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

전봉석 2017. 10. 14. 06:49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너의 날 곧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

예레미야 50:31-32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

시편 102:14

 

 

 

자정을 넘겨 일이 끝났다. 딸애가 택시를 타고 와야 한다는 말에 아내는 안절부절못하였다. 결국 그 시간에 아이 직장인 학교로 갔다. 서울 도로는 밤낮이 따로 없었다. 오늘이 면접을 치르는 날이라, 그 서류 일체를 처리하는 데 그리들 밤을 새워 야근을 하였다. 그리고 다섯 시. 부리나케 출근 준비를 하는 딸애가 안쓰럽다. 이렇게 해주면 좋을 텐데, 저렇게 하면 어떨까. 나는 궁리만 많다. 사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것처럼 사는 데 따른 고단함이 쉼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뭘 더 어찌할 수도, 해줘도 안 되는 것이어서 마음만 동동거린다.

 

오늘 말씀에서 결국은 바벨론이 멸망하는 예언에 대하여, 그 부질없음이 역사의 바탕을 이루고 우리네 삶의 기초가 된다는 데 먹먹하고 두렵다. 말 그대로 천년만년 갈 줄 알고 천사만사 이루지 못할 게 없는 것처럼 굴다, 스러지고 소멸되는 것의 허망함에 대하여. 이를 상대적으로 더욱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주의 자녀들에 대한 주의 사랑이시다.

 

결국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너의 날 곧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렘 50:31-32).” 교만의 결과는 멸망이다. 그러나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시 102:14).” 하찮음에서도 즐거워하고 덧없음에도 은혜를 입는 게 주의 종들의 고백이 된다.

 

아침에 같은 층에 있는 교회 목사님이 왔다. 요는 지역 교회 목사님들이 초교파적으로 모여 지역사회를 위해 뭔가 의기투합한다는 내용으로 같이 하자는 거였다. 하필 그날 아침에 글방으로 올라가다 사모님을 만났다. 작은 아이 유치원에 보내고 그렇듯 오전에 일찍 교회로 나온다고 하였다. ‘믿었던 성도들의 배신’으로 공황이 왔을 정도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젊은 목사의 치기어린 관심과 동참을 독려하는 말에 정중히 거절했다. 지역사회보다 나는 당신에게 또 사모님에게 그 세 자녀들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식의 의기투합이 오래갈 거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세 번째 깨지고 다시 시도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할 일들이 없나?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아침에 저가 오기 전에 읽던 부분이 모세의 죽음이었다(신 34장). 모든 건 끝이 있으며 모든 끝은 언제나 가열찬 것이었다. 너무도 강렬하고 격렬하여서, 나는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7).” 그런 그를, 어쩜 그리도 야박하신가! 요단 건너로 보이는 약속의 땅이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부당하신가? 저가 다루시는 죽음은 야멸차기만 한 것인가?

 

공책에 메모하고 여러 번 되뇌고 있을 때, 옆 교회 목사가 왔다. 나는 공황이 왔을 정도로 힘들어하는 사모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왜 아빠는? 하면서 사춘기에 접어들었다는 댁의 큰 아들 중3 아이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나는 지역사회나 지역사회를 운운하는 목사들의 모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에둘러 표현한 것이나 나의 요는 그것이었다. 자신의 교회가 이단으로 오해를 받았었다나. 교육청에 신고가 들어가기도 했고, 주변 교회 목사들로부터 공격도 받았었다나. 요는 나더러도 조심하라는 거였다.

 

그러게. 당사자가 아니어서 섣불리 말할 게 아니지만, 그런 걸 신경 쓰고 꺼려하며 조심해야 할 만큼 나는 정치적인 인물이 못되어서. 그러자 또 어느 다른 모임이 하나 있는데, 거긴 또 공황장애 신경쇠약발작 등을 경험했거나 앓고 있는 목회자들의 모임이라고 하였다. 돌아가면서 서로 만나고 위로를 얻고 하는, 그런 모임에는 나오겠냐고 물었다. 풉, 하고 웃자 저는 나의 의중을 알았다는 듯 더는 권하지 않았다.

 

나는 뭘 믿고 배짱인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가면서 생각했다. 이렇듯 혼자 들어앉아 있으면 이상하게 여기고 자칫 이단으로 오해 받기 십상이라고 귀띔해준 저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다만 다행인지 뭔지, 나는 그리 개의치 않았다. 그러든 어쩌든 것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고립무원이라. 것도 상관없었다. 하나님이면 됐죠 뭐. 목회자가 예수만이면 충분하지요 뭐. 조금은 단호하게 나는 그리 일렀다. 어떤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까? 목사고시 면접 때 대답하게 하신 나의 대답이 푯대가 되어줄 줄이야. 곁에 두신 단 한 영혼이라도 주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그 대답이 참으로 맹랑하였다는 것을 해가 거듭될수록 피부로 느낀다. 나가서 모임을 결성하고 뭔가 하려는 의지에 팔려 의기투합하는 것이 쉽다. 보니까 가장 어려운 게 말씀을 내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가만히 주의 뜻을 구하는 일이다. 모세가 죽었다. 여호수아가 다음을 이었다. 때는 가고 때는 오나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나는 다만 나의 때에 맞는 자리와 위치를 주께 맡겨드리는 것. 내가 어찌, 어떻게 해보려는 게 아니라. 오후께는 동생과 통화를 했다. 추석 쇠고, 다시 학원원장 부탁으로 학원차 운전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교회 부교역자 자리가 있는데, 어쩌다 지난 주일에 면접도 보게 된 것이었고. 한데 전임으로 하자니 뭐가 어떻고 파트로 하자니 또 뭐가 어떻고. 길어지는 말에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네가 배가 부르구나! 나의 의견은 그러했다. 다시 학원차를 운전하게 되었으니, 그 수입 정도면 남는 시간에 다른 일을 도모하면서 자유로울 수 있는데, 파트로 사역을 맡아서 수요일이 어떻고, 집에서 거기까지 거리가 또 어떻고 하는 지청구가 그리 들렸다.

 

본질을 벗어나지 말자. 살 궁리의 하나로 목회를 하는 게 아니지 않나. 초교파적인 목사들의 모임이 지역사회를 돌아보는 데 초점이 맞춰지거나 자신들의 병약함을 동질적으로 해소하려 드는 차원의 모임은 좀 아니지 않나. 뭐, 다들 나름의 취지와 목적이 있는 것이고 거기에는 대의명분과 성경의 주도하심도 있다고는 하겠으나. 그러게. 난 잘 모르겠다. 동생에게도 ‘네가 배가 불러!’ 하는 나의 핀잔으로 하고 싶던 말을 취합하였다. 더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기도해보고 주의 인도하심을 따르라고 일렀다.

 

성령의 역사? 그건 과연 무얼까? 치유? 전도? 부흥? 아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 푹, 빠지는 것. 그 사랑에 완전히 매료되어 우리의 고통 혹은 부진함, 이 세대의 악하고 병든 모습들에 대한 연민도 불굴의 의지도 아니다. 그건 성령 없이도 잘 하는 사회나 사람이 많다. 그럼 왜 꼭 굳이 목사이어야 할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증인이 된다는 건 구호도 주장도 그리 풀어가는 유추도 아니다. 그 자체, 그리스도의 사랑에 푹 빠져서 예수로 사는 일.

 

열정은 타오르는 감정이면서 감수하는 고통의 인내다. 가만히 있는 게 가능한 경우는 지독한 신경쇠약자이거나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다. 사랑의 감정은 다만 너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이를 위해 다른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게 아니다. “그런즉 가만히 서 있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삼상 12:7).” 곧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욥 4:12).”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나는 옆 교회 젊은 목사에게 말하였다. 오죽했으면 나 같은 사람을 목사로 세우셨겠습니까? 더는 꼼짝 마라, 하시는 의미다. 나에겐 그렇다. 얼마나 성경적인지는 가늠할 수 없다. 하나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는 이 바울의 고백을 사랑한다. 약한 것을 개선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저도 심장병이 올 정도로 스트레스가 많아 한동안 너무 힘들었다고 하는 말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그런저런 모임엘 나가는 것 같아 하는 소리였다. 뭘 꼭 그렇게 나으려고 합니까? 누가 어떻게 암을 이겨냈고, 우울증을 극복했으며, 사업실패에 재기를 일구었는가 하는 따위의 말들은 세상에 널렸다. 나는 저의 열심에 조금은 의구심이 들어, 이번 주에 나는 정신과를 다녀와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게 뭐? 그래서 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도모하느니 이를 통해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욱 농밀하였으면 좋겠다. 사랑은 참으로 내밀한 것이어서 ‘나와 너’만 있으면 되는, 그것으로 충만한 무엇이다.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사랑이니까 말이다. 안 참고, 안 믿고, 안 바라고, 안 견디면? 그처럼 사랑하시는 이가 나를 여기에 두시고 이렇게 두시는 것이겠으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본래 사랑에는 이상적인 조건 따위는 없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질그릇에 두신 까닭은 그 사랑이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8-10).” 어찌 모면하고 이겨내려 애쓸 거 없다. 내게 주의 생명이 담겨진 것은 그 사랑이 어떤 조건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이다.

 

우리가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1).” 그러므로 살아도 죽어도 내가 주의 생명을 나타내는 데 소용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내 것이 내 것이 아닐진대 무엇으로 더 나은 일을 도모하려 하겠나. 오직 예수만이 나를 충족시킬 수 있음을.

 

그리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곧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눅 22:28).” 왜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삶은 고된지, 몸은 어려운지, 일은 풀리지 않는지, 사람은 떠나는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모진 어려움들에 대하여 당연한 것으로 여기자. 그만큼 나의 완고함이 완고하기만 하였구나.

 

다만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7).” 결국은 죽어질 나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길. 주님만 드러나길.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랑만 담고 의지하며 닮으며 살아가길. 그리하여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시 102: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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