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전봉석 2017. 9. 22. 07:22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예레미야 28:13, 15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시편 81:11-12

 

 

 

하늘은 쾌청하였고 바람은 선선하였다. 어느새 그늘 아래는 차가웠다. 점심을 먹고 혼자 영화관에 가서 김영하 원작의 <살인자의 기억>을 보았다. 소설 특성상 트릭(trick)을 통해 사람의 내면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나는 돌아서 나오며 고개를 갸웃하였다. ‘소설은 의식의 퓨즈가 서서히 끊어지는 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읽힐 수도 있지만 의식의 퓨즈를 끊고 싶어도 이을 수밖에 없었던 이를 중심으로 지체된다고 읽힐 수도 있다.’ 돌아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뒤에 붙은 허윤진의 해설에서 그리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공교롭게 그리 됐다. 상을 또 탄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함께 주문했던 것이 마침 한날에 당도하였다. 사람을 관찰하고 세계 저편을 엿보아 들추는 이가 소설가들이다. 기이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실제 우리 내면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감추지 않는 이들이다. 실제 우리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산다. 나만 해도 내 본심을 다 들추어 보이고 산다면 그야말로 엽기적인 행각이 하루에도 수골백번은 자행될 것이다.

 

그래서 불편하였다. 꼭꼭 숨겨두고 사는 내 안의 괴물을 마주한 듯, 평일 한낮에 나를 포함한 네댓 명뿐인 관객이 그 큰 영화관에 앉아 그런 마음이었을까? 그러게. 나는 자꾸 슬펐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일에 대하여 그 죄스러움과 억지스러움과 괴기스러움이 말이다. 소설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실상을 맞닥뜨리게 함으로써 당황하게 한다. 뭐지? 싶으면서 낯설지가 않다. 그와 같은 충격은 대중의 몫이다. 허윤진은 ‘의식의 퓨즈가 나가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의식의 퓨즈를 잇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한강의 소설 뒤에 덧붙였다.

 

무엇으로 행복을 구사하며 살 것인가. 하나님께 지음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이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어거스틴의 말이 옳다. 나는 이제 이쪽에 서서 저쪽을 본다. 오늘 아침 말씀이 새삼 충격적이지가 않은 이유다.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렘 28:13, 15).”

 

가짜가 더 진짜 같다. 하지만 이 말은 거짓이다. 가짜는 어김없는 가짜다. 이를 진짜로 대신하고 싶은 것이다. 실은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말이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믿고 그리 여기며 살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은 아니다. 존 스토트의 <새 사람>을 같이 읽어서 그런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 말씀이 유난히 값지게 읽혔다.

 

죽었다 깨어나도 우린 의롭지 못하다. 수십 명을 살인한 사람만 괴물일까? 저의 안에 있는 미움만이 잔인하고 기괴한 것일까? 고백하지만 나는 숱하게 사람을 죽인다. 어떤 명분도 이유도 없다. 걸어가던 두 녀석이 장난처럼 주고받는 말에서도 온갖 욕설이 오가고 몇 번씩 살인을 저지른다. 그게 그거랑은 다른가?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왜 영화의 소재가 점점 기이하고 엽기적이며 음란의 도를 넘어서냐 하면 그야말로 대리만족이다. ‘아침 드라마’ 꼴로 막장을 걸을 때 관객이 든다. 흥행을 하고 찾는 이가 는다. 우리 안에 그 이상의 괴물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내가 저 살인자 그 이상의 죄인이라는 걸 고백하는 자리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는 것이다. 난 아니다, 하고 말하는 자의 결과는 다를 바 없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이를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게 기적이다. 새삼 확신한다. ‘믿음으로’ 나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 아니면 도대체 살 수가 없다. 악하다. 악해도 너무 악하다. 이를 교묘하게 역이용하여 그것으로 선을 도모하는 이 시대의 하나냐가 얼마나 많은가?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우린 이를 알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먼저 바로 알아야 한다. 자신의 실체가 그 기괴한 역사가 얼마나 끔찍한지 말이다.

 

아이엄마가 뿔딱지가 나서 중1 사내아이를 때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거짓말을 하고 학원을 빼먹고 못되게 군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럴 바엔 학교고 학원이고 다 때려치우라며 아이를 닦달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매를 맞고 울면서도 공부방은 계속 다닌다고 했다나. 사정 얘기를 하면 그냥 오게도 한다면서 또박또박 말대꾸를 했던 모양이다. 아이엄마는 하도 어이가 없어 아이를 때리고 야단치다 말고 웃어버렸다나. 아내는 저의 전화를 받고 피식, 웃으며 또한 어이없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세 인물의 세계 저 안쪽은 얼마나 복잡한가. 우린 어떤 영화를 보고 또 소설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의문을 제기하지만 실제 그 이상의 괴이한 일이 날마다 매순간 내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숱하게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면서 나는 실제가 아니라고 우겨댈 것인가. 그러니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그럴 수 있는 자로 나를 이쪽에 세우신 것에 대하여 나는 안도한다.

 

그렇다면, 바울의 요지는 간단하다. 그것 때문에 미치는 환난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3-6).”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 이것이 아이러니다. 예상 밖에 모순이지 않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즐거워하면 그것으로 만끽하고 살면 좋겠는데, 여전히 육신을 입고 이 세계에 사는 동안에는 그것 때문에도 환난은 필연 되다. 나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미움을 느낀다. 누가 엘리베이터를 늦게 닫을 때, 소리 내어 껌을 씹을 때, 담배연기가 내 쪽으로 올 때, 무심히 쳐다볼 때, 죽을래? 하고 한 녀석이 욕을 하자 다른 한 녀석이 더 걸지게 응수하듯이 나는 날마다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한다.

 

여기서 오는 고통을 이제는 안다. 마음이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여, 나는 환난 중에 인내를 배운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이제는 안다. 앎으로 이 소망이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마음에 부음 바 되어 내가 여전할 때에, 경건하지 못한 그때에 나를 위해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는 이제 의인이 되었음을 말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러니 오늘 날 나는 어찌 살아야 하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시 81:11-12).” 그러는 저 세계가 내 이면의 세계인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환멸과 고통 가운데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이 참으로 복되지 아니한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영화를 보면서 불편하고 불쾌하였던 게 실은 나의 내면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아서였다. 책을 읽으며 소설 장치 뒤에 감추고 있는 나의 실상과 맞닥뜨렸을 때의 당혹스러움에 대하여도, 나는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니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자로 여기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시 81:7).”

 

그러므로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9).” 나보다 더 큰 우상이 또 어디 있겠나.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나는 아이들 하나하나 종이에 적어 그 아이의 어려움을 짐작하였다. 이를 두고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 아이들이 살아야 하는 이 세계의 악랄함에 대하여, 부디 주께서 붙드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주를 알게 하시고 주를 앎으로 평안을 누리게 하시기를.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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