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의지할 것이니라

전봉석 2017. 10. 13. 07:19

 

 

 

네 고아들을 버려도 내가 그들을 살리리라 네 과부들은 나를 의지할 것이니라

예레미야 49:11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시편 101:7

 

 

 

주변국들에 대한 멸망의 예언이다. 암몬은 풍요로 교만하였고, 에돔은 천연적인 요새를 의지하였으며, 다메섹은 북이스라엘과 함께 유다를 공격하였고, 게달과 하솔은 경제적 풍요로 쾌락에 젖어 있었으며, 게달은 막강한 무력으로 앗수르와 동맹하여 예루살렘을 침공하였다. 다 때가 있나니, 곧 스러지고 사라지는 게 역사다. 이 땅에 남는 것은 저에 대한 평가라. 오늘의 이런저런 사태를 봐도, 천사만사 각양의 일리와 이치를 붙들고 있지만 또 그때라. 끝내 드러나는 게 악이라면 기어이 덮을 수 없는 게 선이다.

 

이에 주님이 돌보신다. “네 고아들을 버려도 내가 그들을 살리리라 네 과부들은 나를 의지할 것이니라(렘 49:11).” 온전하게 남을 것들에 대하여, 세례요한의 고백이 그 답을 주고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나름의 가치와 기준으로 무얼 할까? 너는 어느 쪽이냐? 묻고 또 묻는 모든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내 멸망으로 마감하는 것뿐이라. 저마다 의지하고 자랑하였던 것은 스러지고 없어질 것인데,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어리둥절하다. 뼈마디가 아픈 계절이 되었다. 창을 다 열어놓고 지낼 때와는 달리, 어둑하니 무거운 고요가 사방을 짓누르는 하루였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하시든. 두신 곳에 있고, 보내신 곳에 가고, 하라고 하시는 일에 열심이면 되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덴, 행여 나의 열심이 또는 수고가 하나님의 열정과 배치되는 것을 느낄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나는 늘 가시적으로 어떤 성과를 먼저 기대하니까 말이다. 보니까 하나님은 주로 감추신다.

 

땅이 씨앗을 품고 뿌리를 감추고 있을 때 줄기가 자라 열매를 맺어가는 것처럼, 줄기가 자라 열매를 맺는 일에서는 또 시나브로 계절 앞에 놓이는 일이었다. 중3 아이 하나가 내달에 무슨 시험을 끝내면 글방으로 온다고. 애는 순하고 착한데 성적은 평균 30점대고, 늘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수업 시간에는 자고 의욕이 없다는. 아내가 긴 한숨을 내차며 설명은 덧붙였다. 그리고 중1 아이는 기어이 무슨 학원을 그만두었고 그 시간을 글방에 갔으면 한다나.

 

중2 여자아이는 남자아이가 생기면서 이상해졌다. 단짝으로 어울리던 친구와는 등을 돌리고, 그래서 서로 공부하러 오는 요일과 시간을 엇갈렸는가 보았다. 글방은 그래도 같이 다니겠다고 하니.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되바라져 담임선생과 부모도 감당이 안 되는가 보았다. 애 엄마가 전화를 하여 구구절절 염려를 늘어놓더라고, 아직 어린데 2학년 아이와 묶어서 글방에 보내도 되냐고.

 

정말 이상하다 싶게 다들 이상한 아이들만 보내신다. 더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은 너무 지나치게 사생활이어서 조심스럽다. 들여다보면 문제의 원점은 엄마다. 혹은 부모다. 자신이 어릴 때 우울증을 앓던 엄마의 터무니없는 트집과 간섭에 노출됐던 아이의 기억은 은연중에 보복 심리를 발동한 것이다. 술 담배에 절어 있는 아이엄마의 경우 이제 2학년인 딸애가 뭘 알겠나 싶어 늘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만, 아이가 넘겨짚기를 애인이 생긴 것 같다나. 배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늘 주눅이 든 막내아이의 여린 심성도 그렇고.

 

그렇게 봐서 그런가, 아니면 우리가 너무 과도하게 의식을 해서 그런가.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 아이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길 아내에게 들을 때면 그저 기가 찰 노릇이다. 우리의 기도제목은 하나님을 모르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어서,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어서, 부디 우리의 마음이 또는 사랑이 주님의 것이기를. 가시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다 어그러져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기 일쑤지만. 결코 우리의 마음이 헛것이 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때론 낭비되는 열심이 얼마나 많은지. 나름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드러나기를, 대놓고 그런 건 아니지만 몰라주면 서운하고 알아주면 우쭐한 것이, 내가 헌신을 선택하고 목회지를 선정하고 비전을 모색하며, 그럼 되겠지 싶은 마음이 얼마나 나를 쥐고 흔들곤 하는지 모른다. 이에 오늘 본문은 그 모든 것들의 부질없음을 예언하고 계신다. 풍요가, 열심이, 나름의 가치와 기준이, 또는 반듯한 명분이 주를 거역하는 데 사용되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 멸망뿐이라는 것에 대하여.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사 58:4-5).” 부디 우리의 열심이 우리를 삼키지 않게 하시기를. 애써 무엇을 하였든 이를 곧 주께 내어놓는다는 건 잊어버리고 금세 잊히는 일이었다.

 

기억되는 선은 이미 선이 아닌 것이다. 오른 팔이 한 일을 왼 팔이 모르듯이. 참 신기하지?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마 11:20).” 성공과 보람이 우리를 망가뜨릴 위험이 높다. 헌신은 주께서 지정하시는 일이지 내가 도모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내가 드릴 것은 나인 거지 나의 업적이나 공과가 아니다.

 

딸애는 입시철이라 앞으로 이삼 주 야근이었고, 아내와 나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우리에게 맡기신 아이들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나는 듣고 아내는 설명하였다. 넘긴다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아이엄마들의 시름이 깊을 때면 아이를 글방으로 넘긴다. 그래서 당장 중1 아이가 내주부터 따로 올 것 같고 중3 아이는 내달에 이어서 올 것 같다는. 애들 시간을 맞추면서 참 이상하다 생각이 드는 것은 정말 이상한 애들만 붙이시는 것이 말이다. 더 말해 뭘 하겠나만 다들 날 닮은 아이들이지 않나. 나 어릴 때, 또 여전히 안고 씨름하는 문제에 대하여서 어쩜 일부러 맞춤이지 싶을 정도다.

 

이젠 뭐, 주시는 대로 두시는 곳에서 내가 애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에 대하여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뿐. 내가 붙들어 줄 수도 없고 어찌 변화시킬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내가 변하는 거였다. 나의 의욕이 주님의 의욕으로 바뀌고 어떤 기대나 성과에 대한 계획은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만 채워지는 것이다. 안 그럼 늘 실망뿐이라. 지쳐서 사랑도 못하겠다. 애써 맘 주면 영락없이 떨어져나간다. 보니까 가장 훌륭한 목회란 자꾸 잊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없고 나를 통해 느낀 혹은 보았던 주님만이 남게 되는 것.

 

주님과의 교제란 그런 거였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 내가 어두운 데서 들은 주의 음성은 아이들 앞에서, 밝은 데서 말해주는 것이다. 주님이 내게만 귓속말로 하신 것을 나는 집 위에 올라가 큰 소리로 증거 하는 거였다.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3).” 그렇구나. 내가 혼자 속앓이하듯 누굴 생각하고 어떤 아이를 두고 마음 쓰며 주의 이름을 부르던 것이 결코 헛된 게 아니었다.

 

오직 예수만이 보이더라.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눅 9:36).”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다. 누굴 닮고 동화되어 저의 목회를 배우는 게 옳은 게 아니었다. 저에게서 예수를 보지 못한다면 그게 허상이었다. 저는 없고 예수만 남지 않으면 그게 헛일이었다. 곧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여기서 사랑은 나의 마음이 아니었다. 나의 헌신도 희생도 봉사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이 죽어 나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고, 그 사랑이 내 안에 거하심이 성령이신 것이다. 곧 내 안에 성령이 없으면 내가 나를 불사르게 내어줘도 내 모든 것으로 구제해도 이는 내게 아무 유익도 아니었다. 안 믿는 자들도 한다. 예수를 부정하는 성인들도 많다. 간디는 부활의 주님을 부정했다. 놀라운 많은 예술가는 역사 속의 사람 예수만 칭송했다. 성경은 단지 위대란 신화이었다.

 

그래 한 끝 차이다. 그게 그거인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교를 떠나고 어디에서 봉사하는 일을 도모하고 자신은 남은 삶을 희생한다지만, 과연 내가 아는 나의 헌신이 진실할까? 나의 봉사와 희생이 정말 가짜는 아닐까? 날 위한 만족은 아니었을까? 이를 결연히 일갈하는 세례요한의 고백이 귀하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나는 잊히는 게 맞았고, 누구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닌 게 옳았다. 내 말에 신빙성은 성경을 걷어내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맞는 것이다. 누구의 존경을 받고 누구의 칭송을 얻는다는 게 얼마나 두렵고 끔찍한 일일 수 있는지.

 

거기서 보람을 찾으려 했던 나의 마음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나님이 두신 오늘이, 여기가, 여기서의 내 이야기가 목회일지였다. 날마다 혼자 씨름하고 엎치락뒤치락 요동하기 일쑤면서도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고 구하는 나의 이야기들 말이다. 아내와 잠깐 그런 얘길 나누었다. 우리가 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주가 보내시니까 우린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뿐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지고 없었던 일이 된다면 그것으로 잊혀지는 게 맞는 것이다. 애써 기억을 더듬고 이를 상기시켜, 그러니 네가 나한테 어찌 그럴 수 있니? 말할 거 없다.

 

오늘 시편은 이를 단호히 말씀하신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 101:7).”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하기 쉬운 직분이 목사였다. 남들에게는 물론 자신에게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1).” 나의 수고와 애씀이 아니다. 아프면 아파하고 슬프면 슬퍼하면서 주 앞에 정직히 서는 일, 내가 주의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그리하여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2).” 이와 같은 기도가 날마다 드려지기를.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3).” 곧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4).” 그러기 위해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5).”

 

곧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6).” 그 길, 주께서 갚아주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욜 2:25).” 오직 한 길, 이를 사모할 수 있게 하심이 감사요 축복임을.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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