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2 주일
여호수아 7:26
아골 골짜기
7:26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들어가는 말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죽었다. 여호수아는 막중한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내가 어찌 저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저에게,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첫 번째 당면한 어려움은 요단을 건너는 일이었다.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3:8).” 이는 산술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그 시기는 물이 범람할 시기였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그러니 이를 어쩐다? 물러설 길이 없다.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15).”
주님은 순종을 요구하신다.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16).” 성결을 요구하신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5).” 순종은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다. 이에 성결은 준행의 결과다
두 번째 문제는 막강한 성 여리고와의 전투였다. 준비는 두 가지, 먼저는 신을 벗어라.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5:15).” 내가 의지하고 붙들고 있는 것을 벗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은 입을 다물라.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6:10).”
내 안의 의구심은 말을 많이 하게 한다. 따지고 재고 손익계산을 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가장 어려운 걸림돌이다. 생각이 많으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으면 모색하는 바, 자기 상식을 의존하게 된다.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15-16).”
여리고 성이 무너지다
거대한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 엄청난 승리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게 입증되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다음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마지막으로 승리는 하나님의 것임이 입증되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고 승리하는 삶을 살 때, 그 확실한 증거는 가히 불가항력적인 일임을 체험한다. 초자연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불가능한 일이 너무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내가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확실한 증거다. 순종이 값지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된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것도 말이다. 주변에 알려지고, 나는 우쭐하게 한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수 6:27).”
작은 성 아이에 패하다
아이 성을 정탐하고 돌아온 이들이 보고했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3).” 가소로운 것이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판단을 따랐다. 백성들의 판단을 믿었고, 아간의 판단이 저를 패하게 하였다.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7:4-5).”
아간의 범죄는 단순하지 않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1)” 먼저는 자아도취가 아이 성 함락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하였다. 방심했던 것이다. 또한 아간의 사소한 도적질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간의 범죄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21).” 실은 별 거 아닐 수 있다. 그 엄청난 여리고 성을 함락하면서 전리품으로 몇 개 가져오는 건 어쩌면 승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다. 한데 저의 불순함이 여호수아의 경솔함과 맞물려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고작 ‘아름다운 외투 한 벌’이다. ‘은 이백 세겔’과 ‘금덩이’ 하나다. 가나안 초입의 가장 막강했던 성 여리고를 함락시키고 가져온 것 치고는 오히려 초라하지 않은가. 우리는 이럴 때 그럴 수 있지! 하는 반감이 든다. 그럴 수 있지.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정도가 무슨 대수라고! 그럴 수 있지! 결국 그 전쟁을 우리가 이겼다고 여기는 한 그럴 수 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면 그럴 수 있다. 나의 돈, 나의 시간, 나의 열심을 주께 헌신한다고 여긴다면 그럴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이 ‘그럴 수 있는’ 것과의 싸움이 필연적이다.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11).” 그는 명령을 어겼다. 그리고 온전히 바쳐야 하는 것을 도둑질 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였다.
아골 골짜기
주 앞에서 작은 죄란 없다. 저는 그것을 장막 밑 땅 속에 감추었다.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21).” 자기 잇속을 먼저 챙긴다. 죄가 들어온 후 가장 확실한 증거다. 자기 살 궁리를 하는 것이다. 처음 사람도,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변명은 우리가 깔고 앉은 방바닥이다.
다음은 견물생심이라. 보면 탐나게 돼있다. 탐나면 거짓을 도모하게 돼있다. 저절로 그리 된다. 겨우 외투 한 벌이다. 은 몇 세겔, 금덩이 하나 정도. 어마어마한 성을 함락하고 몰래 취한 전리품 치고는 오히려 초라하다.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신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6:2).”
내 안의 아간은 내 의지다. 내 수고와 노력이다. 그에 따른 보상이다. 마땅한 것이다. 인지상정이다. 자기 위로다. 이 정도는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스스로의 관대함이고 하나님께 대한 완고함이다. 성결 하라. 여리고를 무너뜨리기 전 하나님의 명령이셨다. 하나님이 전투하셨다. 내가 싸운 게 아니다. 잘 알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인생의 책임져야 할 것 같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이와 같은 다윗의 기도는 단순히 허무주의의 토로가 아니다. 그 덧없음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내려놓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아간의 범죄는 실수가 아니다. 단순한 우발적 행동이 아니다. 광야 40년 내내 그처럼 털어내고 씻어버리려던 자기 의지였다. 자기 수고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나오는 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선 줄 알면 넘어진다. 이제 좀 됐다, 싶으면 무너진다. 수시로 이와 같은 현실에 우리를 두신다. 맹랑한 신앙에 도취되지 않게 하시려고. 결코 우리의 승리가 아니었음을. 출애굽하여 나온 것도 우리의 공적이 아니었음을. 긴 광야 40년을 우리의 아집과 기질로 완고함을 벗어냈다면,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옛 성품을 마주하게 하신다. 회의와 갈등, 의심과 불순종의 아골 골짜기로 우리를 내모신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란 그저 평안한 삶이 아니었다. 싸울게 더 늘었다. 내 안에 온갖 거짓과 탐욕과 어리석음이 가득하다는 것. 성령과 함께 하면 할수록 싸우고 무찔러 걷어내고 들어내야 할 게 끝이 없다는 것. 하나님은 우리를 아골 골짜기에 세우신다. 내 안의 아간을 마주하게 하신다. 자기 노력에 따른 보상이 부질없다는 걸 알게 하시려고. 나의 본심을 숨기고 살 수 없게 하신다.
비로소 감사만이 성도의 영예가 된다는 것을. 결국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시려고. 오늘도 아골 골짜기를 지나게 하신다. 비로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살 수 있다’는 알게 하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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