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전봉석 2017. 10. 12. 07:11

 

 

 

모든 사람이 대머리가 되었고 모든 사람이 수염을 밀었으며 손에 칼자국이 있고 허리에 굵은 베가 둘렸고 모압의 모든 지붕과 거리 각처에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니 내가 모압을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 같이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48:37-38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편 100:3

 

 

 

모압은 농산물이 풍요롭고 중개무역이 원활했다. 그와 같은 풍요를 그모스 신의 보호 때문이라고 여겼다. 저들은 이스라엘을 수시로 대적하였다. 현실적인 충족감이 경배의 대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어제 가정예배로 아내와 같이 읽은 부분도,

 

“…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44:17-18).”

 

하는 식의 미신적인 종교행위, 신앙을 말씀은 늘 경계하신다. 가령, 나는 이와 같은 상황을 자주 목격한다. 전날에 나는 은혜로 충만하였다. 감사로 인한 만족감이 내 안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몸이 너무 아팠다. 진통제를 먹고 속이 볶였다. 8년 만에 정신과로 가서 안정제를 받았다. 늘 같은 진단이었다. 체질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육체라, 남들보다 좀 더 예민하게 느끼는 것을 어쩌겠는가. 다른 해결책이 있는 게 아니었다. 나빠진 건 아니고, 내성이 쌓인 것도 아니니 다행이었다.

 

전날에 정형외과에서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 나를 우울하게 하였다. 하나님은 내가 은혜에 젖어 이를 우상화하는 것을 막으신다. 감사를 감사로 숭배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다. 돌려세워 현실에 두신다. 당면하고 부딪쳐야 하는, 변화산 아래에서의 삶이다. 내가 딛고 마주하고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이 땅의 현실에 두신다. 시무룩하여 불 꺼진 글방에 돌아와 누웠다가 새삼 알았다. 신앙은 삶의 현장에 있는 것이지 생각과 마음에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여기가 좋사오니. 주님은 결코 그렇게 두지 않으신다. 풍요는 우릴 병들게 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감사도 마찬가지다. 무엇에 동화되어 감탄에 젖은 고백으로 그치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우리의 믿음은 ‘복 받고 재난 당하지 않아’ 잘 되니까 좋다, 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러자고 예수를 믿는 것도, 그러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지도 않으신다. 나는 새로 받은 안정제 알약을 보며 생각했다.

 

하나님은 나를 현실로 이끄신다. 뜬구름 잡는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황홀경에 빠져 홀로 독처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말씀을 읽고 깊은 은혜를 누리며 돌아설 때, 공연한 일로 아내와 다투게 된다거나. 기껏 감사만으로 감사하겠구나, 하는 심정이었는데 나의 육신으로 허락하신 현실에 맞닥뜨리게 하신다. 공연한 일에 마음이 상하게 하시고, 또 본래의 불평과 원망으로 나를 내어놓으신다. 마치 변화산에서 흠뻑 주님의 변화된 모습에 심취하였다가 그곳에 그대로 머물기를 원하던 제자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오시는 주님 같다.

 

그리곤 마주하게 하신 게 많은 무리 가운데서도 ‘말 못하게 귀신 들린’ 자이었다.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17-18).”

 

전날에 넘치던 감사가 어디 갔나, 싶게 나는 마음이 우울해졌다. 딸애는 연휴 끝물에 감기에 걸렸고, 아내는 기껏 잘 다니던 아이 둘이 다퉈서 서로 그만 다니네 어쩌네 시끄럽게 되었다. 돌려세워 현실을 두시는 것이다. 주만 바라고 주만 의지한다는 건 허황된 자기만족이 아니었다. 비로소 주만 바라고 주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두심으로 좀 전의 나의 감사가 또 황홀했던 고백이 실제가 되도록 하신다. 스스로 위안이 되고 다른 이의 어떤 경탄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자신의 잘못과 아집을 해로 여긴다는 소리보다, 나름 잘 믿고 충성되이 순종하였구나 하는 자기만족을 해로 여김이다. 그런 거 없다. 오로지 예수를 아는 지식만이 가장 고상하다.

 

나의 체험도 놀라운 신앙고백도 다 배설물처럼 버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다. 내가 믿는 게 아니라 나로 하여금 ‘믿게 하시는 이’의, 내주임재하심에 대해,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 신앙은 현실이다. 믿음은 막연한 붙듦이 아니라 지독하고 끔찍한 현실에서의 실제다. 이게 아니면 죽는 게 나은, 처절한 절박함이다. 철저히 주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주님은 나를 내몰아 세우신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엉뚱한 데 기웃거리던 마음을 다잡게 하신다. 하나님밖에 없음을. 존경스러운 누구의 삶도 또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도 아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그렇지!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렘 3:23).”

 

마음의 위로나 평안을 얻는 정도에서 신앙을 운운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 잘 되고 잘 풀리니까, 어쩐지 그래서 신앙을 바라고 취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 정도라면, 저들처럼 남방의 여신이 훨씬 설득력이 있고 풍요와 안정의 그모스 신이 제일이다. 사주를 보고 관상을 보면서 어떤 말 한 마디에 위로를 얻는 식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경우가 얼마나 흔한지 모른다. 나는 의사의 말 한 마디에 절망하였다. 어쩔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어쩔 수 없음을 저들에게 바란들 무슨 소용이 있나. 그걸 들고 주 앞에 설 때도 조심해야 한다. 자칫 황홀한 감사로 족한 경우는 뜬구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독한 현실, 말 못하는 귀신에 들린 자 앞에 세우시는 이유였다. 주만 바란다는 건 처절한 현실에서의 부대낌이고 끌어당기는 현장에서의 사투다. 병원을 나와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면서, 불 꺼진 글방에 들어가 널브러지듯 소파에 몸을 던지면서, 좌절이랄까 혹은 서글픔이랄까, 어떤 알 수 없는 슬픈 감정이 나를 휘몰아칠 때. “이로 말미암아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전 4:17).”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게 하시려고, 주만 더욱 바라고 의지하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이로 말미암아, 비로소, 감사함으로, 찬송함으로,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5).”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시는 거였다. 그래서 알게 하신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

 

나를 지으신 이가 누군지. 내가 누구의 것인지. 뭐하는 사람인지. 왜 오늘에 두시는지. 여기가 어딘지. 나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혀를 끌끌 차는 아내에게 뭐라 더 길게 설명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뭐래? 하는 말에, 나는 더 이상 ‘뭐래’가 아닌 ‘뭐라 하던’에 방점을 두었다. 감사로 받자. 버릴 게 없다. 감동이 있는 후에 하나님은 일부러 절망을 마주하게 하셨다. 변화산 아래로 내려오자 가장 먼저 마주해야 했던 게 귀신 들린 사람이었다.

 

특별한 또는 나만의 체험 앞에 머물게 두지 않으신다. 간증이 허상을 꿈꾸게 하지 않으신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으로 삼으려는 나의 모든 것을 경계하신다. 슬픔과 고통까지도, 그것으로 남다를 거 없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가 기르신다. 나는 일찍 돌아누웠다가 잠들었다. 역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잘 자고 일어났더니 거뜬해졌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가 필요하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게 두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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