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여 너희가 너희 땅에서 멀리 떠나게 하며 또 내가 너희를 몰아내게 하며 너희를 멸망하게 하느니라
예레미야 27:10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편 80:17-18
과연 주님의 뜻인지 아닌지, 그런 것 같은데 아닐 수도 있다는 확신과 불안이 서로 싸울 때, 그 증거는 무엇일까? 이는 내 안에 두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기뻐하시는가, 하는 점인데 이 또한 나의 만족과 그리스도의 기쁨이 혼재될 수 있다. 신념이 확신을 대신할 때, 자기만족을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으로 주장할 때, 과연 무엇으로 그 구분을 삼아야 할까? 가끔은 이를 두고 오래 생각한다. 그럴 때면 나는 수면 위의 의식보다 수면 아래의 무의식을 신뢰한다. 어떤 찜찜함, 아무도 모르는 미덥지 않음, 괜한 마음 쓰임,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아이들이 편하게 와서 마음껏 구는 것을 놓아두었다. 그럼에도 할 건 하고 바랄 걸 바라야 하는데 이를 지도하기가 쉽지 않다. 한 계집아이는 벌써 가슴이 나오고, 짙은 화장을 하며 입만 열면 남자아이 이야기다. 한 애는 감정기복이 심해서 잘 끓는 냄비 같다. 세 명의 여자 아이 사이에 낀 남자아이 하나는 늘 주눅이 들어있다.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춘다. 몸에 밴 것이다. 뭐라 하면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이 녀석들이 도를 넘어서서 아주 막 대하고 막 구는 것이다. <트루먼쇼>을 보고 ‘나는 누구인가?’ 주제를 던졌다.
수업 마치기 전 5분만, 하고 잔소리를 좀 했다. 좋은데 너무 관한 것을 두고 하나하나 아이들에게 뭐라 했다. 그런데 하필 그때 한 아이엄마가 아이를 데리러왔다가 밖에서 들은 모양이다. 아이들을 배웅하느라 복도에 나갔다가 아이엄마를 만났다. 우리 아이가 그렇게 심각한가요? 순간 당황하였다. 이미 들은 부분이 있었으니 말을 돌릴 게 아니었다. 감정기복이 좀 있다. 좀 찬찬히 상담이 필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실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하며 잠깐 아이의 일을 이야기 했고, 슬픈 얼굴로 상담도 받았었다고 말했다. 저쪽에서 아이가 기다려 말을 길게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요즘 기도중이다. 아이들이 하나 같이 병들었다. 그러게. 이성복 시인의 표현처럼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었다. 다 괜찮단다. 아이는 엄마 눈을 피해 오락에 빠졌다. 아이엄마는 더 비싼, 더 잘 가르치는, 성적만 끌어올려준다면, 하고 학원으로 애를 내몬다. 뜬금없이 남자아이에게 빠진 한 애는 그냥 친구예요, 하면서 잠시도 가만있지 못한다. 부쩍 눈에 띄게 화장이 짙어졌고 치마는 짧아졌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법이다. 아파야 하는데 아프지가 않다.
가정예배 때 하루에 있었던 아이들과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우린 저 아이와 그 엄마를 위해 기도한다. 지혜를 더해주시기를. 그러라고 우리를 여기에 두신 거라면 그에 합당한 분별력도 허락하여 주시기를. 늘 나의 기도는,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하는 것이다.
전해야 할 걸 전하고, 주의 마음이어야 하고, 주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걸 우린 늘 다짐하듯 주께 아뢴다. 왜냐하면 솔직히 난 애들이 싫다. 그 몰염치가 싫다. 애들이 순수하다는 소리는 그리 봐주는 어른의 넉넉함의 몫이지 실은 그렇지 않다. 어쩌다 내 평생이 늘 아이들과 어울리는 삶이 되었지만, 나는 애들처럼 이기적인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둘 수 있는 희망은 딱 하나뿐이다. 성장한다는 것. 자라고 성숙되어 자신의 고집을 꺾고 비로소 염치를 아는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것. ‘될 수 있다’라는 가정형서술을 한 것은 또 그게, 다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하루에도 열두 번씩 애들이 꼴도 보기 싫다. 막돼먹은 짓에 진력이 난다. 되바라진 아이가 고집도 세다. 결국 아이들과의 샅바싸움은 그 고집을 어떻게 꺾느냐, 하는 문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세 살 때 고집을 꺾을 줄 모르면 평생 그 고집이 자신은 물론 남도 괴롭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그렇게 문제가 많은가요? 하고 묻는 아이엄마의 공격적인 질문 앞에 나는 그렇다, 하고 말해주었다. 그 문제는 고스란히 엄마들 때문이다! 하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여 너희가 너희 땅에서 멀리 떠나게 하며 또 내가 너희를 몰아내게 하며 너희를 멸망하게 하느니라(렘 27:10).” 말씀의 엄중함 앞에 잠시 숨을 고른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말이다. 행여 나의 지도가 또 가르침이 거짓이면 어쩌나? 내 감정 나의 판단이 섣불리 누구를 비판하는 데 사용하면 어쩌나? 아이엄마가 밖에서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나는 부정하지 않고 ‘그렇다’고 말한 것이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 때 얼마나 정직해야 하는 것인지.
말은 곧 듣는 자의 수준까지만 말이다. 말은 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듣는 자의 것이다. 훈계가 누구에겐 잔소리밖에 되지 않을 때 그 책임은 누구의 것일까? 심각한 아이엄마의 표정을 보고, 한데 그 문제가 다들 똑같은 것이어서 곧 아이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에둘러 말을 덧붙여주었다. 나는 양해를 구하듯 5분만 싫은 소리할게! 하고 아이들에게 말을 시작하는 건 들을 준비와 말할 준비를 얻기 위한 것이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하면 편하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 그리 사람을 두시지는 않는다. 그건 회피다. 무책임한 것이고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잠 15:32).” 그러므로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으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19:25).” 이로써 빛과 소금이 되라, 하시는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쓸모없어져 밖에 버려지는 수밖에. 그러자니 자신을 녹여야 비로소 맛을 낼 수 있는 것이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같은 맥락이다.
내가 소진되지 않고 말씀을 수행할 수는 없다. 아내와 둘이 있을 때 종종 치를 떨며 아이들 험담을 늘어놓는다. 지긋지긋하다. 어쩜 애가 그 모양일까? 말 그대로 싸가지가 없다. 꼴도 보기 싫다. 그러니 애 엄마는 더한다. 싸가지는 싹의 순을 말한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을 보면 안다고, 싸가지가 없다는 말보다 무서운 말도 없겠다. 그러다보면 안쓰러움이 또는 저 아이들의 어쩔 수 없음이 우리 마음을 채운다. 안 됐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신발주머니에서 담배가 나와 교무실에 불려갔다. 알고 봤더니 아이엄마가 어쩌다 거기 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섬뜩하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 내가 너희를 몰아내리니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멸망하리라(렘 27:15).” 좀 풀어서 생각해보면 선생이란 직업이 가장 근사치의 값을 요구한다. 사명감을 운운하는 까닭도 그래서다. 아내는 나보다 훌륭하다. 나는 이제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아이들을 건사하는 데 있어 마음에 주목할 수 있게 됐다. 교육비가 전제되면 장시치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돈 때문에 애도 있다.
아내는 언제나 돈은 돈이고 아이는 아이라는 원칙을 고수한다. 받을 건 분명히 받고 해줄 수 있는 건 별개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중등부 아이들 공부를 격려하기 위해서 우리 집 냉장고에는 피자며 아이스크림이 있다. 졸고 있는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주는 격이다. 두런두런 사내 녀석들도 속엣 얘길 그렇게 하는 걸 보면서, 당신이 목회를 한다고 나는 늘 말해준다. 늘 보면 지질이도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학교에선 왕따에 가까운 아이들만 온다. 이상하다 싶게 하나님은 그런 아이들로만 붙이신다.
‘철저하게 성경적이며,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으로, 급진적인 제자’가 되기를 원한 존 스토트 목사의 <새 사람>을 읽고 있다. 로마서 5-8장을 본문으로 심화한 말씀 강해서다. 난 누구의 표현인지 저의 앞에 붙은 수식어를 노트에 적어두었다. 철저하게 성경적인 삶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무엇보다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누구보다 급진적인 주의 제자이다. 죽으라면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광신자다.
그러려면 그 기본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나름 다들 주의 이름을 팔아서 누군 태극기를 들고 누군 촛불을 들고,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이 땅에서 우리가 대놓고 편 가르기를 일삼는 이때에 나는 무엇으로 그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 80:17-18).” 주가 나를 붙드셔야 할 일이지 내가 주를 붙든다고 백날 설쳐봐야 소용없다.
그러자면 잠잠히 좀 더 잠자코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내가 나서서 아이엄마에게 뭐라 일러준들 저들은 싸우자고 들지 결코 귀를 기울지 않는다. 내가 나서서 아이를 챙기고 주일을 채근한다고 해서 저가 예배에 나오나? 그저 가슴에 품고 그러지 못하는 저 아이의 딱한 상황을 주께 고하는 일. 하물며 나야말로 ‘너나 잘하세요!’ 하는 처지이다 보니, 주눅들 거 없다. 나 하나 주 앞에 바로 서는 게 사명이다. 주가 붙이신다. 싸워야 하면 주가 싸우신다. 다독이고 붙들어야 하면 주가 손을 얹으신다. 나는 아이엄마와 아이를 생각하며 그리 기도하였다. 오게 하시든 말게 하시든, 오해가 생기든 진실이 통하든. 주가 하신다.
나는 다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나를 깨끗하게 하는 일. 내가 주 앞에 바로 서기를 바라는 만큼 주께서 하실 것이다. 이것이 나의 행복한 확신이다.
그러므로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 80: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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