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전봉석 2017. 10. 11. 07:35

 

 

 

오호라 여호와의 칼이여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네 칼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쉴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를 명령하셨은즉 어떻게 잠잠하며 쉬겠느냐 아스글론과 해변을 치려 하여 그가 정하셨느니라 하니라

예레미야 47:6-7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편 99:1

 

 

 

바벨론을 들어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치시고 그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은 바벨론을 애굽이 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암 1:6).” 이를 보며 주의 역사하심 앞에 무릎을 꿇는다. “여호와께서 이를 명령하셨은즉 어떻게 잠잠하며 쉬겠느냐 아스글론과 해변을 치려 하여 그가 정하셨느니라 하니라(렘 47:7).”

 

하나님의 관심은 온전히 하나님의 자녀이다. 에돔으로 애굽으로 비유되는 저들은, “오호라 여호와의 칼이여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네 칼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쉴지어다(6).” 도구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에 대해 순복하지 않는 선은 그 어떤 악보다 악하다. 스스로 무얼 도모하고 어찌 의를 이루고자 하는 것보다 악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선과 의보다 언제나 의로우시고 선하시며, 우리의 그 어떤 악도 하나님의 사랑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의 타당한 죄란 있을 수 없다.

 

상식으로 죄를 이해할 수 없듯이 이해와 상식으로 주의 사랑을 헤아릴 수도 없다. 저들을 들어 주의 백성을 바로 잡으시는 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듯이 돌아오는 탕자에게 그 어떤 자격을 요구하지도 않으신다. 그저 기쁨만으로 족한 것이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저가 어떤 행위를 또 삶을 개선하였다면 그것이 의로 여겨져 자신을 무장하게 했을 터, 형의 마음은 그러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8-30).” 어떤 수고, 어떤 애씀이 자신의 자격이 될 때, 아버지의 은혜는 지불한 내 수고의 값만큼 가치를 띤다.

 

감사만 해. 하는 누나의 말이 나는 무거웠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19).” 그 심정이었다. 늘 나는 받기만 하여서, 그에 비해 너무 하는 게 없어 송구하기만 한데. 송구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애쓴 만큼 무얼 더하거나 빼면, 늘 아버지와 함께였다는 게 사사로운 게 된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31).”

 

딱 그 순간, 읽고 있던 부분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와 그 형 이야기였다. 나는 늘 말씀을 읽다보면 소름이 돋는다. 내 이야기지 않나. 탕자나 그 형도. 십 수 년 된 보조기를 교체하게 되었다. 말이 나오기 무섭게 너무 속전속결로 이루어져 어안이 벙벙했다. 가격은 십년 전에 비해 배가 오른 셈이다. 보조금 37만원을 제하고도 150이 들었다. 서너 군데 업체를 선정하여 상담하며, ‘주가 보내시는 자’로 하기로 했다. 저가 10만원을 빼주고 3만을 퉁쳐 130에 맞추었다. 위임장을 써주면 37만원 받는 보조금은 자신이 갖는 걸로 계산했다.

 

것도 그리 된 게 내가 뭘 어떻게 한 게 아니라 저가 다 알아서 그리 일처리를 하였다. 누나는 바로 그 큰 금액을 입금하였다. 빼도 박도 못하게. 예전에 신학을 공부하게 하실 때도 그런 식이었다. 생전 우리가 그런 사이가 아닌데, 어떤 이가 나를 설득하는 것이다. 신학을 마저 공부하시라. 학비는 내가 다 대겠다. 한데 그게 말이 되나? 우린 모 통신 모임에서 한두 번 만났을 뿐인 ‘회원 사이’였다. 당장 부모님 밀린 의료보험 300도 못 내고 있는 처지다. 나는 그것을 빌미로 거절할 거였다. 한데 그는 다음 날 만나자고 하더니 그 자리에서 300을 건넸다.

 

신학교에 편입을 하고 5학기를 다니는 동안 저는 때마다 등록금과 책값을 보내왔다. 난 그때 엉터리였다. 술 담배도 끊지 못했었고, 왜 다녀야 하나 싶으면서도 ‘그냥’ 했다. 신대원 목회자 과정이 아닌 석사 과정으로 슬쩍 방향을 튼 것도 그래서였다. 딱 거기까지. 그렇게 다시 1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걸 당신에게 건넸을 뿐이다. 어쩜 내가 더는 부담스러워 할 때 저가 했던 말이다. 그리고 우리 사이는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갔다. 어찌 서로가 소원해졌는지 모르겠다.

 

늘 보면 하나님은 일방적이시다. 내 죄와 허물을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돌아서면 용납하신다. 어떤 자격요건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0-21).” 나는 자꾸 몸 둘 바 모르겠어서 어찌 표현해야 할지 먹먹해하는데, 감사만 해라. 하는 누나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97학번으로 신학교를 편입한 후 4학기를 공부하고, 신대원 목회과정을 했어야 하는데 나는 <역사 신학>이라는 일반 대학원 과정을 선택했다. 목사가 되기는 싫었다. 감사만할 줄 몰랐던 것이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싶은, 면목이 없다는 겸양 쩍은 마음은 사실 거짓이었던 것이다. 교만이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나름의 상식이었고 논리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은혜를 갚으려 할 때 거짓이 먼저 들어온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섬겼다, 명을 어기지 않았다, 하는 자기 의가 아버지의 의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감사만 해. 할 때 이 ‘감사만’이 참된 순응이었구나. 미안함이나 송구함이 드는 마음은 마땅한 것이겠으나 그것으로 무엇을 대신하려 드는 것이 위선이었고 거짓이었고 교만이었다. 나는 오후 내내 연거푸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말 그대로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정형외과 처방전을 첨부해야 한다는데 가까운 병원마다 거절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저 앞에 한 곳은 가능하다고 하여 갔을 때, 거기가 늘 그렇게 물리치료니 통증을 잘 봐준다던 병원이지 않나. 간 길에 며칠째 등짝이 아파 고생하던 걸 말하고 주사까지 맞았다.

 

돌아서 나오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감사만 해. 이 한 말의 무게가 얼마나 값진가. 나는 도통 감사도 못하고 사는 위인이지 않았나. 감사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사용하곤 했지만, 정말 감사만 할 수 있었을까? 자꾸 뭐라도… 하며 드는 죄송함은 왜곡된 나의 의를 이끌어내기 일쑤였다. 이 정도는 해야, 싶은. 내가 여기까진 했는데, 싶은. 그래놓고는 그걸 의로 삼아 ‘나는 섬긴다고 섬겼다. 말씀을 따른다고 따랐다.’ 하는 탕자 형의 억울함을 안고 있던 것이다. 아, 그런데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어느 때나 사랑하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나름의 도리를 운운하며 결국 신대원을 포기하고 말았을 때도, 이내 10년의 세월을 또 돌아서 오는 과정에서도. 징글징글 맞은 나의 불순종은 그때마다 명분을 내세우고 나름의 의를 도모하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하는 기준을 만들어 남을 정죄고 비난해도 정작 자신은 그것을 핑계로 ‘염치가 없어서’ 하는 식의 꽁무니를 빼고 산 게 아닌가.

 

하나님은 나의 어려움을 허용하시지만 작정하시는 건 아니다. 보면 그가 다 내 탓이지 하나님 탓이 아니었다. 물론 나는 아버지를 탓하는 큰아들이었다. 동생 탕자보다는 낫다고 여기면서 나의 의를 주목했다. 그것으로 순종을 이루어가는 게 아니라 불순종을 일삼으면서. 그런데도 주님은 나를, 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고통을 허용하심으로 돌이켜 주를 다시 바라보게 하신다. 그리하여 도식적인 관계, 감사하니까 뭔가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로 맺어지기를 참고 또 기다리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그렇구나. 그래서 더는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날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곧 하나님과의 인격적인관계란 하나님이 그러셨다면 그리하신 덴 다 그만한 뜻이 있음을 알게 하시려고, 어떠하든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놓치지 않게 하시려고. 현실 너머의 세계를 살게 하시려고. 내 몸에 가시를 두신 게 왜 그것이 복이었는가, 이제는 조금 알겠다.

 

늘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하나님이 특별히 너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곤 하셨다. 대체 이 고통이 어려움이 난감함이 어째서 사랑이란 말인가? 바로 그 고통 이면의 주의 사랑을 알게 하시려고, 그것으로 더 크고 복된 주님의 은혜를 받고 누리며 살게 하시려고, 저 천국은 그와 같은 곳이어서 행여 죄송하고 송구한 마음으로는 단 한 시도 살 수 없는 세계여서. 하나님의 이 역설이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였구나. 어떠하든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우시다는 것. 내가 아프고 괴로울 때 나보다 더 아프고 괴로우면서도 이를 허용하실 수밖에 없는.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이를 살면서 삶으로, 몸과 마음을 느끼고 당하면서 사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하나님이 특별히 너를 사랑하신다. 나는 이제 어릴 때 지겹도록 들었던 아버지의 그 말씀을 살면서 삶으로 누리게 된다. 아파서 주를 바라고 고통스러워서 주를 의지하며 죄송하고 송구함으로 감사를 배우게 하시는, 감사의 땅 저 천국을 알게 하신다. 저 나라는 영원히 감사한 나라일진대 송구함으로는 죄송하고 염치없음으로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나라인데, 이를 내게 알게 하시려고, 오늘 특별히.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잠 22:19-22).” 아, 이 은혜가 내게 족하다. 분에 넘쳐 몸 둘 바를 모르겠다가도 그것으로 주 앞에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탕자의 마음으로 엎드리게 하신다. 경배와 찬양만이 드려지게 하신다. 내가 들어갈 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할지. 이로써 더욱 주를 바라며 섬기게 하시려고.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시 99:1, 9).”

 

이와 같이 나에게 들리는 걸 너에게 보여주게 하시려고. 나에게 보여주시는 걸 너에게 들려주게 하시려고.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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