 그게 뭐라고, 어딜 가려면 왜 그처럼 긴장하는지 모르겠다. 한 것도 없이 녹초가 됐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고3 아이가 자소서는 잘 냈는지, 누가 어떤지,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이건 어떻고 저건 어째야 하는지, 생각은 저 혼자 마구 치고 들어왔지만 그냥 두었다. 영화를 볼까 하고 찾아보다 것도 성가셔서, 습관처럼 책을 읽으며 노트를 했다. 그러고 있는 게 참 좋은데, 그러고 있어서 참 우울했다. 하늘은 쾌청하여 팽팽하니 금세 찢어질 것처럼 파랬다.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게 복이었다.
누구를 떠올리시면 저를 생각하였다. 생각하며 할 수 있는 게 이젠 기도하는 거였다. 뭘 어떻게 해보려는 마음에서 놓여나기. 가만히 있는 것이 어떤 분주한 일보다 어려운 것임을 새삼 느꼈다. 그렇게 두시면 그렇게 두시는 데서 주를 바라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몸의 어려움에 대하여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아프면 아픈 대로 괜찮으면 괜찮은 대로, 그 모든 여건을 주가 조성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다만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일로 여겼다. 이처럼 앉아 있는 일 하나도 때론 어렵기만 한 경우가 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생각하기를 돌려 책을 읽거나 말씀을 펼친다. 스스로에게 구원을 공갈처럼 위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뭐라도 은혜에 맞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싫어하실 거라는. 그래서 자꾸 은혜의 값을 치러야 한다는 작위적인 노력이 우리를 더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의무보다 무모한 것이 종교적 의무이다. 그래야 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어떤 당위적인 요구가 내 안에 일곤 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고단하기만 한 것이다. 믿는다는 게 일처럼 여겨지고 주를 사랑한다는 게 숙제처럼 버거운 게 되기도 한다.
이를 일거에 날려버리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유아적 두려움이 우릴 망치곤 한다. 어릴 때, 그렇지 않으면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강박 때문에 아이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고, 사랑을 구걸하듯 부모에게 애정을 쏟았던 경우.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라는 데 의아한 것이다. 불안해서 그냥은 받을 수 없게 만든다. 뭐라도 해야 한다. 나름 값을 치른다. 고마움의 표시가 아니라 적당한 선 긋기다.
더는 원하지 않는, 그 주도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우리의 헌신과 봉사는 값을 무는 것처럼 고단하기만 하다. 사는 데 드는 비용이 있듯이 믿는 데 따른 값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그래서 그 열심이 혼재된 마음의 보상을 요구한다. 이만큼 했으면 됐지 얼마나 더 해야 해? 뭘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하는 식의 반감이 싹트는 것이다. 스스로 할 만큼 했다고 여길 때 하나님의 사랑은 구질구질해진다. 값을 요구하는 옹졸한 게 된다.
좀 외람되지만 챔버스의 일생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을 칼빈의 생애를 읽으면서도 느꼈다. 자발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은 구분이 어렵다. 다 같은 마음에서 나오지만 그게 결이 다르다. 해놓고 한 게 없다고 여기는 마음과 하지도 않고 한 게 많은 듯 싶은 마음도 있다. 엄연히 주의 사랑은 조건에 따른 게 아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나는 믿을 수 없지만 주는 항상 일관되시다. 그걸 더러 잔인하다고 느끼는 건 전적으로 자기 문제다.
주님의 말씀이 때론 그 자체로 버겁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어떻게 그러실 수 있지? 내가 뭐라고.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가며 차마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는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종의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까 돌아가야겠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 것이다. 우리의 허물을 도말하는 자이시다. 내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냥, 그래도 되나 싶은 송구하고 염치없음이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한다. 애통하는 자로 세운다.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렘 25:5).” 돌아오라는 것. 마음을 주께 드리라는 것. 이는 자연스럽게 악행을 버리는 일이다. 돌아간다는 말,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그렇구나. 말씀은 하나다. 한참 보고 있으면 모든 게 하나의 점 안에 있듯이 이런저런 구구절절한 내용이 결론은 하나,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하게 하셔야 하고, 그리 되게끔 하시겠다는 것이다. 나의 허물을 도말하시는 분. 나는 누워 책을 읽다가 이래도 되나? 싶게 좋으면서 불안한 마음을 일소했다. 뭘 한들. 말씀을 음미하고 묵상하는 일보다 가치 있는 건 없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그렇구나. 이와 같은 말씀을 되뇌며 절로 감탄이 나는 것. 주 안에서 자랑이다.
어떤 성과를 기대하고 뭔가 애쓰고 수고하는 것만을 능사로 아는 이 땅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비결은 이런 게 아닐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처럼 나의 생각이 몸이 마음도 주를 바라고 구하는 일에 있어, 뭘 꼭 하지 않아도 된다는 즐거움. 푸른 잎의 저 식물들에겐 물과 햇살만 있으면 된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푸름으로 이미 충분하였다.
문득 어떤 생각이 하나 난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암 세포가 모든 장기로 포진해 더는 손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글방에 가는 길에 그녀에게 갔다. 같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저의 고백을 들었다. 그때 그녀의 가장 큰 절망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해주었다. 몇 천 명 몇 만 명을 앞에 두고 설교하는 어느 목사의 간절함도, 어느 오지 낭떠러지에 서서 사역을 감당하는 선교사의 절박함도 ‘이 꽃만 못하도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눅 12:27).” 온 몸 다해, 온 맘 다해 주를 바라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생의 끝자락 병상에서의 되뇜이 어느 대단한 사역 못지않았다. 그리 말해주었다. 내가 아는 성경은 그리 말씀하고 계셨다. 우리 주님은 그 사랑이 값없으시다. 그래서 뭘 해야 하는, 값을 치러야 하는 따위의 수고와 애씀은 거짓이었다. 자기 당위의 값이 매겨지는 것이다.
하루를 그저 빈둥거리듯 보낸 사람으로서 하는 변명치고는 너무 거창할까? 내 안에 이는 어떤 조바심과의 싸움이 나도 치열하다. 이래도 되나? 싶은. 한데 오히려 그래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누구를 생각한다면 이보다 초라한 은혜가 어디 있을까? 어떻게 내가 그 당시 죽어가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처럼 말해줄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 어떤 사역보다 이미 충분하다는 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26).” 믿음이 값진 것은 믿을 수 있기 때문이지 믿기 위한 것 때문이 아니다. 갓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먼저 하나님 나라로 돌아간 그녀를 생각할 때면, 목사 안수를 두 번째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내게 참으로 값지고 큰 선물이었지 않나. 그렇듯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게 하나님의 사랑이다. 공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우리의 유아기적 두려움을 그대로 안고 살아서이다.
아무런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누리는 자로 이미 충분한 것이다. 뭘 하든, 어떻든지 간에 주를 바라고 구할 수 있는 자리에 두시는 긍휼하심 말이다. 곧 오늘의 시편을 읊조리며 그에 합당한 기도를 한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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