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사사기 1:27-28, 2:1-5 / 보김의 눈물

전봉석 2017. 10. 27. 12:51

20171029 주일

사사기 1:27-28, 2:1-5

보김의 눈물

 

 

1: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1: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2: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2: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들어가는 말

 

무언가를 새로 익힌다는 건 그래서 어려운 일이다. 길들여진 익숙한 것으로부터 강한 저항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아이 때 가장 어려운 교육은 그 고집을 꺾는 일이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그래서 참 무서운 속담이다. 사람 참 안 변한다. 기어이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말로해서는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담의 타락 이후 우리의 숙명이 되었다.

 

이를 바울 사도는,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라고 하였다. 어쩌겠나.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7).”

 

그래서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는 마음의 실태는,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28-32).” 그 실상이 참혹하기만 하다.

 

오늘 본문 보김의 눈물에서 회복의 길을 살펴보자. 예배의 참 필요성을 알 수 있다.

 

쫓아내지 못하매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1:27-28).”

 

이는 처음이 아니었다. 40여 년 전 그들의 선조가 애굽에서 나올 때 함께 섞여 나온 무리가 있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12:37-38).” 저들은 그에 앞서 430여 년 전 엄청난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했었다. 앞서 그 곳에서 팔려갔던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였다. 야곱 곧 이스라엘이 그 자녀들과 그곳으로 들어갈 때의 인원은 칠십 명이었다.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46:27).”

 

세월은 흘러 요셉과 이스라엘 민족의 이주는 역사 속의 흐릿한 기록으로 남은 시절이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1:8).” 무려 430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12:40).” 무려 그 수가 60만으로 장장만 헤아려서 그러하게 불어났다. 저들의 존재는 위협적이 되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아 압제했다. 이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3:7-8).”

 

결국 저들을 출애굽하게 구원하실 때 수많은 잡족이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들에 섞여 함께 나온 것이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다. 무려 430년 동안 서로가 얽히고설킨 인연이다. 이는 일찍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6:1-2).” 하는 태곳적 노아 홍수 심판 때도 그러했음을 알아야 한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담배를 아예 안 피워본 사람은 흡연욕구에 시달릴 확률이 적다. 문화에 노출이 덜 된 경우 그 유혹의 정도가 덜할 수 있다.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을 붙들고 살면서 남들처럼갈 데 다 가보고, 누릴 거 다 누려보고,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기는 것으로 세상 낙을 삼으려는 경우는 어째서인가? 그 맛을 알았기 때문이다. 거짓말 해본 사람이 거짓말을 잘한다. 죄란 능숙함의 정도에 따라 끈덕지다.

 

쫓아내지 않았을 때, ‘가나안 족속은 작정하고 내 안에 거주한다. 그 정도야 뭐. 다 그렇지 뭐. 젊을 땐 다 그래. 다들 그러고 사는데 뭘. 하는 식으로, 쫓아내기는커녕 허용의 정도와 범위는 어느 순간 모호해진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4:16-17).”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13:22).” 자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쫓아내지 못했으므로 섞여 사는 잡족이 는다. 그 농간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11:4).” 근심 걱정이 끊이질 않고, 원망과 불평이 자라가고, 세상 즐거움을 마다할 기력이 점점 없어진다. 그게 뭐! 싶은 것이다. 천국은 멀고 세상은 가깝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길,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 그런데 왜 사는 게 지옥일까?

 

오늘 본문 사사기 129절 이후의 말씀을 쭈욱, 읽어보자. 다들 그냥 타협하고 저들을 노역으로 삼는 게 낫다고 여겼다! 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상식적인가! 뭘 꼭 그렇게까지 광신자처럼 믿을 게 있겠나? 적당히 허용하고 포용하면서, 조금은 너그럽게 또는 온당하게. 사람이 먼저다! 사람으로 같이 사는 일에 화합을 도모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사는 게 뭐 그리 문제가 될까?!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올무가 되리라

 

구속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구원은 우리가 이루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 그런데 요즘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말씀을 무슨 공짜표처럼 여기는 경우들이 많다. 과연 그 믿음이 온전한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18:8).” 다들 저마다 믿는다고 믿는다. 교회도 다니고, 교단도 선택하고, 나름의 종교로 삼아 위로를 얻고, 그러니 그게 각각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찌 알 수 있을까?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3:10).” 좋은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안다. 성경은 분명히 일렀으되,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6:43).”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2:18).”

 

곧 우리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지 아닌지, 열매를 봐야 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 그런데 어째서 여전히 옆구리가 찔리는 걸까? 자꾸 왜 올무에 걸리는 걸까? 이는 쫓아내지 않아서, 괜찮다고 여겨서, 그냥 내버려두는 우리의 옛사람 때문이다. 저가 내버려두는 것들이 스스로 찔리고 올무에 걸려 고달픈 것이다. 별 수 있겠나?

 

오늘 본문은 이를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이를 만약에 하나님이 대신해서 쫓아주신다면, 막무가내로 그거야 말로 인격적인 관계라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우리를 꼭두각시로 여기시는 게 아닐까? 하나님도 그러실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이를 위해 사람으로 오셨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주시기까지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도 참고 또 기다리신다.

 

나오는 말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2:4-5).”

 

눈물은 때로 정직한 표현이다. 흔히 냉혹한 사람을 두고 피도 눈물도 없다고 말한다. 남잔 우는 거 아니야. 남들 앞에서 우는 거 아니야. 하는 소리로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런데 가장 어린아이다운 순수한 마음의 표현이 눈물이다. 저들은 주의 말씀을 듣고 울었다. 울고 만 게 아니라 거기서 예배를 드렸다. 어쩌면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반복하며 산다. 사는 날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후회하고 반성하고 용서를 빌고 다시 또 잘못을 저지르면 후회하고 반성하고언제쯤 돼야 이 악순환을 멈출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남들처럼 사는 게 우리가 사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땅에서 희락을 누리는 것으로 복의 기준을 삼아서도 안 된다. 앞으로 펼쳐질 사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어쩔 수 없는 존재들인지. 하여 우리에게 무엇이 과연 절실한지 알게 될 것이다.

 

앞서 오늘은 보김의 눈물에서 우리의 진정한 회복은 눈물과 예배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알았다. 내 안에 남겨진 가나안 족속들 곧 섞여 나온 무리가 없는지, 그와 같은 잡족을 물리쳐야 하는 데 그 필요성을 상고하였다. 나는 못한다. 우리 의지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곧 나는 못합니다, 하는 걸 주께 고백하며 간절히 주의 도우심을 바랄 때,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3:6).” 아멘.