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전봉석 2017. 10. 10. 07:2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종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나라들은 다 멸할지라도 너는 사라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 46:28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시편 98:2

 

 

 

죄인은 용서하셔도 죄는 용인하실 수 없는 하나님.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처녀 딸 애굽이란 표현에서 모든 민족에 대한 주님의 애착을 느낄 수 있다. 저가 아무리 어떻다 해도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성경의 기본 원리다.

 

한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이를 알 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긴 명절 연휴였다. 점심께 아내가 글방으로 나와 공부를 했다. 중3 아이 수학을 가르치는데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애가 바닥을 쳐주니까 다행이지, 아내는 푸념처럼 혀를 끌끌 차며 교육방송을 들었다. 하루가 느리게 지나갔다. 햇살이 고와 실내는 더웠다. 새로 생긴 베트남 쌀국수 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이웃하고 있는 조산원에서 과일을 한 접시 내주었다. 이래저래 융성한 명절이었다. 어쩌다 양력 생일이 끝물에 겹쳐 오랜만에 연락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빈둥거리듯 챔버스의 <주의 형상을 본받아>를 읽었다.

 

‘거룩한 삶의 적은 잘못된 일에 대한 염려이다.’ 저의 말을 메모하고 오래 생각하였다. 그렇겠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9).” 왜 꿋꿋하게 자라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뚜렷한 것이다. 의연함이란 의연해서 의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염려와 근심을 주 앞에 내어놓으니까 가능한 것이다. 사는 날 동안 어찌 염려와 유혹과 욕심이 들지 않을 수 있겠나. 철저히 나는 할 수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며 주께 내어놓는 것.

 

그리하여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한다는 성경의 원리를 다시 확인할 수 있겠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여기서 사랑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것이다. 내 안에 두신 사랑. 예수의 영. 내 안에서 끊임없이 나와 다투시는 이. 그 사랑이 나로 하여금 무례히 행하지 않게 하시며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게 하신다. 성내지 않게 하시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게 하신다. 그러니 그 속이 얼마나 시끄러울까.

 

그리스도인이 되어 평온한 삶을 산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내가 아는 바 누구보다 자기 싸움이 치열한 자들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렇다. 아무도 뭐라 하는 이 없는데 자꾸 내가 나를 뭐라 한다. 부대껴 못살겠다. 씨름하다 지쳐 돌베개를 베고 잠든다. 그래서 단 한 시도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거였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나의 의연함은 내 안의 치열함의 두께만큼 진중하다. 그러할 때,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그럴 수 있는 거였구나. ‘무엇에든지.’ 이게 그러니까 나의 노력과 수고로 가능한 게 아니었다. 아!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퍼즐조각처럼 떼어놓고 다시 붙여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나의 관용이라 하면 너그러움을 일컫는 말인데, 속된 말도 세상의 너그러움은 돈에서 나온다. 우아도 교양도 돈이 있어야 우리 안에 살림을 꾸린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가 누구에게 너그러울 수 있나. 각박함은 사느라 찌든 떼다. 강퍅함은 그에 따른 몸부림으로 발악에 가깝다. 그러니 나의 관용은 무엇으로 쌓을까?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 주가 내 안에 두시는 너그러움이다. 내가 이루어 쌓은 덕이 아니다. 나는 생각하고 마음먹을 뿐, 이를 지키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내 안에 생각을 두시는 이를 나는 신뢰하는 것. 내가 그렇다는 걸 주 앞에 감추지 않는 것. 무엇에든지, 나를 슬프게 하거나 노엽게 하는 모든 것들에까지도,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9).”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 주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나를 대신해 죽으셨고, 살아나셨고,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

 

그러므로 내가 의연할 수 있게 되는, ‘의연한’이 아닌 ‘의연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 원리,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 구할 것을 구하는 것으로 감사가 이뤄지는 일이다. 한가로이 나는 책을 읽고 아내는 교육방송을 들으며, 오후를 느긋하게 보내다보니 문득 석영이 지고 어둑어둑 저녁이 되었다. 나로 하여금 기쁨이 서로 다른 것을 알게 하시는 하루였다.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갈 1:16).” 내가 이와 같이 말씀을 말씀으로 이어가며 즐거워할 줄도 알고 재미지게 여길 줄도 아는 것이다.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여기가 좋사오니’ 아침에 이처럼 묵상하는 시간만큼만 하루가 거룩하였으면 좋겠다. 마음이 평온하였으면 좋겠다. 즐거웠으면 좋겠다. 그런데 주님은 또 나를 재촉해서 산 아래로 내려가게 하시겠지? 어디가 자꾸 아픈 몸뚱이와 밀린 공과금과 그에 따른 공연한 염려와 유혹과 근심이 나를 쥐고 흔드는 지긋지긋한 현실의 바닥으로 내려가게 하실 것이다. 부대끼고 맞닥뜨려 싸우고 또 서러워하는 동안 나는 더욱 간절히 주를 바라며 사모하는 훈련을 한다.

 

그러는 동안에 온전함은 이루어져 가는 것이겠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또한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15).” 각각 표현되는 ‘온전히’는 다르다. 12절의 ‘온전히’는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내 삶에서 이룰 수 없는 온전함이다. 그러나 15절의 ‘온전히’는 지긋지긋한 삶의 현장에서 부대낌으로 얻은 결과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 그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내가 아니라 내 안의 사랑이 말이다. 나는 못해서, 못함으로 처절하게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하여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천국은 공평하나 누림은 차등이 있다는 것. 다 좋은 걸, 모두가 좋아하면서도 그 누림은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는 것. 나는 아내에게 그리 설명해주었다. 천국에 갈 자들은, 가령 가장 좋은 자동차를 선물로 받을 것을 아는 자들이다. 그걸 알면서 누군 운전면허도 따놓지 않고, 비록 여기서는 성능이 조금 떨어진다 해도 여기 있는 자동차로 조작하고 운전하며 그 활용을 익히는 데 여념이 없지 않겠나? 가장 좋은 자동차를 선물로 받을 것이란 믿음이 있다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저는 믿는 게 아니거나 지극히 어리석거나.

 

선물을 두고 누군 그저 와, 좋다! 하는 정도로 그 좋고 좋음을 다하지만 누군 그것을 마음껏 활용하고 즐겨 더욱 만끽할 수 있는 게 천국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내에게 나는 좋고 좋은 그 선물의 활용법을 설명해주느라 애를 썼다. 곧 우리가 지금 ‘주님 때문에’ 잠시 받는 환난은 지극히 가벼운 것이다.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과 비교하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잠깐 보이는 것에도 이처럼 목숨을 걸고 죽기 살기로 덤비면서 보이지 않는 영원함에 대하여는 어찌 그리 무덤덤한지. 둘 중 하나이지 않겠나? 믿지 않거나 자라지 않거나.

 

믿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이고, 자라지 않는 것이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9).” 이를 주 앞에 내어놓는다는 게 무책임한 일인 것 같으나 이보다 더 확실한 책임은 없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헛것으로 그만인 것이면? 그것으로 인생이 허망하게 끝나는 것이면? 그렇다 해도,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주님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것보다 더 막중한 책임이 또 있을까? 내 전부를 건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종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한 마디에 모든 염려가 사라지는 게 아닌가. “내가 너를 흩었던 그 나라들은 다 멸할지라도 너는 사라지지 아니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내 죄를 용인하지 못하시는 것이지 죄인 된 나를 용납하지 못하시는 게 아니었다(렘 46:28).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되어 죄인 된 나로 죽으시고 다시 사신 나로 내 안에 거하시는 게 아니었나!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시 98:2).” 말씀의 접합점은 언제나 구원이다.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려고 오늘도 나를 이끌어 삶의 현장에 세우신다. 산다는 그 일이 어째서 고달픈 게 되었는지. 그 죄의 결과가 얼마만큼 참혹한 것인지.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이로써 ‘그의 공의’를 나타내신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 주를 바라는 것 외에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게 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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